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수교 10년을 맞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발단은 9일부터 12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이한동 총리가 ‘홀대’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우리 외교당국은 이한동 총리가 일정 마지막날인 12일 크렘린궁을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면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를 철썩같이 믿은 이총리 일행은 ‘부름’이 있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동행했던 취재기자단은 크렘린궁에 들어갈 풀기자까지 정해 대기하고 있다가 뒤늦게 “대통령이 바빠서 시간을 못내겠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고 귀국비행기에 올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면담을 무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러시아가 4자회담에서 제외되고 한국이 잠수함 등 무기도 사주지 않고 있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몽니’를 부렸다는 해석도 나왔다. 당초 연내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 푸틴 대통령이 결국 이번에도 정확한 일정을 확인해 주지 않아 사실상 연내 방한이 무산된 것도 이런 의심을 부추겼다.
곧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년 초 러시아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지자 “러시아가 남북한 등거리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북한 노선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7월 평양을 방문한 바 있어 러시아와 북한은 반년 사이에 두 차례나 정상이 상대방을 방문하며 만나는 셈이 됐기 때문이다. 취임 후 정열적인 순방외교를 펼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동북아 4개국 중 일본 북한 중국을 모두 방문하고도 유독 한국 방문을 미루는 것이 수상하다는 얘기도 뒤따랐다.
‘4자회담 제외에 불만’ 해석도
그러나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한국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크렘린측은 “푸틴 대통령이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담에 참석했다가 이날 새벽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몸도 좋지 않아 이총리를 만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크렘린측은 “이총리와의 면담을 사전에 약속한 일도 없는데 왜 한국측이 면담이 확실한 것처럼 공개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한-러 총리 회담은 전에 없이 진지하고 성공적으로 끝났다”면서 “굳이 푸틴 대통령이 이총리와 만날 현안도 없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그동안 ‘푸틴 면담‘을 둘러싼 ‘해프닝’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의 고위인사들은 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푸틴 대통령과 만나겠다”고 큰소리친다. 여기에는 옛날에는 강대국이었지만 이제는 ‘한물 간’ 나라의 대통령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인식이 배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푸틴 대통령을 면담한 한국 고위인사는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이 유일하다. 애를 쓰다가 면담이 무산되면 당사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심지어는 “막상 만났으면 푸틴 대통령이 이런저런 어려운 부탁을 해 곤란했을 텐데 차라리 다행이었다”며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는 인사도 있었다. 이번 ‘이총리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초 “이번에는 틀림없이 이총리가 푸틴 대통령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미리부터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자랑하던 한국 외교 관계자들은 면담이 실패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면담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는 ‘당당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 외무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국은 실제적인 성과보다는 정상회담이나 방문 등 모양에만 너무 집착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실제로 한-러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한국언론의 과잉 반응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을까.
