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와 정권교체로 동교동의 역사적 임무는 끝났다. 이제 각자 갈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의 정치 출발점이자 둥지인 동교동과의 분가(分家)를 선언한 민주당 한화갑 최고위원의 발언은 단호했다. 떠나려는 자의 의지가 충만했다. 동교동 장형으로 그와 한솥밥을 먹은 권노갑 전 최고위원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라며 안타까워했지만 주변에는 분노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동교동 30여 년은 ‘애증’(愛憎)의 연속이었다.
권 전 위원이 63년, 한위원이 67년 김대중 대통령 비서로 입문했으니 두 사람의 정리는 근 30여 년 쌓인 것이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하며 혈맹적 동지관계를 맺어왔다. 동교동 초기 이들을 결속한 것은 외부에서 불어 닥친 고난과 시련이었다. 71년 김대통령의 교통사고, 73년 도쿄에서의 납치, 유신치하 고문 등 동교동을 향해 날아든 핍박과 고통은 이들을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결속력으로 연결했다. 그들은 암울하던 유신과 군부정권하에서 서로에게 버팀목으로 기대며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지만 공유할 수 없는 권력과 보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암투는 동지적 결속과 관계없이 동교동 내부를 깊숙이 관통했다.
한위원은 동교동 시절 김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한번도 맡지 못했다. 비서실 차장이 그가 맡은 최고직. 그 속에 한위원의 동교동 내 위상과 애환이 녹아 있다. 그는 ‘바깥’의 평가와 달리 동교동에서는 이방인으로 자리매김당할 때가 많았다. 정책·공보 분야에서 동교동의 브레인으로 활동했지만 김대통령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 권 전 위원은 달랐다. 조직과 자금을 전담하며 김대통령의 지근거리를 지켰다. 동교동은 항상 권 전 위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점은 철저하게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 한위원과는 크게 대비하는 부분이다.
이런 흐름에 대해 한위원은 “야당시절 나는 김대통령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용하지 않은 데 대한 섭섭함과 소외감이 없을 리 없다. 이런 소외감은 나아가 권 전 위원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한위원이 “(동교동 인사들이) 자주 모임을 갖는다는데 나는 거기에 참여가 안 된다”고 한 것은 권 전 위원 중심으로 운영하는 동교동에 대한 서운함이 잔뜩 깔린 표현이다
한위원의 소외감과 섭섭함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제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최근 당 사무처직에 한위원측에서 사람을 추천했지만 권 전 위원측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자리는 말단 하위직이었다”고 설명했다.
권 전 위원이 동교동 장형으로 활동하는 반면 한위원이 변방에 머문 것은 김대통령의 용병술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대통령은 한 사람에게 많은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디바이드 앤드 룰’에 따라 역할을 배분한다. 그렇지만 권 전 위원은 예외였다. 김대통령은 언제나 권 전 위원을 동교동의 중심축에 배치했다. 왜 그럴까. 권 전 위원의 처신이 우선 눈에 띈다. 권 전 위원은 역대 정권의 2인자와 달리 절대 1인자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2인자이면서 1인자 자리를 넘보지 않고 철저하게 1인자 의중에 따른다는 원칙, 바로 이 점이 주변의 비난 여론이 있음에도 김대통령이 권 전 위원을 배척하지 않고 신뢰를 보내는 이유로 보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둘 사이의 갈등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나보다 우리, 우리보다 김대중 선생이 상위개념인 그 시절에 개인 감정을 들추는 것은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동교동은 끈끈한 동지적 유대감으로 무장한 정치 결사체여야 했다. 그렇지만 ‘표출되지 못한’ 앙금은 안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권력에 대한 야망과 소유욕은 억누른다고 눌러지지 않는다. 안으로 삭인 감정이 90년 들어 하나둘 겉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95년 한위원이 전남도지사 선거에 나설 결심을 하면서 두 사람의 첫번째 갈등은 모습을 드러냈다. 