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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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는 곧 나침반이다

단기간 ‘반짝’ 유행과는 큰 차별 … 작은 징후 먼저 감지하는 사람 미래시장 주도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2-28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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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렌드는 곧 나침반이다
    지난 9월11일 뉴욕을 강타한 테러의 충격은 세계 패션계까지도 발칵 뒤집어 놓았다. 9월7~14일 일정으로 잡혀 있던 뉴욕 컬렉션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었을 뿐 아니라 밀라노와 파리 컬렉션 개최 여부도 불투명해졌다.

    더욱 황당한 경우는 이미 발표가 끝난 남성복 컬렉션이다. 스포츠, 여행, 희망과 행복 등을 테마로 대부분 풍부한 색채에 유머러스한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전운이 감도는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 엇나가 버린 것이다. ㈜프로패션정보네트워크 트렌트팀 송수원씨는 “테러의 쇼크가 워낙 커 디자이너들이 일부 스타일을 수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테러사건 이후 남몰래 웃었을 디자이너도 있다. 올 가을·겨울을 겨냥한 컬렉션에서 온통 밀리터리 스타일을 선보인 아이스버그가 좋은 예다. 송씨는 “부시 대통령 당선 이후 보수 강경파의 득세를 예견하고 아이스버그 등 몇몇 디자이너들이 일찌감치 밀리터리룩을 시도한 게 주효했다”고 설명한다.

    트렌드(trend)는 원래 경제용어로 장기적 추세나 변화의 경향을 뜻한다. “대세에 지장 없다”고 할 때 대세가 바로 트렌드다. 그런 점에서 단기간 ‘반짝’ 하고 사라지는 유행과는 구별된다.

    예기치 못한 돌발변수까지 감안해야 하는 트렌드 예측은 신의 영역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트렌드 예측을 포기할 수도 없다. 미국의 비즈니스 트렌드 전문가인 C. 브린 비머와 로버트 L. 슈크는 트렌드를 점점 커지는 경적 소리에 비유했다. “어떤 현상이 처음에는 3%에서 시작해 몇 달 내 7%, 눈 깜짝할 사이에 10%로 증폭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트렌드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앞으로 나타날 트렌드를 암시해 주는 것은 단 하나의 두드러진 요인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징후들’이다”(비머와 슈크 공저 ‘떠오르는 트렌드 사라지는 트렌드’에서). 작은 징후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 미래 시장을 주도할 것이다.



    지난 여름 무더위 속에 올빼미족이 크게 늘었다는 뉴스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많은 할인매장들이 영업시간을 자정까지로 연장하거나 아예 24시간 영업체제로 바꾸었다. 덩달아 TV 심야족도 늘어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의 시청률이 크게 높아졌고, TV홈쇼핑 매출은 오후 11시~자정까지가 가장 높았다. 새벽 1~ 2시가 피크인 심야영화관은 예약하지 않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젊은이들로 북적거린다.

    올빼미족이 는 것은 단순히 더운 날씨 탓일까. 그렇지 않다. 영국의 컨설턴트 레온 크라이츠먼은 24시간 깨어 움직이는 사회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 했다. 크라이츠먼은 ‘24시간 사회’가 엄격하게 시간을 지켜야 하는 제약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현대 도시생활자의 공통적 고민은 “내 시간이 너무 없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시간 결핍’을 보상 받고 싶어한다.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지는 신세대를 가리켜 ‘쿼터족’(기성세대에 비해 모든 사고와 행동에 걸리는 시간이 4분의 1밖에 안 된다는 뜻)이라는 말도 생겼다. 카탈로그를 이용한 홈쇼핑, TV쇼핑, 인터넷쇼핑, 24시간 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인터넷 혹은 폰뱅킹, 줄 서지 않고도 통화가 가능한 휴대전화, 전자우편, 패스트푸드 등 효과적으로 시간을 단축해 주는 수단들은 더욱 하이테크화할 것이다.

    물론 체감적으로 점점 빨라지는 시간의 속도를 거부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이탈리아에서는 최근 ‘느리게 사는 마을운동’이 퍼져 이미 80여 개 마을이 동참했다고 한다. 이 운동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전통요리법을 되살리고 지역문화를 지키면서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으로, 이미 유럽에서 자리잡은 슬로 푸드(Slow Food)운동이나 반(反)디지털 운동과도 관련이 깊다. 느림예찬은 이제 낯선 단어가 아니지만 ‘24시간 사회’를 제치고 대세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유목이라는 개념은 원래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 ‘천 개의 고원’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를 ‘도시 유목민’이라는 말로 일반인에게 전파한 것이 자크 아탈리다. 아탈리가 말하는 도시 유목민이란 공간의 자유로운 이동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끊임없이 바꾸는 새로운 인류다. 아탈리는 가벼움(물질이 아닌 생각과 경험, 지식이나 관계만을 축적한다), 자유로움, 환대와 경계심, 접속, 박애라는 단어로 유목민의 특징을 설명했다.

