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얌댱어(뱀장어)는 고단백 강장제로서 여름 더위지기로 이름높았다. 구이보다는 중탕의 약재로 명성을 떨쳤다. 이질과 설사에 허약해진 기를 보강했다는 일화는 서유영(徐有英)의 ‘금계 필담‘에도 나와 있다. 지금은 그 맥이 끊겨서 맛보기가 힘들어졌지만….
곰소항에서 내소사쪽의 뻘밭가에 있는 갈무리집(윤명환·061-582-2957)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도 사전 ‘식단 예약제’다. 겨울에는 붕장어 중탕, 여름에는 특별히 풍천장어 중탕이 가능하다.
배얌양어 중탕은 오가리솥을 이용하여 참기름에다 튀겨 설익힌 다음, 물을 붓고 마늘과 생강만을 넣어 다시 밀봉하고 푹 고아낸다. 산중 스님도 이따금 내려와선 이 뚜껑을 열어보곤 한다. 기가 허약해지면 보할밖에.
그러나 이제 배얌댱어가 오르는 물목의 뻘강도 시들해졌다. 구진포, 목리, 명산이 죽고 이제 마지막 곰소만(灣)도 마르고 있다.
쿠로시오(黑潮) 난류를 따라오는 머나먼 여행길의 댓잎장어가 유낭을 차고 파도를 헤쳐 한국의 하천에 도달하기까지는 3, 4년이 걸린다. 기수유역의 담수하천에서 실장어로 살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기까지 하다.
차는 곰소에서 줄포, 흥덕을 거쳐 선운사까지 U자형의 곰소만(줄포만)을 끼고 뻘밭가를 돈다. 고창군 부안면 소재지에 있는 신흥 삼거리에서 중앙농약사 앞 알ㅁ·ㅣ다방을 끼고 나가면 봉암리의 인촌 김성수 생거지를 만난다. 이어서 질마재(선운리)의 미당(서정주) 생가를 둘러서 용산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목적지 ‘자연의 집’(오금복·061-564-1723)에 닿는다.
이곳이 바로 미당의 시에 나오는 수대동(水帶洞, 水多洞)이다. 수대(水帶)라는 이름은 장수강 곧 풍천(豊川)의 이름이다. 풍천이 허리띠처럼 둘러 선운사 앞내까지 돌아나오고 바닷물이 선운사 고장까지 밀어오른다. 동백장에서 운영하는 배얌댱어 양식장이 있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집이 구이로 이름난 ‘자연의 집’이다.
선운사의 도솔암까지(5km) 올라갔다 내려온 김에 출출한 뱃속에 ‘숯불구이 장어’와 함께 쫀득쫀득한 복분자술 한 잔을 들친다. 복분자는 요강이 엎어진다는 야생딸기를 말한다. ‘풍천 배얌댱어’와는 궁합이 딱 맞는다.
오금복 여사(66)는 철판에서 그 배얌댱어 살코기를 도작시며 누릇누릇 잘도 굽는다. 장수강 뻘을 뒤덮는 것은 고단백의 칠게. 이 칠게야말로 배얌댱어의 주된 먹이다.
‘장수강 저 건너가 변산인디, 옛날부터 그쪽은 소나무(적송)가 유명했고, 이쪽 선운산은 참나무가 무성했지러. 그쪽 소나무는 양지쪽이라서 좋은 목재가 궁궐재로 올라갔고, 이쪽은 응달인디, 참나무 토막을 장수강 뻘속에 묻어 침향(沈香)을 만들었지러. 몇 백년 걸려 그 참나무 토막도 향을 배는데 장수강 뻘을 먹고 자란 배얌댱어가 향을 배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유!’
듣고보니 그럴 것 같다. 또 이 뻘강에 봄이 올 무렵엔 선운산을 건너다본 변산 토끼는 아직도 겨울인가 하여 굴속에서 굶어죽고, 변산을 건너다본 선운산 토끼는 봄이 왔는가 싶어 굴 밖을 나왔다가 얼어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곁들인다. 이쪽은 응달로 아직도 눈이 첩첩 쌓여 있다는 향토성의 차이점을 그럴듯하게 설명해낸다. 마치 강호사품(江湖四品)을 강론하며 난(蘭)을 치는 여인 같다. 행주좌와가 이만큼 특별나다.
문득 질마재를 잇는 장수강에 걸친 다리, 오산교에 나와 U자형으로 파고든 곰소항의 뻘밭을 바라본다. 마치 양쪽 가랑이를 벌리고 앉은 선녀 같다.
