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걸프 지역으로 전함과 군용기를 이동배치하고 테러 응징을 위한 21세기 첫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이보다 앞서 북대서양조약기구는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은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이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지만 막상 보복공격에 적극 가담할지는 불투명하다.
유럽연합은 이참에 지난 2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역내 범죄공조체제에 합의하고 유럽통합을 가속화했으며, 일본은 미국의 보복공격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자위대의 정규군화를 노리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태도는 미적지근하지만 반테러 연합에 동참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처럼 각국은 이번 테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한편 돌아서서는 판세 읽기와 실속 챙기기에 분주하다.
51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도 이와 비슷했다. 한국전쟁은 비록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작은 국가에 국한하였고, 또 한국인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한 분쟁이었지만 6개 대륙에서 20개국의 군대가 참전한 국제전으로 번졌다. 물론 이들이 참전을 결정하기까지는 나름대로 계산법이 있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탈린에게 남침 가능성을 제기하고 협조를 구했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던 스탈린이 이듬해 마음을 바꾸어 북한에 비행기, 장거리포, 탱크를 제공하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사실상 전쟁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내적으로 개인 권력을 강화하고, 중국 공산화 이후 상대적으로 약화한 아시아권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또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연히 유럽에 대한 미국의 원조와 관심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러나 전쟁 결과는 나토의 군사동맹화, 서독의 재무장 등 소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편 중국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팽창을 막지 않으면 중국도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같은 공산국가로서의 신의가 발동했다.
그 사이 미국은 설마 북한이 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을 감행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미국에 대한 소련의 도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미국의 오판임이 드러나자 미국은 서둘러 유엔의 지지를 요청했고 이 전쟁에 16개국이 참전했다. 일본은 후방에서 미국을 측면 지원하며 향후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소련의 팽창주의의 영향으로 북한이 남침했다는 전통주의 시각과, 남북한 갈등으로 촉발한 내전으로 보는 수정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며 국제전으로서 분석해야 한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지아 대학 윌리엄 스툭 교수(미국 외교사)는 16년에 걸쳐 ‘한국전쟁의 국제사’에서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전이다”고 결론지었다.
국제전으로서 한국전쟁의 의미는 전쟁 후 승자와 패자가 누구였는지를 따지면 좀더 쉽게 윤곽이 드러난다. 사망자·부상자·실종자를 포함한 한국의 인명 손실은 300만 명(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었고, 재산피해는 북한 17억 달러, 남한 20억 달러(1949년 남한의 GNP에 육박하는 수치)에 달한다. 이처럼 한국은 큰 희생을 치르고도 얻은 게 없다. 여전히 분단상태이고 긴장과 위험도 줄어들지 않았다. 스툭 교수는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한국인 자신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최소한 북한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소련과 동등해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더 이상 중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에 개입한 강대국 중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국제 공산주의의 유일한 지도자적 위치를 훼손당했고, 위에 언급했듯 유럽에서 미국의 입지 약화라는 스탈린의 계산은 빗나갔다.
미국은 일단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고, 장기적으로 중·소 긴장관계가 미국에 이롭게 돌아갔기 때문에 손해볼 것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이라는 새로운 상대를 견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안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유엔의 역할이다. 사실 그동안 유엔은 강대국의 들러리로 의심받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유엔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불사한 미국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약소국이 초강대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한국전쟁을 시작한 것은 북한이었는지 몰라도, 승리는 중국과 미국이 나눠 가졌다. 또 한국에 막대한 피해를 준 한국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대폭 줄이고 전 세계에 냉전이라는 ‘장기 평화’를 선물했다.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 이후 새롭게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지금, 과연 각국이 어떤 손익계산서를 뽑아놓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윌리엄 스툭 지음/ 김형인, 김남균, 조성규, 김재민 옮김/ 푸른역사 펴냄/ 864쪽/ 3만5000원
유럽연합은 이참에 지난 2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역내 범죄공조체제에 합의하고 유럽통합을 가속화했으며, 일본은 미국의 보복공격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자위대의 정규군화를 노리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태도는 미적지근하지만 반테러 연합에 동참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처럼 각국은 이번 테러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한편 돌아서서는 판세 읽기와 실속 챙기기에 분주하다.
51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도 이와 비슷했다. 한국전쟁은 비록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작은 국가에 국한하였고, 또 한국인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한 분쟁이었지만 6개 대륙에서 20개국의 군대가 참전한 국제전으로 번졌다. 물론 이들이 참전을 결정하기까지는 나름대로 계산법이 있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탈린에게 남침 가능성을 제기하고 협조를 구했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던 스탈린이 이듬해 마음을 바꾸어 북한에 비행기, 장거리포, 탱크를 제공하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는 등 사실상 전쟁을 승인했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내적으로 개인 권력을 강화하고, 중국 공산화 이후 상대적으로 약화한 아시아권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또 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자연히 유럽에 대한 미국의 원조와 관심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러나 전쟁 결과는 나토의 군사동맹화, 서독의 재무장 등 소련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한편 중국의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팽창을 막지 않으면 중국도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같은 공산국가로서의 신의가 발동했다.
그 사이 미국은 설마 북한이 소련을 등에 업고 남침을 감행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은 곧 미국에 대한 소련의 도발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미국의 오판임이 드러나자 미국은 서둘러 유엔의 지지를 요청했고 이 전쟁에 16개국이 참전했다. 일본은 후방에서 미국을 측면 지원하며 향후 경제대국으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서는 소련의 팽창주의의 영향으로 북한이 남침했다는 전통주의 시각과, 남북한 갈등으로 촉발한 내전으로 보는 수정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며 국제전으로서 분석해야 한다는 시각이 설득력을 얻는다. 조지아 대학 윌리엄 스툭 교수(미국 외교사)는 16년에 걸쳐 ‘한국전쟁의 국제사’에서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전이다”고 결론지었다.
국제전으로서 한국전쟁의 의미는 전쟁 후 승자와 패자가 누구였는지를 따지면 좀더 쉽게 윤곽이 드러난다. 사망자·부상자·실종자를 포함한 한국의 인명 손실은 300만 명(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었고, 재산피해는 북한 17억 달러, 남한 20억 달러(1949년 남한의 GNP에 육박하는 수치)에 달한다. 이처럼 한국은 큰 희생을 치르고도 얻은 게 없다. 여전히 분단상태이고 긴장과 위험도 줄어들지 않았다. 스툭 교수는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한국인 자신이라고 말한다.
반면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었다. 중국은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엄청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최소한 북한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소련과 동등해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더 이상 중국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에 개입한 강대국 중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국제 공산주의의 유일한 지도자적 위치를 훼손당했고, 위에 언급했듯 유럽에서 미국의 입지 약화라는 스탈린의 계산은 빗나갔다.
미국은 일단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했고, 장기적으로 중·소 긴장관계가 미국에 이롭게 돌아갔기 때문에 손해볼 것 없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이라는 새로운 상대를 견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며 안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이 유엔의 역할이다. 사실 그동안 유엔은 강대국의 들러리로 의심받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유엔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불사한 미국을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서, 약소국이 초강대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한국전쟁을 시작한 것은 북한이었는지 몰라도, 승리는 중국과 미국이 나눠 가졌다. 또 한국에 막대한 피해를 준 한국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대폭 줄이고 전 세계에 냉전이라는 ‘장기 평화’를 선물했다.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 이후 새롭게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논의하는 지금, 과연 각국이 어떤 손익계산서를 뽑아놓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윌리엄 스툭 지음/ 김형인, 김남균, 조성규, 김재민 옮김/ 푸른역사 펴냄/ 864쪽/ 3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