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여도 욕을 먹고, 움직이지 않아도 욕을 먹는다.’ ‘할 일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고, 너무 일을 많이 하려 들면 국수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12·12 사태 이후 딜레마에 빠진 미국의 고민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는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에게 타전한 1980년 1월29일자 2급 비밀(Secret) 전문(telegram)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한국 군부의 반란에 미국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일 입장도 아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이런 곤혹스러운 역할을 ‘액티비스트 롤’(activist role)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미국이 과연 움직여야 하는가. 움직여야 한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며,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의 2급 비밀 전문은 12·12라는 한국의 군부 반란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었으며, 행동 반경과 행동 강령이 어떻게 정해졌는가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한국:미 대사의 정책 평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980년 1월29일자 글라이스틴 비밀 전문의 주요 부분들이다. 이 전문은 도쿄의 주일 미 대사에게도 타전됐으며, 총 분량은 10장이다. 정보공개법에 의해 1993년 9월13일 처음 공개되었다.
‘한국에서의 미 국익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님. 그러나 지난해 한미 양국 관계에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음. 주한미군 철수 문제, 코리아게이트, 무역 균형 문제 등 양국간 주요 현안은 기본적으로 1979년에 해결되었음.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12월12일의 군부 반란을 겪은 뒤 우리는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전례없이 행동을 취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음. 더욱이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
1979년에 들어와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한미 관계의 주요 현안이었던 세 가지 사건을 매듭지으면서 오랜만에 홀가분한 분위기였다. 카터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간의 최대 현안은 카터의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였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주한미군의 전투 병력 철수는 최소한 1981년까지 보류됨으로써, 글라이스틴 대사의 표현대로 ‘모든 한국인들의 우선 순위 1위’인 미군 철수 문제는 잠정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미 의회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이른바 ‘코리아게이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도 1979년이었고, 이 해에 미국은 대한국 무역에서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흑자를 보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도 잘 진척되고 있어, 몇 년 안에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적고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 입장에서는 순항하다가 박정희 시해와 12·12라는 대형 파도를 만난 셈이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국면’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새로운 국면’(a new ballgame)에 직면했음. 지난 몇 년간과는 전혀 달리 한국 국내 문제에 미국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임’이라고 적고 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핵심적인 입장은 한국 정부가 정치 자유화 조치를 취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군부가 단합하도록 하며,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반정부 인사들에게는 인내할 것을 권하는 것임.
그러나 우리의 행동가로서의 역할(activist role)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우리의 지원을 바라고 있는 사회 제반 여건으로 볼 때 결국 움직여도 욕을 먹고(will be damned) 움직이지 않아도 욕을 먹게 될 것임. 잘못 계산을 했다가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 만약 할 일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고, 너무 일을 많이 하려 들면 국수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임.’
글라이스틴 대사는 같은 전문에서 미국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행동가로서의 역할은 아무리 좋은 상황이라 해도 우리를 매우 어려운 입장에 빠뜨리고 있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모든 요소들이 우리가 지원해줄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우리가 노골적으로 직접 개입해 취약한 부분을 보강해줄 것을 바라고 있음.
따라서 결국은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국내 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우리를 비판하게 될 것임.
한국의 안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안보와 경제라는 우리의 강력한 지렛대를 빼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임.’
미국의 국내 문제 개입 정도 외에 당시의 한미 관계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미간 교역과 심각한 국내 경제 상황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신군부와의 협상에서 들이댄 최대의 무기가 바로 악화된 국내 경제였다.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었으며, 경제 문제는 미 국익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미 양국 관계에서 한 가지 분야에서는 우리가 좀더 도와줄 수 있음. 몇 해 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향후 경제를 낙관적으로 내다보았음. 그러나 이제 이런 견해는 더 이상 맞지 않으며, 현재의 민간 정부는 이런 경제 난관을 다룰 만한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함. 군사 쿠데타나 정치적 반란의 부작용은 더욱 증가할 것임. 하지만 우리는 쌀, 컬러텔레비전, 섬유, 신발, 선박 등 한국 경제의 중요한 현안들에 대해 변함없이 협상해 나갈 것임.
한국의 긴급한 경제 현안을 다루게 될 몇개월 후의 협상에서 우리는 한국에 걸려 있는 우리의 전반적인 정책 이익에 바탕을 두고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함.’