    일단 유목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행의 증가다. 더욱이 한국사회는 ‘주 5일 근무’라는 중대한 변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주 5일 근무제 이후 여가활동의 고급화·다양화·대중화가 빠르게 진전할 것이다. 특히 아웃도어 여가활동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친화적 생태관광, 체험여행 상품이 각광 받을 것이다. 87년부터 순차적으로 주 2일 휴무제를 도입한 일본에서는 국내여행객이 해마다 15% 정도씩 증가했다. 95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한 중국은 베이징에서 가까운 타이산과 하계 휴양지인 베이다이허 등으로 떠나는 2박3일 간 주말여행이 중국사회의 신풍속도로 자리잡았다. 우리 나라도 짧은 여행이 정착할 것이다”고 예측했다. 한 여행 관계자는 “주말의 짧은 여행과 함께 정기휴가나 포상휴가는 장거리여행이 보편화한다”며 여행업계의 특수를 기대했다.

    독일의 소비문제 전문가인 다비트 보스하르트는 여행이 일상화하는 사회의 특징을 ‘삶의 공항화’로 표현한다. 공항·기차역·주유소 같은 통과 대기실이 실제 거주 장소만큼이나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체류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이곳이 마케팅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뜻한다.

    도시유목민의 또 다른 특징은 정체성의 이동이다. 비머& 슈크는 “사람이 항상 같은 기업의 자동차만 구입하고, 같은 정당의 후보에게만 표를 던지고, 한평생 같은 기업에서만 일하는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최근 직업의 새로운 트렌드는 ‘프리 에이전트’(free agent)로 요약할 수 있다. 프리 에이전트는 기존 프리랜서의 개념을 넘어 단독업자나 초소형 사업체를 뜻하며 조직 대신 스스로 영구적 임시직을 선택한 사람이다.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구조조정기를 거치면서 한평생 여러 직장과 직무를 경험하는 이른바 ‘다모작 인생’이 본격화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처럼 인력의 유동성이 증가하면서 기업은 더 이상 근로자의 충성심을 기대하기 어렵다. 신현암 연구원은 “기업은 충성심 관리, 복지제도 운영, 기술 및 숙련체계 형성 등에서 문제에 봉착하며 이에 대한 방편으로 직장을 옮겨도 혜택을 유지할 수 있는 연금 등 휴대형 복지제도라든지 개인별 직능검사와 경력계획 작성 등으로 제2의 직업을 찾도록 지원하는 아웃플레이스먼트(outplacement) 제도를 도입할 것(미국은 80년대 초부터, 일본은 90년대부터)이다”고 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사회가 네트워크와의 단절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탈리는 “도시유목민에겐 생존을 위해 늘 ‘접속’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며 필수적 유목물품 가지고 다닌다”고 말한다. 자동차 워크맨 휴대전화 노트북이 현재 유목물품이라면 미래에는 벽걸이 TV, 스크린안경, 초소형컴퓨터와 전화기를 장착한 옷 등이 이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프리에이전트가 된다 해도 연대의식은 여전히 중요하며 동창회나 동호회, 각종 커뮤니티와 같은 휴먼네트워크는 오히려 더 발달한다. 950만 명의 회원을 거느린 동창생 찾기 사이트 ‘아이 러브 스쿨’의 성공에서 우리는 이미 그런 징후를 읽을 수 있었다. 정보통신의 발달과 ‘거리의 소멸’을 예측한 ‘이코노미스트’ 수석편집위원 프랜시스 케언크로스도 일터와 가정 사이 경계가 사라지지만 인간관계 형성, 점심식사, 정보교환을 위한 담소 장소로서 사무실은 유용하다고 했다. 사람은 접속과 접촉을 동시에 원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네트워크에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뀐다”고 한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은 지식인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접속이란 문화적 자원과 체험을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말한다. 마치 콘도미니엄처럼. 그러나 ‘소유의 종말’을 거론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소비의 종말’은 아니다. 다만 1980년대 과시적 과잉소비가 진정되면서 포스트모던 소비시대에 접어들었을 뿐이다.

    1984년에 나온 마돈나의 노래 ‘세속적 여자’(Material Girl)는 소비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세속적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접어들어 사람은 더 이상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보스하르트는 ‘소비의 탈상품화’가 급속히 진행하고 있으며 고객은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생태학적으로 올바르게 길러진 닭고기나 양배추’ ‘스포츠나 연예계 스타의 캐릭터’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산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순히 가격만으로 사치품을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의 정연승·서용구 연구원은 유통시장의 뉴트렌드에 대해 “90년대 초까지 성행한 맹목적 과소비가 사라지고 최근에는 명품 브랜드 등에 대한 심미적 소비문화가 확산하고 있다”며 소비행태의 고급화와 더불어 합리적 소비문화의 정착 가능성을 점쳤다.

    또 소비의 새로운 경향으로 두드러진 것은 ‘소비의 오락화’다. 삼성동 코엑스몰, 반포 센트럴시티 같은 초대형 쇼핑몰은 소비와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동시에 제공하며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그밖에도 멀티플렉스 극장이나 대규모 게임센터를 갖춘 패션타운, 신세대 취향의 재래시장이나 백화점 같은 할인점 등 퓨전형태의 쇼핑공간이 속속 등장한다. 앞으로 오락은 약방의 감초처럼 어디든 등장할 것이다. 레스토랑이 먹고 마시고 노는 공간으로 바뀌는 이터테인먼트(Eatertainment), 놀면서 배우는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등 퓨전문화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분명한 트렌드다.

    유명한 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에게 성공비법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성공비법이라면 퍽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자리에서 스케이트를 탔다는 것이죠.” 트렌드 예측은 앞으로 나아갈 자리를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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