저쪽 내소사의 쇠북소리와 이쪽 선운사의 예불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뻘밭, 변산 능선들이 저녁 낙조에 물들어 분홍댕기처럼 흘러다닌다. 이 노을을 뒤집어쓰고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장수강에 참귀목을 묻었을 질마재 사람들. 풍천 배얌댱어를 잡고 살았을 그 갯살림이 그리운 것은 웬 까닭인가.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
곰소항에서 내소사쪽의 뻘밭가에 있는 갈무리집(윤명환·061-582-2957)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도 사전 ‘식단 예약제’다. 겨울에는 붕장어 중탕, 여름에는 특별히 풍천장어 중탕이 가능하다.
배얌양어 중탕은 오가리솥을 이용하여 참기름에다 튀겨 설익힌 다음, 물을 붓고 마늘과 생강만을 넣어 다시 밀봉하고 푹 고아낸다. 산중 스님도 이따금 내려와선 이 뚜껑을 열어보곤 한다. 기가 허약해지면 보할밖에.
그러나 이제 배얌댱어가 오르는 물목의 뻘강도 시들해졌다. 구진포, 목리, 명산이 죽고 이제 마지막 곰소만(灣)도 마르고 있다.
쿠로시오(黑潮) 난류를 따라오는 머나먼 여행길의 댓잎장어가 유낭을 차고 파도를 헤쳐 한국의 하천에 도달하기까지는 3, 4년이 걸린다. 기수유역의 담수하천에서 실장어로 살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기까지 하다.
차는 곰소에서 줄포, 흥덕을 거쳐 선운사까지 U자형의 곰소만(줄포만)을 끼고 뻘밭가를 돈다. 고창군 부안면 소재지에 있는 신흥 삼거리에서 중앙농약사 앞 알ㅁ·ㅣ다방을 끼고 나가면 봉암리의 인촌 김성수 생거지를 만난다. 이어서 질마재(선운리)의 미당(서정주) 생가를 둘러서 용산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목적지 ‘자연의 집’(오금복·061-564-1723)에 닿는다.
이곳이 바로 미당의 시에 나오는 수대동(水帶洞, 水多洞)이다. 수대(水帶)라는 이름은 장수강 곧 풍천(豊川)의 이름이다. 풍천이 허리띠처럼 둘러 선운사 앞내까지 돌아나오고 바닷물이 선운사 고장까지 밀어오른다. 동백장에서 운영하는 배얌댱어 양식장이 있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집이 구이로 이름난 ‘자연의 집’이다.
선운사의 도솔암까지(5km) 올라갔다 내려온 김에 출출한 뱃속에 ‘숯불구이 장어’와 함께 쫀득쫀득한 복분자술 한 잔을 들친다. 복분자는 요강이 엎어진다는 야생딸기를 말한다. ‘풍천 배얌댱어’와는 궁합이 딱 맞는다.
오금복 여사(66)는 철판에서 그 배얌댱어 살코기를 도작시며 누릇누릇 잘도 굽는다. 장수강 뻘을 뒤덮는 것은 고단백의 칠게. 이 칠게야말로 배얌댱어의 주된 먹이다.
‘장수강 저 건너가 변산인디, 옛날부터 그쪽은 소나무(적송)가 유명했고, 이쪽 선운산은 참나무가 무성했지러. 그쪽 소나무는 양지쪽이라서 좋은 목재가 궁궐재로 올라갔고, 이쪽은 응달인디, 참나무 토막을 장수강 뻘속에 묻어 침향(沈香)을 만들었지러. 몇 백년 걸려 그 참나무 토막도 향을 배는데 장수강 뻘을 먹고 자란 배얌댱어가 향을 배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유!’
듣고보니 그럴 것 같다. 또 이 뻘강에 봄이 올 무렵엔 선운산을 건너다본 변산 토끼는 아직도 겨울인가 하여 굴속에서 굶어죽고, 변산을 건너다본 선운산 토끼는 봄이 왔는가 싶어 굴 밖을 나왔다가 얼어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곁들인다. 이쪽은 응달로 아직도 눈이 첩첩 쌓여 있다는 향토성의 차이점을 그럴듯하게 설명해낸다. 마치 강호사품(江湖四品)을 강론하며 난(蘭)을 치는 여인 같다. 행주좌와가 이만큼 특별나다.
문득 질마재를 잇는 장수강에 걸친 다리, 오산교에 나와 U자형으로 파고든 곰소항의 뻘밭을 바라본다. 마치 양쪽 가랑이를 벌리고 앉은 선녀 같다.
저쪽 내소사의 쇠북소리와 이쪽 선운사의 예불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는 뻘밭, 변산 능선들이 저녁 낙조에 물들어 분홍댕기처럼 흘러다닌다. 이 노을을 뒤집어쓰고 내세의 복을 빌기 위해 장수강에 참귀목을 묻었을 질마재 사람들. 풍천 배얌댱어를 잡고 살았을 그 갯살림이 그리운 것은 웬 까닭인가.
머잖어 봄은 다시 오리니
금녀 동생을 나는 얻으리
눈썹이 검은 금녀 동생
얻어선 새로 수대동 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