한위원은 당시 호남 출신 의원들의 절대적 지지로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런데 권 전 위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당시 권 전 위원이 김대통령을 만나 당 내분이 우려된다는 등 한화갑 출마 3대 불가론을 거론하며 김성훈 중앙대 교수를 천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위원은 경선 일주일을 앞두고 사퇴 의사를 밝혔고 앞길을 가로막은 권 전 위원에 대한 원망과 회한으로 며칠 밤을 지새야 했다. 한위원측 한 인사는 “한위원은 그때 동교동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98년 정권을 잡은 이후 이들의 처지는 한순간 뒤바뀌었다. 대선 정국의 와중에 한보사건으로 구속된 권 전 위원은 98년 8월 출감하면서 도피성 외유에 나섰다. 그가 비운 자리는 한위원과 김중권 전 대표, 이종찬 전 국정원장, 문희상 이강래 의원 등이 속속 밀고 들어왔다. 대부분 한위원과 가까운 사람으로 동교동 주변에서는 한위원 시대의 등장을 예언했다. 한위원도 원내총무, 총재특보단장, 사무총장 등으로 연속 발탁되면서 뒤늦게 정치의 꽃을 만개시켰다. 언론은 이를 ‘신주류의 등장’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한위원의 비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99년 2월 권 전 위원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을 추진했다. 오랫동안 비운 권력 중심에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김중권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등 신주류가 그의 귀국을 반대, 한차례 파열음을 일으켰지만 귀국을 막지는 못했다. 귀국 후 권 전 위원은 당 고문직을 맡아 당과 동교동의 패권을 되찾았다.
돌아온 권 전 위원은 자신의 귀국을 반대한 세력(신주류)에 대한 응징에도 나섰다. 김실장은 물론 한위원도 대상 중 한명이었다. 권 전 위원측 설명. “그때 김실장을 중심으로 한 신주류의 귀국 반대 입장을 한위원이 방조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동교동 신·구 세력의 첫번째 대결이자 동교동이 분화의 길로 들어선 실마리였다.
2000년 총선에서 자파 인사들을 공천하려는 양진영은 또 한번 물밑경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한위원이 호남지역 등 공천작업을 지휘했지만 막판에는 권 전 위원이 전권을 쥐고 이를 뒤집어 버렸다. 당시 민주당에는 “장성민 의원(서울 금천구) 공천을 빼고는 모두 권 전 위원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권 전 위원의 압승이었다. 한위원은 무력감을 곱씹으며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돌파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8월 민주당 경선에서 그들은 또다시 부딪쳤다. 권 전 위원은 경선 초기 한위원의 최고위원 출마를 반대했다. 조기 전당대회론을 주장하는 한위원에게 그는 전당대회 연기론으로 압박했다.
한위원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권 전 위원은 직접 출마하는 정면승부를 구상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당내 반권파 및 신주류의 협공으로 그의 구상은 좌절했다. 대신 권 전 위원은 ‘이인제 카드’로 한위원 견제에 나섰다. 권 전 위원이 풀 베팅으로 이위원을 밀었고, 한위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며 공개적으로 ‘장형’을 비난했다.
그들 사이의 동지애는 사실상 사라진 듯했다. 경선 직후 동교동이 모인 자리에서 한위원은 “형님(권최고위원)은 정(동영)최고위원에게 사무실도 내주고 많이 도왔다던데 나에게는 1원 한푼 준 적 있소”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권 전 위원은 침묵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지난해 12월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이 일으킨 정풍파동도 동교동 구파는 한위원이 배후라고 믿는다. 지난 5월 소장파의 인적 쇄신론 역시 마찬가지. 그런 불신과 앙금이 김중권 대표 후임을 놓고 다시 파열음으로 이어졌다. 한위원은 “나는 대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권 전 위원 등 동교동 구파가 민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갑자기 또 한화갑이 아니라고 한다더라”며 자신을 이리저리 재단하려는 권 전 위원측 태도에 적지않게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 부딪침으로 두 인사의 결별을 설명하기란 뭔가 부족하다. 30년 동교동 정리가 몇 번의 충돌로 부서질 정도로 허약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보다 본질적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치권 인사의 분석이다.
