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에 가면 ‘술 취하는 돌’이 있다. 이름하여 ‘醉石’(취석)이다. 대한민국 술꾼이라고 자처한다면, 그 빗돌과 마주앉아 대작 한번 해볼 만하다.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에 있는데, 취석의 원 주인은 근처에 묻힌 김상헌(1570~1652)이다. 병자호란 때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쳤고, 호란 뒤인 1639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조선군 출병에 반대하여 선양(瀋陽)에 끌려가 6년 동안 억류되었던 인물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는 청나라로 끌려갈 때에 그가 부른 시조다. 그 힘든 시절을 그는 술로 달랬던가 보다.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집 근처에, 같은 서인 계열의 후학인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취석을 세웠다. 중국에서 보았던 도연명(365~427)의 비석에 화답한 것이다. 이태백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시인 도연명은 ‘醒石’(성석), 술 깨는 돌이라 새긴 빗돌에 기대어 술에 취해가며 깨어가며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김상헌은 거꾸로 취석을 새겨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작가 도연명의 마음이 되고자 했다.
취석이 있는 석실마을에서 북쪽으로 50리쯤 가면, 물이 좋아 물골안이라고 불리는 수동계곡이 있다. 그곳에 고구려 술이 있단다. 매장 유물에서나 간신히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의 자취가 술에 남아 있다니, 어떤 내력인지 궁금해 수동계곡 지둔리에 있는 술도가를 찾았다.
술 이름은 ‘계명주’(鷄鳴酒)였다. 11도 도수인데, 탁주다. 탁주는 법적으로 3도 이상인데, 대체로 6도에서 8도 사이다. 계명주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고, 농림부 지정 명인 12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나라에서 문화재급이라고 보증을 서고 있는 셈이다.
남편 장기항씨(63)는 몸이 불편해서 부인인 최옥근씨(57)가 직원 한 명을 두고 힘겹게 술을 빚고 있었다. 기능보유자인 최옥근씨는 시어머니 박채형씨(81년 작고)에게서 술 빚는 법을 배웠다. 시어머니는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성가리에 살다가 1·4후퇴 때 피난 내려왔다. 집안에서 부르는 술 이름은 본디 ‘엿탁주’였다. 평안도 지방에서 두루 빚어먹던 술인데, 박채형씨는 삶의 터전은 달라졌어도 술 빚는 법은 잊지 않았다. 엿탁주의 맛이 좋고 재료도 특별하여 그이의 아들 장기항씨가 문화재로 신청하였고, 며느리 최옥근씨는 생각지도 않은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월남한 평안도 사람들은 달착지근한 엿탁주 맛을 기억한다. 개중에는 엿탁주를 고급 술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대체로 서민들이 마셨던 속성주(速成酒)다. 엿탁주는 2주일이면 만들어진다. 재료는 북쪽 지방에서 많이 나는 붉은 수수를 썼다.
술을 빚는 전통적인 방법은 누룩을 조청에 버무려서 삼베로 싸 6일 가량 항아리에 보관한다. 물에 불린 수수를 맷돌에 갈아 엿기름과 물과 함께 가마솥에 넣고 잘 삭을 때까지 은근하게 끓인다. 끓인 죽은 삼베 자루에 넣고 눌러 짜서 엿밥을 걸러낸 뒤 다시 끓인다. 죽을 다시 식혀 술독에 담은 뒤 조청에 버무린 누룩과 솔잎을 넣고 고루 섞는다. 섭씨 25∼28도에서 8일 정도 발효시킨 뒤 걸러낸다. 그러면 붉은 빛이 도는 엿탁주가 만들어진다. 지금은 옥수수와 수수를 8대 2로 섞어 쓰기 때문에 노란 옥수수 빛이 돈다.
장기항씨가 엿탁주를 한자명으로 이당주(飴糖酒)라 이름지어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준비할 때였다. 고대 사회의 음식 문화를 연구한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이성우 교수를 만나러 갔다. 평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조청과 엿기름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이교수는 무릎을 탁 치더니 이내 훌륭한 술이라고 했다. 이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엿탁주는 탁주의 일종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연음조(宴飮調)에 기록된 잔치 술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 재료에 엿기름 맥아(麥芽)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서 양조 방법이 특이하며 훌륭한 술이라고 판단된다. 이북의 향토음식이나 토속주가 많이 사라져 자료 수집하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경기도 남양주에서 이 엿탁주가 발견됨으로써 술의 변천사와 발효 문화에도 학술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본다.”
