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하늘에서 타고난 총명과 슬기에다 너그럽고 인자하고 검소한 마음씨를 지녔다. …일단 조정을 맡아 다스리게 되면서 이 땅덩어리 전체를 한번 뒤흔들고 싶은 개연한 뜻이 있었다. …이 세상 모든 이치가 왕에게는 다 득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의 갖가지 재주가 모두 왕의 쓰임이 된 것이다. …바로 성인 중에도 더욱 성인이었던 것이다.”(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중에서)
박광용 교수(가톨릭대·국사학)는 정조 사후 이만수가 신하들을 대표해 쓴 이 글에 대해, 아무리 국왕의 행장(行狀)을 칭찬 일변도로 쓴다고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이 정도의 칭찬을 들은 군주를 찾아낼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로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재평가 작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근거 없는 상찬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776년 3월~1800년 6월까지 24년 3개월에 걸친 정조시대는 ‘왕조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 ‘정치정의에 힘쓴 탕평의 시대’ ‘우리 문화의 황금기’로 불린다. 정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서를 하는 학구파였으며, 군사(君師)를 자처하며 통치자를 넘어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창덕궁에 왕실도서관이자 학술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한 뒤 신하들을 직접 훈도하고 교육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적으로 영조에 이어 탕평책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해 감찰활동을 펼쳤다. 또 북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적극 수용, 상업의 발달을 촉진해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고 동시에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그리고 정조시대에는 음악, 글씨, 그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산천과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표현한 진경문화가 절정을 이뤘다. 이런 점을 들어 정옥자 교수(서울대 규장각 관장)는 정조를 ‘최고 통치자의 이상형’이라 했다.
그러나 정교수는 한 인물로서 정조의 매력이 “인고의 세월을 거쳐 자기성취에 이르렀으며 상당한 균형감각을 지녀 치우침이 없었다는 데 있다”며 그 어떤 치적보다 성품의 남다름을 우선으로 꼽았다.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과의 갈등 속에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맛본 뒤 줄곧 정치적 위협 속에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노론 벽파들이 세자 주위에 내시와 종을 배치해 밤낮으로 엿보고 이리저리 음탐해, 정조는 몇 달씩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청하거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집권 후에도 대궐에 침입한 자객에 의해 시해될 뻔한 고비를 일곱 차례나 겪었다.
하지만 끼니를 걸러가며 국정을 돌보고 학문에 정진하는 남다른 부지런함이 결국 정조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만다. 그래서 박광용 교수는 조선의 군주 중 가장 부지런했던 정조의 사인(死因)으로 일부 제기되는 독살설보다 과로사가 더 타당하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조선후기 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하며 세종대왕에 비교되는 정조가 서거 200주기를 맞은 오늘에야 비로소 재조명된다는 것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 부족과 학자들의 연구부족 탓”으로 돌렸다. 즉, 지금까지 조선 전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던 반면, 후기는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되는 사회로만 인식돼 연구활동이 미비했다. 실제 정교수가 80년대 초반 조선후기 문화사와 지성사 연구에 매달리자 “조선후기는 망하는 시대인데 왜 그것을 미화하려 드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조 이후 조선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250년 간 무너지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정교수는 반문한다. 결국 식민사관에 입각해 조선후기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학계의 잘못 때문에 정조는 치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정조를 재조명하는 행사와 저술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정조의 인기가 세종대왕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이미 10월7~13일까지 정조의 화성(세계문화유산 지정) 축조를 기념하는 수원 ‘화성문화제’가 성대히 치러졌고, 한신대 박물관 주최의 ‘정조대왕 서거 200주년 추모전’과 진경시대의 진수를 보여주는 간송미술관의 ‘혜원과 단원전’이 시작됐으며 10월17일부터 서울대 규장각 특별전시회도 열린다.