정치 진로와 관련한 양진영의 인식 차이가 우선 설득력 있게 거론된다. 민주당 한 고위 관계자는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권 전 위원은 김대통령이 물러나면 (정치 일선에서) 함께 물러날 사람이다. 모든 정치적 스케줄을 여기에 맞춰놓았다. 그러나 한위원은 다르다. 김대통령 임기 뒤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 차이는 바로 당권과 대권에 대한 인식 차로 확대된다. 권 전 위원을 비롯한 동교동계 구파는 동교동계가 독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하며 정권 재창출을 위한 산실 기능만 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가능성 없는 호남후보는 불가(不可)하다는 입장. 이인제 최고위원을 대안으로 생각한다. 반면 한위원 진영은 내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독자후보’를 고집한다. 한위원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이 같은 차이가 이들을 결별의 장으로 내몬 핵심 이유로 보인다.
두 사람은 이제 30여 년 동지애를 뒤로 하고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 동교동계 구파 인사는 “한위원은 동교동계란 원(圓) 속의 한 점일 뿐이다”며 관계 청산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동교동 한 관계자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한위원이 정교하게 짜인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한위원 주변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숙명적으로 연결된 동교동 고리를 끊기로 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는 현실 인식을 토로한다. 지금 분위기로 본다면 동교동에 몸담고 있어 봐야 대권은커녕 당권 확보도 힘들다는 것이 한위원 주변의 인식이다. 경우에 따라 DJ와의 결별도 각오해야 할 것이란 주장도 내놓는다.
한위원은 자신의 저서 ‘양심을 걸고 운명을 걸고’에서 “한번 동교동이면 영원히 동교동이라는 신조로 살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신조는 이제 거둔 것 같다.
동교동은 97년 경선정국에서 처절하게 와해된 상도동 전철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동교동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아올린 권 전 위원과 한위원이 동교동 분화의 정점에 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
권 전 위원이 63년, 한위원이 67년 김대중 대통령 비서로 입문했으니 두 사람의 정리는 근 30여 년 쌓인 것이다.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하며 혈맹적 동지관계를 맺어왔다. 동교동 초기 이들을 결속한 것은 외부에서 불어 닥친 고난과 시련이었다. 71년 김대통령의 교통사고, 73년 도쿄에서의 납치, 유신치하 고문 등 동교동을 향해 날아든 핍박과 고통은 이들을 피를 나눈 형제 이상의 결속력으로 연결했다. 그들은 암울하던 유신과 군부정권하에서 서로에게 버팀목으로 기대며 고난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지만 공유할 수 없는 권력과 보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암투는 동지적 결속과 관계없이 동교동 내부를 깊숙이 관통했다.
한위원은 동교동 시절 김대통령의 비서실장을 한번도 맡지 못했다. 비서실 차장이 그가 맡은 최고직. 그 속에 한위원의 동교동 내 위상과 애환이 녹아 있다. 그는 ‘바깥’의 평가와 달리 동교동에서는 이방인으로 자리매김당할 때가 많았다. 정책·공보 분야에서 동교동의 브레인으로 활동했지만 김대통령과는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반면 권 전 위원은 달랐다. 조직과 자금을 전담하며 김대통령의 지근거리를 지켰다. 동교동은 항상 권 전 위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런 점은 철저하게 기능적 역할을 수행한 한위원과는 크게 대비하는 부분이다.
이런 흐름에 대해 한위원은 “야당시절 나는 김대통령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 같았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용하지 않은 데 대한 섭섭함과 소외감이 없을 리 없다. 이런 소외감은 나아가 권 전 위원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한위원이 “(동교동 인사들이) 자주 모임을 갖는다는데 나는 거기에 참여가 안 된다”고 한 것은 권 전 위원 중심으로 운영하는 동교동에 대한 서운함이 잔뜩 깔린 표현이다
한위원의 소외감과 섭섭함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제약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최근 당 사무처직에 한위원측에서 사람을 추천했지만 권 전 위원측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자리는 말단 하위직이었다”고 설명했다.