1123년에 송나라 사절로 개성에 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고려의 잔치 술은 맛이 달고 색이 짙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교수는 그 술이 아마도 달고 색이 짙은 엿탁주와 같은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세가 등등했던 6세기경에 집필된 중국 최고(最古)의 농업기술서 ‘제민요술’(濟民要術)에 거론된 ‘하계명주’(夏鷄鳴酒)나,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계명주가 바로 엿탁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엿기름을 사용한 속성주라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이제 이성우 교수는 작고하여 더 상세한 것을 여쭤볼 수 없게 됐지만, 이교수의 추천으로 엿탁주는 ‘계명주’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제민요술’에 계명주는 “황혼녘에 빚어 새벽 닭이 울면 마신다”는 술로 풀이되어 있다. 새벽에 마시다니, 아주 지독한 술꾼이 탐했던 술 같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새벽녘에 다시 술을 걸러 마시는 술꾼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주(祭酒)로 썼다면 굳이 새벽에 찾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탁주는 우리 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다. 그 탁주를 거르면 청주(淸酒)가 되고, 청주나 탁주를 증류하면 소주가 나온다. 그리고 대체로 처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쓴맛보다는 단맛에 혹한다. 그런 점에서 엿탁주는 초기 술의 특징을 두루 지니고 있다. 이성우 교수의 추론은 이런 점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평안도 술 엿탁주가 고구려 술이고, 고려 잔치 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술상에 오른 것이 당혹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엿탁주를 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석실마을 취석에 들렀다. 해가 떨어지자, 휘영청 밝은 달이 앞산 위로 솟아올랐다. 취석에 계명주 한 잔을 올리고 나니, 그것도 양에 차지 않았다. 엿탁주를 병째 들이붓고 남은 술을 내 몸속에도 들이부었다. 비석에서 달고 진한 술냄새가 풍겨났다. 비로소 비석도 취하고 나도 취한 것 같았다.
중국에서 돌아온 그는 집 근처에, 같은 서인 계열의 후학인 송시열의 글씨를 받아 취석을 세웠다. 중국에서 보았던 도연명(365~427)의 비석에 화답한 것이다. 이태백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던 시인 도연명은 ‘醒石’(성석), 술 깨는 돌이라 새긴 빗돌에 기대어 술에 취해가며 깨어가며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김상헌은 거꾸로 취석을 새겨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작가 도연명의 마음이 되고자 했다.
취석이 있는 석실마을에서 북쪽으로 50리쯤 가면, 물이 좋아 물골안이라고 불리는 수동계곡이 있다. 그곳에 고구려 술이 있단다. 매장 유물에서나 간신히 찾아볼 수 있는 고구려의 자취가 술에 남아 있다니, 어떤 내력인지 궁금해 수동계곡 지둔리에 있는 술도가를 찾았다.
술 이름은 ‘계명주’(鷄鳴酒)였다. 11도 도수인데, 탁주다. 탁주는 법적으로 3도 이상인데, 대체로 6도에서 8도 사이다. 계명주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고, 농림부 지정 명인 12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나라에서 문화재급이라고 보증을 서고 있는 셈이다.
남편 장기항씨(63)는 몸이 불편해서 부인인 최옥근씨(57)가 직원 한 명을 두고 힘겹게 술을 빚고 있었다. 기능보유자인 최옥근씨는 시어머니 박채형씨(81년 작고)에게서 술 빚는 법을 배웠다. 시어머니는 평안남도 강동군 삼등면 성가리에 살다가 1·4후퇴 때 피난 내려왔다. 집안에서 부르는 술 이름은 본디 ‘엿탁주’였다. 평안도 지방에서 두루 빚어먹던 술인데, 박채형씨는 삶의 터전은 달라졌어도 술 빚는 법은 잊지 않았다. 엿탁주의 맛이 좋고 재료도 특별하여 그이의 아들 장기항씨가 문화재로 신청하였고, 며느리 최옥근씨는 생각지도 않은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월남한 평안도 사람들은 달착지근한 엿탁주 맛을 기억한다. 개중에는 엿탁주를 고급 술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대체로 서민들이 마셨던 속성주(速成酒)다. 엿탁주는 2주일이면 만들어진다. 재료는 북쪽 지방에서 많이 나는 붉은 수수를 썼다.