이 시대에 대한 저술작업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활기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 ‘조선왕조문화의 황금기’로서 이 시대를 조명한 ‘진경시대’(최완수 외/ 돌베개/ 98년)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조선후기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을 걷어내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또 일반인들까지 영`-`정조시대에 관심을 갖게 한 박광용 교수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펴냄)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만5000부 이상 팔렸다. 이어 서울대 한영우 교수의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효형출판 98년)은 정조시대 기록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정옥자 외/ 돌베개/ 99년),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정옥자 /2000년), 30~40대 소장학자 20명이 쓴 ‘정조대의 문헌 전4권’(문헌과 해석사/ 2000년), 여기에 민족문화추진회가 연말까지 ‘홍재전서’를 완역할 예정이라고 하니 더 이상 연구 부족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아무래도 정조의 치적을 알리고 재평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활발한 정조의 재조명 작업은 정조시대의 ‘그늘’까지도 들추어낸다. 한신대 박물관(관장 유봉학 교수)이 정조 추모 특별전시를 마련하면서 “정조 서거 후 그가 구축한 체제와 이상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의도는 좋았지만 말년에 중신들을 배제한 국왕 주도의 정국 운용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 것은, 이 전시를 통해 정조시대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박광용 교수도 ‘영조와 정조의 나라’ 말미에서 ‘영`-`정조 개혁의 한계와 역사적 교훈’을 이렇게 제시했다. “정조 개혁의 문제점은 제도개혁보다 실력주의에 입각한 점진적 개혁을 표방함으로써 개혁의 기반을 재빨리 진정으로 개혁적인 집단에 옮겨놓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개혁을 추진하는 데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24년의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죽자마자 모든 개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정치학자가 바라본 정치인 정조에 대한 평가는 더욱 냉정하다. 지난해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更張政策)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현모씨는 “‘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모습은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보다 국왕의 지지세력조차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기만과 독단을 자주 사용한 정치가”였다며 “그럼에도 자잘한 데까지 직접 관여하는 국왕의 친정(親政)체제가 신하들의 책임회피와 관료들의 소명의식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가져왔고, 다종다양한 정치를 한군데로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탕평) 그것을 공론화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정조는 신중한 정치가였지만 탁월한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모처럼 고조되고 있는 정조 재평가 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0년 전 죽은 정조가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까.
박광용 교수(가톨릭대·국사학)는 정조 사후 이만수가 신하들을 대표해 쓴 이 글에 대해, 아무리 국왕의 행장(行狀)을 칭찬 일변도로 쓴다고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 이 정도의 칭찬을 들은 군주를 찾아낼 수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고 했다.
그러나 올해로 정조 서거 200주년을 맞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는 재평가 작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것이 근거 없는 상찬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776년 3월~1800년 6월까지 24년 3개월에 걸친 정조시대는 ‘왕조중흥의 꽃이 활짝 핀 전성기’ ‘정치정의에 힘쓴 탕평의 시대’ ‘우리 문화의 황금기’로 불린다. 정조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독서를 하는 학구파였으며, 군사(君師)를 자처하며 통치자를 넘어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마자 창덕궁에 왕실도서관이자 학술연구기관인 규장각을 설치한 뒤 신하들을 직접 훈도하고 교육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치적으로 영조에 이어 탕평책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암행어사를 파견해 감찰활동을 펼쳤다. 또 북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적극 수용, 상업의 발달을 촉진해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고 동시에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그리고 정조시대에는 음악, 글씨, 그림,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의 산천과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표현한 진경문화가 절정을 이뤘다. 이런 점을 들어 정옥자 교수(서울대 규장각 관장)는 정조를 ‘최고 통치자의 이상형’이라 했다.
그러나 정교수는 한 인물로서 정조의 매력이 “인고의 세월을 거쳐 자기성취에 이르렀으며 상당한 균형감각을 지녀 치우침이 없었다는 데 있다”며 그 어떤 치적보다 성품의 남다름을 우선으로 꼽았다.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정조는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와 노론과의 갈등 속에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을 맛본 뒤 줄곧 정치적 위협 속에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노론 벽파들이 세자 주위에 내시와 종을 배치해 밤낮으로 엿보고 이리저리 음탐해, 정조는 몇 달씩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청하거나 새벽닭이 울 때까지 책을 읽었다고 한다. 집권 후에도 대궐에 침입한 자객에 의해 시해될 뻔한 고비를 일곱 차례나 겪었다.