권 전 위원이 동교동 장형으로 활동하는 반면 한위원이 변방에 머문 것은 김대통령의 용병술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김대통령은 한 사람에게 많은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디바이드 앤드 룰’에 따라 역할을 배분한다. 그렇지만 권 전 위원은 예외였다. 김대통령은 언제나 권 전 위원을 동교동의 중심축에 배치했다. 왜 그럴까. 권 전 위원의 처신이 우선 눈에 띈다. 권 전 위원은 역대 정권의 2인자와 달리 절대 1인자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2인자이면서 1인자 자리를 넘보지 않고 철저하게 1인자 의중에 따른다는 원칙, 바로 이 점이 주변의 비난 여론이 있음에도 김대통령이 권 전 위원을 배척하지 않고 신뢰를 보내는 이유로 보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둘 사이의 갈등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다. 나보다 우리, 우리보다 김대중 선생이 상위개념인 그 시절에 개인 감정을 들추는 것은 정신적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동교동은 끈끈한 동지적 유대감으로 무장한 정치 결사체여야 했다. 그렇지만 ‘표출되지 못한’ 앙금은 안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권력에 대한 야망과 소유욕은 억누른다고 눌러지지 않는다. 안으로 삭인 감정이 90년 들어 하나둘 겉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95년 한위원이 전남도지사 선거에 나설 결심을 하면서 두 사람의 첫번째 갈등은 모습을 드러냈다. 한위원은 당시 호남 출신 의원들의 절대적 지지로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런데 권 전 위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당시 권 전 위원이 김대통령을 만나 당 내분이 우려된다는 등 한화갑 출마 3대 불가론을 거론하며 김성훈 중앙대 교수를 천거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한위원은 경선 일주일을 앞두고 사퇴 의사를 밝혔고 앞길을 가로막은 권 전 위원에 대한 원망과 회한으로 며칠 밤을 지새야 했다. 한위원측 한 인사는 “한위원은 그때 동교동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정체성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98년 정권을 잡은 이후 이들의 처지는 한순간 뒤바뀌었다. 대선 정국의 와중에 한보사건으로 구속된 권 전 위원은 98년 8월 출감하면서 도피성 외유에 나섰다. 그가 비운 자리는 한위원과 김중권 전 대표, 이종찬 전 국정원장, 문희상 이강래 의원 등이 속속 밀고 들어왔다. 대부분 한위원과 가까운 사람으로 동교동 주변에서는 한위원 시대의 등장을 예언했다. 한위원도 원내총무, 총재특보단장, 사무총장 등으로 연속 발탁되면서 뒤늦게 정치의 꽃을 만개시켰다. 언론은 이를 ‘신주류의 등장’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한위원의 비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99년 2월 권 전 위원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을 추진했다. 오랫동안 비운 권력 중심에 이상기류를 감지하고 더 이상 방치할 경우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김중권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등 신주류가 그의 귀국을 반대, 한차례 파열음을 일으켰지만 귀국을 막지는 못했다. 귀국 후 권 전 위원은 당 고문직을 맡아 당과 동교동의 패권을 되찾았다.
돌아온 권 전 위원은 자신의 귀국을 반대한 세력(신주류)에 대한 응징에도 나섰다. 김실장은 물론 한위원도 대상 중 한명이었다. 권 전 위원측 설명. “그때 김실장을 중심으로 한 신주류의 귀국 반대 입장을 한위원이 방조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동교동 신·구 세력의 첫번째 대결이자 동교동이 분화의 길로 들어선 실마리였다.
