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 ‘만약’이란 단어를 붙이는 것이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만약’의 상상을 즐기곤 한다. 복거일씨가 1987년 발표한 ‘비명을 찾아서’(전 2권)는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총살당한다는 ‘만약’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되고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라는 설정이다. 이런 작가의 상상력을 토대로 만든 영화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다.
그러나 ‘만약’은 아무 데나 붙일 수 없다.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극적인 순간, 결정적인 사건이어야 한다. ‘쿠오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는 세계사를 바꾼 재난과 전투, 암살을 주제로 9개의 장면을 골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원히 역사의 뒤안으로 보내버린 워털루 전투,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스페인 무적 함대의 침몰, 철갑기사 시대에 종말을 고한 크레시 기사 전투, 카이사르 살해, 베들레헴 유아대학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의 암살, 14세기 베네치아 시민 4분의 3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폼페이를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 그리고 지금까지도 온갖 억측과 공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
9명의 저자가 고른 9개의 장면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충분하다. 독일 공영방송 ZDF TV의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책으로 펴낸 것이어서 유럽이라는 지역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들만의 관심으로 제한되었다는 인상도 짙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고 내레이션이 들리는 착각에 빠질 만큼 역사의 현장을 훌륭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수천년 전 사건에 대해 과거형을 쓰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서술한 저자들의 재치도 한몫한다.
역자인 정초일씨는 이 책에 대해 “유익하지만 따분한 역사 강좌와 비화 추적이 유발하는 단발성 흥미의 중간쯤에 알맞게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내용은 따분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제 선택에서 흥미 유발의 혐의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믿거나 말거나’ 수준은 절대 아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실제 이 전투에 모든 것을 건 나폴레옹은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부하 그루시의 바보 같은 행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설령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서 미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제국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럽은 이미 굳건한 반(反)나폴레옹 동맹을 맺고 몰락한 황제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1588년 영국해협에서 벌어진 스페인 천하무적 함대와 영국 함대의 전투는 역사의 주인공을 바꾸어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만약’ 스페인이 이겼다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저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대제국 건설의 환상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라는 공명심에 빠져 수천명의 이름 없는 스페인 병사들을 희생시켰다고 말한다. 펠리페 2세 역시도 패배의 대가로 힘과 명성을 모두 잃고 이듬해 숨을 거둔다.
중세 천하무적으로 통했던 철갑기사의 종말은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철갑기사와 공룡의 비유는 적절하다. 공룡의 멸종 원인과 관련해 거대한 운석에 의한 떼죽음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미 파충류인 공룡들은 유연하고 민첩한 포유류에게 밀리고 있었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쇳덩어리로 무장해 굼뜬 기사들이 별다른 보호대도 착용하지 않은 날렵한 궁수들을 이길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을 부른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사건은 ‘만약 암살이 실패했다면 20세기 역사가 달라졌을까’라는 가정 대신 왜 이 예견된 사건을 막지 못했는지에 더 많은 의문부호를 단다.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을 예감하고 황제에게 그곳에 보내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그는 특별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다. 심지어 운명의 날 1차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시가행진을 계속하다 두 번째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어이없는 부주의 때문에 850만의 사망자, 2100만의 부상자, 800만명의 전쟁포로와 실종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한순간 화산재 속에 묻혀버린 폼페이 주민들도 자신들에게 닥칠 재앙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편은 대폭발이 있기 17년 전 지진으로 황폐해진 도시를 복구하는 데 성공한 폼페이 시민들이 온갖 폭발의 징후들을 무시하고 마지막까지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대답하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5월 2권 ‘배신과 스캔들, 재판의 역사’가 출간될 예정이다.
쿠오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엮음/ 정초일 옮김/ 348쪽/ 2만3000원
그러나 ‘만약’은 아무 데나 붙일 수 없다. 역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극적인 순간, 결정적인 사건이어야 한다. ‘쿠오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는 세계사를 바꾼 재난과 전투, 암살을 주제로 9개의 장면을 골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영원히 역사의 뒤안으로 보내버린 워털루 전투, 세계사의 지형을 바꾼 스페인 무적 함대의 침몰, 철갑기사 시대에 종말을 고한 크레시 기사 전투, 카이사르 살해, 베들레헴 유아대학살,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의 암살, 14세기 베네치아 시민 4분의 3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폼페이를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 그리고 지금까지도 온갖 억측과 공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설 속의 아틀란티스.
9명의 저자가 고른 9개의 장면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충분하다. 독일 공영방송 ZDF TV의 역사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책으로 펴낸 것이어서 유럽이라는 지역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들만의 관심으로 제한되었다는 인상도 짙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눈앞에 영상이 펼쳐지고 내레이션이 들리는 착각에 빠질 만큼 역사의 현장을 훌륭하게 재현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수천년 전 사건에 대해 과거형을 쓰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서술한 저자들의 재치도 한몫한다.
역자인 정초일씨는 이 책에 대해 “유익하지만 따분한 역사 강좌와 비화 추적이 유발하는 단발성 흥미의 중간쯤에 알맞게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 내용은 따분함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주제 선택에서 흥미 유발의 혐의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믿거나 말거나’ 수준은 절대 아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실제 이 전투에 모든 것을 건 나폴레옹은 승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부하 그루시의 바보 같은 행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설령 나폴레옹이 이 전투에서 미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해도 제국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럽은 이미 굳건한 반(反)나폴레옹 동맹을 맺고 몰락한 황제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1588년 영국해협에서 벌어진 스페인 천하무적 함대와 영국 함대의 전투는 역사의 주인공을 바꾸어놓은 일대 사건이었다. ‘만약’ 스페인이 이겼다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저자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대제국 건설의 환상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라는 공명심에 빠져 수천명의 이름 없는 스페인 병사들을 희생시켰다고 말한다. 펠리페 2세 역시도 패배의 대가로 힘과 명성을 모두 잃고 이듬해 숨을 거둔다.
중세 천하무적으로 통했던 철갑기사의 종말은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철갑기사와 공룡의 비유는 적절하다. 공룡의 멸종 원인과 관련해 거대한 운석에 의한 떼죽음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미 파충류인 공룡들은 유연하고 민첩한 포유류에게 밀리고 있었다. 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쇳덩어리로 무장해 굼뜬 기사들이 별다른 보호대도 착용하지 않은 날렵한 궁수들을 이길 수 없었던 것과 같다.
제1차 세계대전을 부른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사건은 ‘만약 암살이 실패했다면 20세기 역사가 달라졌을까’라는 가정 대신 왜 이 예견된 사건을 막지 못했는지에 더 많은 의문부호를 단다.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사라예보에서의 암살을 예감하고 황제에게 그곳에 보내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그는 특별한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겼다. 심지어 운명의 날 1차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시가행진을 계속하다 두 번째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어이없는 부주의 때문에 850만의 사망자, 2100만의 부상자, 800만명의 전쟁포로와 실종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한순간 화산재 속에 묻혀버린 폼페이 주민들도 자신들에게 닥칠 재앙을 이미 알고 있었다. ‘베수비오 화산’편은 대폭발이 있기 17년 전 지진으로 황폐해진 도시를 복구하는 데 성공한 폼페이 시민들이 온갖 폭발의 징후들을 무시하고 마지막까지 도시를 포기하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적 사실의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고 대답하려는 노력이 느껴지는 책이다. 5월 2권 ‘배신과 스캔들, 재판의 역사’가 출간될 예정이다.
쿠오바디스, 역사는 어디로 가는가/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엮음/ 정초일 옮김/ 348쪽/ 2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