이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이 무산될 때마다 러시아의 책임이라고 핑계를 대는 한국 외교당국의 태도가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도 나름대로 외교관행과 원칙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만나달라고 조르다가 안 되면 대국주의(大國主義)적인 무례한 외교를 한다고 몰아붙인다는 것. 푸틴 대통령은 중대한 현안이 없으면 외국 각료를 만나지 않는다. 6월에 푸틴 대통령이 이정빈 외교부장관을 면담하지 않은 것은 한국을 무시해서나 외교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측에서 보면 ‘당연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한국방문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를 묻자 “한국을 왜 방문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러시아는 한국의 대북 정책을 지지하며 최근 남북한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정착되는 것도 환영한다. 이런 입장을 이미 여러 차례 밝혔는데 단순히 이것을 다시 확인해 주기 위해 우리 대통령이 시간을 쪼개 서울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서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남북한 철도를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TSR)에 연결하는 문제나 시베리아가스전 개발사업, 방산물자 수출 등 두 나라 사이의 여러 현안이 소리만 무성했지 막상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의례적인 만남보다는 실질적인 만남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도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초청해 오페라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최근 러시아와 북한의 사이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그는 “한국이 겉으로는 러-북관계 개선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경계하는 것 같다”고 맞받아쳤다.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던 것은 소련 붕괴 후 멀어졌던 양국관계를 회복하고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망(NMD) 구축 시도에 반대하는 공동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러시아의 한 한국전문가는 “러시아가 ‘돈’ 때문에 한국에 불만이 있다는 식의 해석이 불쾌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한국의 투자가 부진하자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이 선뜻 러시아 시장에 뭉칫돈을 던질 수 없는 형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제 잠수함(킬로급 중형잠수함)의 한국 판매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협상과정을 지켜보았다는 러시아 해군의 한 퇴역 장성은 ‘돈’보다는 ‘자존심’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잠수함 판매가 좌절된 것보다 한국측 관계자들이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제 잠수함을 ‘형편없는 고철’정도로 매도한 점이 더 기분 나빴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 외교관계자들은 한국에 대한 복잡한 속내와는 달리 적어도 겉보기에는 한결같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한 러시아 외교관은 “그동안 러시아가 한국 외교부장관 2명을 갈아치웠다(?)”고 농담을 했다. 98년 한-러 외교관 맞추방 사건과 지난해 러시아가 밀입국한 북한난민가족을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강제송환한 사건으로 당시 외교부 장관이 경질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급하고 일관성 없는 우리 외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러시아는 당분간 한국에 대한 불만을 가슴에 담아둔 채 특유의 뚝심으로 한국이 먼저 러시아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북-미, 북-일 관계가 급진전하고 지난 10년 동안 소원했던 북-러 관계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감안하면 한국이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절실하다. 한반도 주변 4강 중 영향력면에서 러시아가 ‘꼴찌’라는 것은 러시아 인사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없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러시아의 진짜 불만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대처하는 외교력이 필요한 때다.
우리 외교당국은 이한동 총리가 일정 마지막날인 12일 크렘린궁을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면담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를 철썩같이 믿은 이총리 일행은 ‘부름’이 있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동행했던 취재기자단은 크렘린궁에 들어갈 풀기자까지 정해 대기하고 있다가 뒤늦게 “대통령이 바빠서 시간을 못내겠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고 귀국비행기에 올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언론은 일제히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면담을 무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러시아가 4자회담에서 제외되고 한국이 잠수함 등 무기도 사주지 않고 있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몽니’를 부렸다는 해석도 나왔다. 당초 연내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 푸틴 대통령이 결국 이번에도 정확한 일정을 확인해 주지 않아 사실상 연내 방한이 무산된 것도 이런 의심을 부추겼다.
곧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내년 초 러시아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지자 “러시아가 남북한 등거리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북한 노선으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7월 평양을 방문한 바 있어 러시아와 북한은 반년 사이에 두 차례나 정상이 상대방을 방문하며 만나는 셈이 됐기 때문이다. 취임 후 정열적인 순방외교를 펼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이 동북아 4개국 중 일본 북한 중국을 모두 방문하고도 유독 한국 방문을 미루는 것이 수상하다는 얘기도 뒤따랐다.
‘4자회담 제외에 불만’ 해석도
그러나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한국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크렘린측은 “푸틴 대통령이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담에 참석했다가 이날 새벽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몸도 좋지 않아 이총리를 만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크렘린측은 “이총리와의 면담을 사전에 약속한 일도 없는데 왜 한국측이 면담이 확실한 것처럼 공개했는지 모르겠다”며 의아해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한 관계자는 “한-러 총리 회담은 전에 없이 진지하고 성공적으로 끝났다”면서 “굳이 푸틴 대통령이 이총리와 만날 현안도 없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그동안 ‘푸틴 면담‘을 둘러싼 ‘해프닝’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의 고위인사들은 러시아를 방문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푸틴 대통령과 만나겠다”고 큰소리친다. 여기에는 옛날에는 강대국이었지만 이제는 ‘한물 간’ 나라의 대통령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인식이 배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푸틴 대통령을 면담한 한국 고위인사는 김용준 헌법재판소장이 유일하다. 애를 쓰다가 면담이 무산되면 당사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심지어는 “막상 만났으면 푸틴 대통령이 이런저런 어려운 부탁을 해 곤란했을 텐데 차라리 다행이었다”며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는 인사도 있었다. 이번 ‘이총리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초 “이번에는 틀림없이 이총리가 푸틴 대통령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미리부터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자랑하던 한국 외교 관계자들은 면담이 실패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면담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는 ‘당당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러시아 외무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한국은 실제적인 성과보다는 정상회담이나 방문 등 모양에만 너무 집착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실제로 한-러 관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한국언론의 과잉 반응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러시아는 한국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을까.