술을 빚는 전통적인 방법은 누룩을 조청에 버무려서 삼베로 싸 6일 가량 항아리에 보관한다. 물에 불린 수수를 맷돌에 갈아 엿기름과 물과 함께 가마솥에 넣고 잘 삭을 때까지 은근하게 끓인다. 끓인 죽은 삼베 자루에 넣고 눌러 짜서 엿밥을 걸러낸 뒤 다시 끓인다. 죽을 다시 식혀 술독에 담은 뒤 조청에 버무린 누룩과 솔잎을 넣고 고루 섞는다. 섭씨 25∼28도에서 8일 정도 발효시킨 뒤 걸러낸다. 그러면 붉은 빛이 도는 엿탁주가 만들어진다. 지금은 옥수수와 수수를 8대 2로 섞어 쓰기 때문에 노란 옥수수 빛이 돈다.
장기항씨가 엿탁주를 한자명으로 이당주(飴糖酒)라 이름지어 문화재 지정을 받으려고 준비할 때였다. 고대 사회의 음식 문화를 연구한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이성우 교수를 만나러 갔다. 평가를 받기 위해서였다. 조청과 엿기름이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이교수는 무릎을 탁 치더니 이내 훌륭한 술이라고 했다. 이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엿탁주는 탁주의 일종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연음조(宴飮調)에 기록된 잔치 술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인다. 재료에 엿기름 맥아(麥芽)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서 양조 방법이 특이하며 훌륭한 술이라고 판단된다. 이북의 향토음식이나 토속주가 많이 사라져 자료 수집하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경기도 남양주에서 이 엿탁주가 발견됨으로써 술의 변천사와 발효 문화에도 학술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본다.”
1123년에 송나라 사절로 개성에 온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에 “고려의 잔치 술은 맛이 달고 색이 짙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교수는 그 술이 아마도 달고 색이 짙은 엿탁주와 같은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기세가 등등했던 6세기경에 집필된 중국 최고(最古)의 농업기술서 ‘제민요술’(濟民要術)에 거론된 ‘하계명주’(夏鷄鳴酒)나,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계명주가 바로 엿탁주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엿기름을 사용한 속성주라는 동질성 때문이었다. 이제 이성우 교수는 작고하여 더 상세한 것을 여쭤볼 수 없게 됐지만, 이교수의 추천으로 엿탁주는 ‘계명주’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제민요술’에 계명주는 “황혼녘에 빚어 새벽 닭이 울면 마신다”는 술로 풀이되어 있다. 새벽에 마시다니, 아주 지독한 술꾼이 탐했던 술 같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새벽녘에 다시 술을 걸러 마시는 술꾼의 모습이 떠오른다. 제주(祭酒)로 썼다면 굳이 새벽에 찾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탁주는 우리 술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연륜을 지니고 있다. 그 탁주를 거르면 청주(淸酒)가 되고, 청주나 탁주를 증류하면 소주가 나온다. 그리고 대체로 처음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쓴맛보다는 단맛에 혹한다. 그런 점에서 엿탁주는 초기 술의 특징을 두루 지니고 있다. 이성우 교수의 추론은 이런 점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평안도 술 엿탁주가 고구려 술이고, 고려 잔치 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술상에 오른 것이 당혹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엿탁주를 들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석실마을 취석에 들렀다. 해가 떨어지자, 휘영청 밝은 달이 앞산 위로 솟아올랐다. 취석에 계명주 한 잔을 올리고 나니, 그것도 양에 차지 않았다. 엿탁주를 병째 들이붓고 남은 술을 내 몸속에도 들이부었다. 비석에서 달고 진한 술냄새가 풍겨났다. 비로소 비석도 취하고 나도 취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