2000년 총선에서 자파 인사들을 공천하려는 양진영은 또 한번 물밑경쟁을 벌였다. 초기에는 한위원이 호남지역 등 공천작업을 지휘했지만 막판에는 권 전 위원이 전권을 쥐고 이를 뒤집어 버렸다. 당시 민주당에는 “장성민 의원(서울 금천구) 공천을 빼고는 모두 권 전 위원의 의견이 반영되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권 전 위원의 압승이었다. 한위원은 무력감을 곱씹으며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정면돌파할 것인가’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8월 민주당 경선에서 그들은 또다시 부딪쳤다. 권 전 위원은 경선 초기 한위원의 최고위원 출마를 반대했다. 조기 전당대회론을 주장하는 한위원에게 그는 전당대회 연기론으로 압박했다.
한위원이 고집을 꺾지 않자 권 전 위원은 직접 출마하는 정면승부를 구상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당내 반권파 및 신주류의 협공으로 그의 구상은 좌절했다. 대신 권 전 위원은 ‘이인제 카드’로 한위원 견제에 나섰다. 권 전 위원이 풀 베팅으로 이위원을 밀었고, 한위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며 공개적으로 ‘장형’을 비난했다.
그들 사이의 동지애는 사실상 사라진 듯했다. 경선 직후 동교동이 모인 자리에서 한위원은 “형님(권최고위원)은 정(동영)최고위원에게 사무실도 내주고 많이 도왔다던데 나에게는 1원 한푼 준 적 있소”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권 전 위원은 침묵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지난해 12월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이 일으킨 정풍파동도 동교동 구파는 한위원이 배후라고 믿는다. 지난 5월 소장파의 인적 쇄신론 역시 마찬가지. 그런 불신과 앙금이 김중권 대표 후임을 놓고 다시 파열음으로 이어졌다. 한위원은 “나는 대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권 전 위원 등 동교동 구파가 민다고 그러더라. 그런데 갑자기 또 한화갑이 아니라고 한다더라”며 자신을 이리저리 재단하려는 권 전 위원측 태도에 적지않게 마음이 상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 부딪침으로 두 인사의 결별을 설명하기란 뭔가 부족하다. 30년 동교동 정리가 몇 번의 충돌로 부서질 정도로 허약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길을 갈 수 없는 보다 본질적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정치권 인사의 분석이다.
정치 진로와 관련한 양진영의 인식 차이가 우선 설득력 있게 거론된다. 민주당 한 고위 관계자는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권 전 위원은 김대통령이 물러나면 (정치 일선에서) 함께 물러날 사람이다. 모든 정치적 스케줄을 여기에 맞춰놓았다. 그러나 한위원은 다르다. 김대통령 임기 뒤에도 정치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이 차이는 바로 당권과 대권에 대한 인식 차로 확대된다. 권 전 위원을 비롯한 동교동계 구파는 동교동계가 독자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하며 정권 재창출을 위한 산실 기능만 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가능성 없는 호남후보는 불가(不可)하다는 입장. 이인제 최고위원을 대안으로 생각한다. 반면 한위원 진영은 내년 대선후보 경선에서‘독자후보’를 고집한다. 한위원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이 같은 차이가 이들을 결별의 장으로 내몬 핵심 이유로 보인다.
두 사람은 이제 30여 년 동지애를 뒤로 하고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 동교동계 구파 인사는 “한위원은 동교동계란 원(圓) 속의 한 점일 뿐이다”며 관계 청산을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동교동 한 관계자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다. 한위원이 정교하게 짜인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한위원 주변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숙명적으로 연결된 동교동 고리를 끊기로 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는 현실 인식을 토로한다. 지금 분위기로 본다면 동교동에 몸담고 있어 봐야 대권은커녕 당권 확보도 힘들다는 것이 한위원 주변의 인식이다. 경우에 따라 DJ와의 결별도 각오해야 할 것이란 주장도 내놓는다.
한위원은 자신의 저서 ‘양심을 걸고 운명을 걸고’에서 “한번 동교동이면 영원히 동교동이라는 신조로 살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신조는 이제 거둔 것 같다.
동교동은 97년 경선정국에서 처절하게 와해된 상도동 전철을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 동교동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아올린 권 전 위원과 한위원이 동교동 분화의 정점에 서 있는 점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