이 관계자는 “푸틴 대통령과의 면담이 무산될 때마다 러시아의 책임이라고 핑계를 대는 한국 외교당국의 태도가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러시아도 나름대로 외교관행과 원칙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만나달라고 조르다가 안 되면 대국주의(大國主義)적인 무례한 외교를 한다고 몰아붙인다는 것. 푸틴 대통령은 중대한 현안이 없으면 외국 각료를 만나지 않는다. 6월에 푸틴 대통령이 이정빈 외교부장관을 면담하지 않은 것은 한국을 무시해서나 외교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러시아측에서 보면 ‘당연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푸틴 대통령의 한국방문이 늦어지고 있는 이유를 묻자 “한국을 왜 방문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러시아는 한국의 대북 정책을 지지하며 최근 남북한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정착되는 것도 환영한다. 이런 입장을 이미 여러 차례 밝혔는데 단순히 이것을 다시 확인해 주기 위해 우리 대통령이 시간을 쪼개 서울을 방문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푸틴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서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남북한 철도를 러시아의 시베리아횡단철도(TSR)에 연결하는 문제나 시베리아가스전 개발사업, 방산물자 수출 등 두 나라 사이의 여러 현안이 소리만 무성했지 막상 구체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의례적인 만남보다는 실질적인 만남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도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초청해 오페라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최근 러시아와 북한의 사이가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그는 “한국이 겉으로는 러-북관계 개선을 환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경계하는 것 같다”고 맞받아쳤다.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던 것은 소련 붕괴 후 멀어졌던 양국관계를 회복하고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어망(NMD) 구축 시도에 반대하는 공동의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러시아의 한 한국전문가는 “러시아가 ‘돈’ 때문에 한국에 불만이 있다는 식의 해석이 불쾌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한국의 투자가 부진하자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한국이 선뜻 러시아 시장에 뭉칫돈을 던질 수 없는 형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제 잠수함(킬로급 중형잠수함)의 한국 판매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협상과정을 지켜보았다는 러시아 해군의 한 퇴역 장성은 ‘돈’보다는 ‘자존심’ 문제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잠수함 판매가 좌절된 것보다 한국측 관계자들이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제 잠수함을 ‘형편없는 고철’정도로 매도한 점이 더 기분 나빴다고 밝혔다.
그러나 러시아 외교관계자들은 한국에 대한 복잡한 속내와는 달리 적어도 겉보기에는 한결같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한 러시아 외교관은 “그동안 러시아가 한국 외교부장관 2명을 갈아치웠다(?)”고 농담을 했다. 98년 한-러 외교관 맞추방 사건과 지난해 러시아가 밀입국한 북한난민가족을 중국을 통해 북한으로 강제송환한 사건으로 당시 외교부 장관이 경질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조급하고 일관성 없는 우리 외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도 들렸다. 러시아는 당분간 한국에 대한 불만을 가슴에 담아둔 채 특유의 뚝심으로 한국이 먼저 러시아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근 북-미, 북-일 관계가 급진전하고 지난 10년 동안 소원했던 북-러 관계도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감안하면 한국이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역할이 절실하다. 한반도 주변 4강 중 영향력면에서 러시아가 ‘꼴찌’라는 것은 러시아 인사들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없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제라도 러시아의 진짜 불만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대처하는 외교력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