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장미와 나비\'
비단 천경자가 그린 여인뿐만이 아니다. 12월14일부터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채색의 숨결-그 아름다움과 힘’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모두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또는 만개한 붉은 장미처럼 자신들의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 전시에는 박생광 천경자 박래현 이화자 정종미 김선두의 작품 45점이 전시되었다.
이화자 '저녘무렵'
‘채색의 숨결’전이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천경자 박래현 박생광 등 거장들이 그린 채색화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1층을 채운 천경자와 박래현의 작품은 그 성격이 마치 흑백 구도처럼 확연히 달라 보는 재미를 더한다. 1960, 70년대 한국 화단을 주름잡던 두 여성 화가는 서로 묘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천경자의 그림은 화려하고 이국적인 색감으로 여러 작품 사이에서 단연 도드라졌다.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본 풍경들을 그린 그림, 또 나름의 사연을 가진 여인의 초상화 등은 왠지 화가 자신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특이하게도 개구리와 물고기를 그린 8폭 병풍이 등장했다. 날렵한 포즈가 돋보이는 어여쁜 개구리는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았다.
박래현 '고양이'
이에 비해 박래현은 온화하고 가라앉은 색채를 주로 사용했다. 50, 60년대 한국 화단에서 가장 왕성한 실험정신을 보였다고 평가되는 박래현은 구상을 주로 그린 50년대를 거쳐 60년대 들어 판화작업에 몰두하며 추상 쪽으로 행보를 넓혀 나갔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작품들은 주로 추상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 그려진 것들이다. 멍석, 엽전 등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판화기법을 응용한 점도 눈에 띈다. 박래현은 미국에서 6년간 판화를 공부하고 70년대에 귀국, 막 작품활동을 재개하려던 차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박생광 '무속2'
이화자 정종미 김선두는 이들보다 한 세대 후배로 현재 활동중인 채색화가들이다. 박생광과 천경자의 제자인 이화자는 고운 선과 이미지가 돋보이는 단아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섬세한 붓질로 그려낸 그의 ‘초혼’은 망자를 부르는 순간의 숨결까지 잡아낸 듯했다. 또 산뜻한 초록빛 하나만으로 꿈속 세계를 묘사한 정종미의 ‘몽유도원도’, 고려시대 불화 기법인 장지기법을 사용한 김선두의 ‘행’(行) 연작도 전통적 이미지를 세련되게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정종미는 올해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다.
“한국 회화사에서 채색화는 수묵화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구려시대의 고분벽화, 고려의 불화, 조선의 민화가 모두 채색화입니다. 그런데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채색화는 왜색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생겼습니다. 이번 전시가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 우리 채색화의 독창성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전시를 기획한 가나아트센터 김미라 연구원의 설명이다.
단청과 한복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색감들. 채색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잊혔던 우리 전통미술의 또 다른 힘이 전시장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2002년 1월27일까지, 문의: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