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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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몇 장만 넘기면 어느새 ‘童心’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09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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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몇 장만 넘기면 어느새 ‘童心’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옆구리에 ‘해리포터’를 끼고 있는 대학생들이 자주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들이 ‘해리포터’에 대해 한마디 하기 시작한 지는 꽤오래되었다. 요즘은 영화평론가들이 가세했다. 자녀의 성화에 못 이겨 책을 사준 엄마들이 이제 슬그머니 아이들 방 책장에서 ‘해리포터’를 빼든다. 재미있다는데 남녀노소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림책은 글자를 익히기 전 유아용이고, 동화책은 초등학생 때까지만 보아야 한다는 낡은 생각을 벗어던지면 볼 만한 책은 훨씬 많아진다.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1970년작)가 바로 그런 경우다. 초등학생 시절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어른이 되어 또 한 권을 샀다. 21세기를 시작하며 화두가 된 ‘느림’의 의미를 내게 가장 먼저 알려준 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최근 한국어판으로 나온 엔데의 ‘마법의 술’이 아동용으로 분류되는 것에 구애받지 말자.

    요즘은 처음부터 성인과 아동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책들이 많다. 환상적인 동물그림이 가득한 ‘하케의 동물 이야기’는 과연 누구를 위해 씌어졌을까. 저자 악셀 하케는 성인용, 아동용이 아니라 그냥 “느낌이 있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이라고 했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에 온몸을 불사르지만 그때마다 오히려 배척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바퀴벌레. 바퀴벌레의 삶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걸작이다. ‘운명을 건 짝사랑’. 바다를 온통 은빛으로 물들이는 청어 떼를 만났을 때 그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어떻게 눈썹 없이 살 수 있지?” “상어가 살고 있는 바다에서 어떻게 그처럼 느긋하게 수영을 즐길 수 있지?”

    ‘하케의 동물 이야기’는 이 동물을 무슨 종으로 분류하고, 무엇을 먹고 살고, 평균 몸무게는 몇인지 등등 동물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동물의 영혼, 그 깊은 내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동물 입장에서 생각하기’라고 설명하면 쉬울까. 저자는 동물의 눈에 비친 인간이 얼마나 우스운 존재인지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변신에 능한 사람을 가리켜 ‘카멜레온’이라 하지만 진짜 변화의 귀재는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출근할 때는 모두 넥타이를 매고, 산에 갈 때는 등산복을 입으며, 사우나에 갈 때는 다들 벌거벗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국회에서 연설할 때 화가 나면 고래고래 고함 지르고(독일도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모양),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면서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카멜레온이라면 그렇게 난리를 피우지 않을 것입니다. 국회의장의 호명을 받으면 조용히 연단으로 나가겠지요. 그리고 검은색, 녹색, 노란색, 흰색을 차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모두들 상황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일 테지요. ‘음, 저 카멜레온은 예산안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구나!”



    이 책을 번역한 이영희씨가 “10여년 동안 많은 책을 번역했지만, 이처럼 곤혹스럽고 즐거운 책은 없었다”고 한 것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만약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동물의 왕국’에 넋을 잃는 독자라면 ‘하케의 동물 이야기’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미하엘 소바의 환상적인 일러스트다. 악셀 하케가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아도 소바 역시 천연덕스럽게 그림으로 옮겨 놓는다. 하이에나 가족이 다정하게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몽둥이를 들고 숨어 있는 사자의 모습은, 알고 보면 하이에나가 사냥의 명수고 사자는 비열한 강도임을 보여준다. 26개의 동물 이야기 중 소바의 일러스트가 빠진 몇 개의 장은 그냥 건너뛰고 싶을 만큼 섭섭하다. 그만큼 일러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책이다.

    ‘하케의 동물 이야기’ 표지를 보는 순간 언뜻 떠오른 책이 크빈트 부흐홀츠의 ‘책그림책’이다. 부흐홀츠는 독일의 유명한 책표지 전문 일러스트레이터다. ‘책그림책은’ 1년 전 한국어판으로 나왔는데 흥미롭게도 부흐홀츠가 그린 46장의 그림을 보고 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 등 46명의 작가들이 각자 짧은 에세이를 썼다. 텍스트를 보고 거기에 따라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반적인 순서와 정반대다.

    그러나 독자 입장에서는 굳이 텍스트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요슈타인 가아더(‘소피의 세계’의 저자)가 뭐라고 했든 부흐홀츠의 일러스트를 자기 식으로 읽어보는 거다. 홀로 허허벌판 눈 위를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시선은 공중에 펼쳐져 있는 책에 머물렀는지 목이 약간 뒤로 젖혀진 상태다. 한 손에 지팡이 삼아 우산을 쥐고 걸어가면서 하늘 위의 책을 읽는 남자. 문득 그가 어떤 표정으로 책을 읽는지 궁금해진다. 어른들에게도 때론 그림책이 필요하다.

    하케의 동물 이야기/ 악셀 하케 지음/ 미하엘 소바 그림/ 이영희 옮김/ 창해 펴냄/ 152쪽/ 7500원

    책그림책/ 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민음사 펴냄/ 124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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