한국과 일본이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함으로써 월드컵의 열기는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축구장으로 몰려든다. 월드컵이 세계적인 ‘빅 이벤트’다 보니 그런 흡인력이 있을 만도 하다. 건국 이래 한국의 축구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운집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한국 축구선수들은 그에 조응해 조별 예선에서 연일 승리하면서 예의 흡인력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했다. 이즈음의 월드컵 열기만 보면 한국 축구계는 이제 한숨 덜어도 될 듯싶다. 축구에 대한 현재의 관심도만 유지해도 한국 축구계는 제법 오랫동안 성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는 국민의 염원이라는 16강 진출 명제에 반대하는 ‘무엄한’ 발언도 있었다. 한국이 절대로 16강에 진출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 16강에 진출할 경우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한국 축구는 망할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TV로 축구 즐기기엔 한계
이유는 간단하다. 모름지기 세상의 이치는 뿌린 만큼 거두어야 하고 들인 만큼 얻어야 한다. 뿌리지 않고서도 손아귀 가득 수익을 쥘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부정한 행위의 소산이거나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는 속임수의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관중 없는 휑한 경기장, 그래서 쓸쓸하기 짝이 없는 축구장에서 오로지 선수들끼리만 시합을 벌이는 K리그의 나라가 경기마다 관중으로 넘쳐나는 나라의 축구를 이긴다면, 그런 세상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반발의 이유다.
한데 히딩크 증후군으로 요약되는 한국인의 ‘축구 사랑’을 보면 그런 걱정은 이제 접어도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단언컨대 월드컵이 끝나면 한국 국내 리그의 게임은 다시 ‘선수들만의 리그’로 돌아갈 게 뻔하다. 하키와 핸드볼이 올림픽 결승에 올라가자 전 국민이 열광하고 이 비인기 종목들을 헹가래쳤지만, 올림픽 이후 지금까지 이 종목들의 인기 없음은 여전하지 않은가.
사실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볼 경기가 아니다. 축구는 공간의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즉 공간의 축소와 확장을 통해 승부를 가리는 게임이라는 말이다. 축구를 경기장에서 직접 보면 이 말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축구는 점들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스포츠다. 축구는 직사각형의 평면에 22개의 점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승부의 세계다. 그래서 축구를 직접 보면 각 점들이 연꽃 오므라들듯 한 곳으로 모였다가 또 개화하듯 확 벌어지곤 하면서 계속 출렁인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텔레비전으로는 볼 수가 없다.
TV 중계는 대개 22개의 점 중 몇 개만 화면에 비추어준다. 그러기에 화면 밖에서 움직이는 점들의 움직임은 볼 수가 없다. 물론 TV 중계의 미덕도 있다. 선수 얼굴의 땀방울이나 미세한 동작들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시청자와 선수들의 정서적 동일화를 매개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축구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게임이 아니다.
문제는 축구의 승부는 출렁대는 공간의 움직임과 그 공간의 운영으로 결정되는 게임인데, TV에서는 언제나 화면 밖의 공간은 생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화면에 보이지 않는 점들이 후방 침투하면서 승패를 결정짓기도 한다. TV에서는 그런 공간의 움직임을 만날 수가 없다. 직접 경기장에 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바나 초원의 사자들은 사냥할 때 목표물을 앞에 두고도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순식간에 가속해 정확히 타깃을 제압한다. 축구가 꼭 그렇다. 축구에는 100m를 몇 초에 뛰느냐보다 순간 스피드가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축구가 초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자의 사냥과 판박이란 점은 경기장에 직접 가보면 안다. 결국 축구의 재미는 그라운드 전체를 한눈에 넣고 점들이 유동하는 장면을 쫓아가는 데 있다. 그런 재미를 보러 가는 사람이 얼마나 증가하느냐가 ‘포스트 월드컵’의 한국 축구를 좌우할 것이다.
한국 축구선수들은 그에 조응해 조별 예선에서 연일 승리하면서 예의 흡인력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했다. 이즈음의 월드컵 열기만 보면 한국 축구계는 이제 한숨 덜어도 될 듯싶다. 축구에 대한 현재의 관심도만 유지해도 한국 축구계는 제법 오랫동안 성황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월드컵이 열리기 전에는 국민의 염원이라는 16강 진출 명제에 반대하는 ‘무엄한’ 발언도 있었다. 한국이 절대로 16강에 진출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만약 ‘운이 좋아’ 16강에 진출할 경우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한국 축구는 망할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TV로 축구 즐기기엔 한계
이유는 간단하다. 모름지기 세상의 이치는 뿌린 만큼 거두어야 하고 들인 만큼 얻어야 한다. 뿌리지 않고서도 손아귀 가득 수익을 쥘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부정한 행위의 소산이거나 일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는 속임수의 다른 형태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관중 없는 휑한 경기장, 그래서 쓸쓸하기 짝이 없는 축구장에서 오로지 선수들끼리만 시합을 벌이는 K리그의 나라가 경기마다 관중으로 넘쳐나는 나라의 축구를 이긴다면, 그런 세상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반발의 이유다.
한데 히딩크 증후군으로 요약되는 한국인의 ‘축구 사랑’을 보면 그런 걱정은 이제 접어도 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단언컨대 월드컵이 끝나면 한국 국내 리그의 게임은 다시 ‘선수들만의 리그’로 돌아갈 게 뻔하다. 하키와 핸드볼이 올림픽 결승에 올라가자 전 국민이 열광하고 이 비인기 종목들을 헹가래쳤지만, 올림픽 이후 지금까지 이 종목들의 인기 없음은 여전하지 않은가.
사실 축구는 텔레비전으로 볼 경기가 아니다. 축구는 공간의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즉 공간의 축소와 확장을 통해 승부를 가리는 게임이라는 말이다. 축구를 경기장에서 직접 보면 이 말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축구는 점들의 연결로 이루어지는 스포츠다. 축구는 직사각형의 평면에 22개의 점이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승부의 세계다. 그래서 축구를 직접 보면 각 점들이 연꽃 오므라들듯 한 곳으로 모였다가 또 개화하듯 확 벌어지곤 하면서 계속 출렁인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텔레비전으로는 볼 수가 없다.
TV 중계는 대개 22개의 점 중 몇 개만 화면에 비추어준다. 그러기에 화면 밖에서 움직이는 점들의 움직임은 볼 수가 없다. 물론 TV 중계의 미덕도 있다. 선수 얼굴의 땀방울이나 미세한 동작들을 클로즈업함으로써 시청자와 선수들의 정서적 동일화를 매개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축구는 선수들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게임이 아니다.
문제는 축구의 승부는 출렁대는 공간의 움직임과 그 공간의 운영으로 결정되는 게임인데, TV에서는 언제나 화면 밖의 공간은 생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화면에 보이지 않는 점들이 후방 침투하면서 승패를 결정짓기도 한다. TV에서는 그런 공간의 움직임을 만날 수가 없다. 직접 경기장에 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바나 초원의 사자들은 사냥할 때 목표물을 앞에 두고도 느릿느릿 움직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순식간에 가속해 정확히 타깃을 제압한다. 축구가 꼭 그렇다. 축구에는 100m를 몇 초에 뛰느냐보다 순간 스피드가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축구가 초원에서 이루어지는 사자의 사냥과 판박이란 점은 경기장에 직접 가보면 안다. 결국 축구의 재미는 그라운드 전체를 한눈에 넣고 점들이 유동하는 장면을 쫓아가는 데 있다. 그런 재미를 보러 가는 사람이 얼마나 증가하느냐가 ‘포스트 월드컵’의 한국 축구를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