하지만 끼니를 걸러가며 국정을 돌보고 학문에 정진하는 남다른 부지런함이 결국 정조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만다. 그래서 박광용 교수는 조선의 군주 중 가장 부지런했던 정조의 사인(死因)으로 일부 제기되는 독살설보다 과로사가 더 타당하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조선후기 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룩하며 세종대왕에 비교되는 정조가 서거 200주기를 맞은 오늘에야 비로소 재조명된다는 것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에 대해 정옥자 교수는 “조선시대에 대한 이해 부족과 학자들의 연구부족 탓”으로 돌렸다. 즉, 지금까지 조선 전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던 반면, 후기는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붕괴되는 사회로만 인식돼 연구활동이 미비했다. 실제 정교수가 80년대 초반 조선후기 문화사와 지성사 연구에 매달리자 “조선후기는 망하는 시대인데 왜 그것을 미화하려 드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정조 이후 조선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해도 250년 간 무너지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고 정교수는 반문한다. 결국 식민사관에 입각해 조선후기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본 학계의 잘못 때문에 정조는 치적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정조를 재조명하는 행사와 저술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정조의 인기가 세종대왕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 이미 10월7~13일까지 정조의 화성(세계문화유산 지정) 축조를 기념하는 수원 ‘화성문화제’가 성대히 치러졌고, 한신대 박물관 주최의 ‘정조대왕 서거 200주년 추모전’과 진경시대의 진수를 보여주는 간송미술관의 ‘혜원과 단원전’이 시작됐으며 10월17일부터 서울대 규장각 특별전시회도 열린다.
이 시대에 대한 저술작업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활기를 띠고 있다. 그 중에서 ‘조선왕조문화의 황금기’로서 이 시대를 조명한 ‘진경시대’(최완수 외/ 돌베개/ 98년)는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조선후기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을 걷어내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또 일반인들까지 영`-`정조시대에 관심을 갖게 한 박광용 교수의 ‘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펴냄)는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만5000부 이상 팔렸다. 이어 서울대 한영우 교수의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효형출판 98년)은 정조시대 기록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고,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정옥자 외/ 돌베개/ 99년), ‘정조의 수상록 일득록 연구’(정옥자 /2000년), 30~40대 소장학자 20명이 쓴 ‘정조대의 문헌 전4권’(문헌과 해석사/ 2000년), 여기에 민족문화추진회가 연말까지 ‘홍재전서’를 완역할 예정이라고 하니 더 이상 연구 부족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아무래도 정조의 치적을 알리고 재평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활발한 정조의 재조명 작업은 정조시대의 ‘그늘’까지도 들추어낸다. 한신대 박물관(관장 유봉학 교수)이 정조 추모 특별전시를 마련하면서 “정조 서거 후 그가 구축한 체제와 이상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의도는 좋았지만 말년에 중신들을 배제한 국왕 주도의 정국 운용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 것은, 이 전시를 통해 정조시대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다.
박광용 교수도 ‘영조와 정조의 나라’ 말미에서 ‘영`-`정조 개혁의 한계와 역사적 교훈’을 이렇게 제시했다. “정조 개혁의 문제점은 제도개혁보다 실력주의에 입각한 점진적 개혁을 표방함으로써 개혁의 기반을 재빨리 진정으로 개혁적인 집단에 옮겨놓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개혁을 추진하는 데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24년의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죽자마자 모든 개혁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정치학자가 바라본 정치인 정조에 대한 평가는 더욱 냉정하다. 지난해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更張政策)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박현모씨는 “‘정조실록’에 나타난 정조의 모습은 ‘진실한 선비의 전형’이라기보다 국왕의 지지세력조차 당혹스러워할 정도로 기만과 독단을 자주 사용한 정치가”였다며 “그럼에도 자잘한 데까지 직접 관여하는 국왕의 친정(親政)체제가 신하들의 책임회피와 관료들의 소명의식 상실이라는 역효과를 가져왔고, 다종다양한 정치를 한군데로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탕평) 그것을 공론화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정조는 신중한 정치가였지만 탁월한 정치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모처럼 고조되고 있는 정조 재평가 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200년 전 죽은 정조가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