미 국무부의 비밀 문서에는 문건 작성자의 개인적인 시각이나 견해, 평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사견은 물론, 그 반대로 한국 국민들이 미국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를 나름대로 파악한 시각 등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12·12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 미국의 미묘한 입장을 냉철하게 분석한 이 비밀 문서 역시 작성자인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평소처럼 의견을 좀체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으며, 미국이 소련의 도전에 맞상대하기를 꺼린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어서 점점 더 우려하고 있음. 그들은 또 우리가 베이징을 잘 다루지 못한다고 보고 있음. 우리가 다른 곳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한반도의 난제들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없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
한국 군부의 반란에 미국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일 입장도 아니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미국의 이런 곤혹스러운 역할을 ‘액티비스트 롤’(activist role)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미국이 과연 움직여야 하는가. 움직여야 한다면 어떻게 움직여야 하며, 취하지 말아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의 2급 비밀 전문은 12·12라는 한국의 군부 반란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었으며, 행동 반경과 행동 강령이 어떻게 정해졌는가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다음은 ‘한국:미 대사의 정책 평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980년 1월29일자 글라이스틴 비밀 전문의 주요 부분들이다. 이 전문은 도쿄의 주일 미 대사에게도 타전됐으며, 총 분량은 10장이다. 정보공개법에 의해 1993년 9월13일 처음 공개되었다.
‘한국에서의 미 국익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님. 그러나 지난해 한미 양국 관계에는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음. 주한미군 철수 문제, 코리아게이트, 무역 균형 문제 등 양국간 주요 현안은 기본적으로 1979년에 해결되었음.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12월12일의 군부 반란을 겪은 뒤 우리는 정치적 전환기를 맞아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전례없이 행동을 취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음. 더욱이 경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
1979년에 들어와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한미 관계의 주요 현안이었던 세 가지 사건을 매듭지으면서 오랜만에 홀가분한 분위기였다. 카터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간의 최대 현안은 카터의 대선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였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주한미군의 전투 병력 철수는 최소한 1981년까지 보류됨으로써, 글라이스틴 대사의 표현대로 ‘모든 한국인들의 우선 순위 1위’인 미군 철수 문제는 잠정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미 의회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이른바 ‘코리아게이트’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도 1979년이었고, 이 해에 미국은 대한국 무역에서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흑자를 보았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프로젝트도 잘 진척되고 있어, 몇 년 안에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것 같다’고 적고 있다.
글라이스틴 대사 입장에서는 순항하다가 박정희 시해와 12·12라는 대형 파도를 만난 셈이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국면’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새로운 국면’(a new ballgame)에 직면했음. 지난 몇 년간과는 전혀 달리 한국 국내 문제에 미국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임’이라고 적고 있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핵심적인 입장은 한국 정부가 정치 자유화 조치를 취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군부가 단합하도록 하며,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반정부 인사들에게는 인내할 것을 권하는 것임.
그러나 우리의 행동가로서의 역할(activist role)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며, 우리의 지원을 바라고 있는 사회 제반 여건으로 볼 때 결국 움직여도 욕을 먹고(will be damned) 움직이지 않아도 욕을 먹게 될 것임. 잘못 계산을 했다가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 만약 할 일을 충분히 하지 않으면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고, 너무 일을 많이 하려 들면 국수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임.’
글라이스틴 대사는 같은 전문에서 미국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행동가로서의 역할은 아무리 좋은 상황이라 해도 우리를 매우 어려운 입장에 빠뜨리고 있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모든 요소들이 우리가 지원해줄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우리가 노골적으로 직접 개입해 취약한 부분을 보강해줄 것을 바라고 있음.
따라서 결국은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국내 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우리를 비판하게 될 것임.
한국의 안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안보와 경제라는 우리의 강력한 지렛대를 빼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임.’
미국의 국내 문제 개입 정도 외에 당시의 한미 관계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한미간 교역과 심각한 국내 경제 상황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신군부와의 협상에서 들이댄 최대의 무기가 바로 악화된 국내 경제였다.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었으며, 경제 문제는 미 국익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미 양국 관계에서 한 가지 분야에서는 우리가 좀더 도와줄 수 있음. 몇 해 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한국의 향후 경제를 낙관적으로 내다보았음. 그러나 이제 이런 견해는 더 이상 맞지 않으며, 현재의 민간 정부는 이런 경제 난관을 다룰 만한 능력이 없다고 봐야 함. 군사 쿠데타나 정치적 반란의 부작용은 더욱 증가할 것임. 하지만 우리는 쌀, 컬러텔레비전, 섬유, 신발, 선박 등 한국 경제의 중요한 현안들에 대해 변함없이 협상해 나갈 것임.
한국의 긴급한 경제 현안을 다루게 될 몇개월 후의 협상에서 우리는 한국에 걸려 있는 우리의 전반적인 정책 이익에 바탕을 두고 보다 긍정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함.’
미 국무부의 비밀 문서에는 문건 작성자의 개인적인 시각이나 견해, 평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사견은 물론, 그 반대로 한국 국민들이 미국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를 나름대로 파악한 시각 등이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12·12 군사 쿠데타를 겪으면서 미국의 미묘한 입장을 냉철하게 분석한 이 비밀 문서 역시 작성자인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의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
‘한국 국민들은 평소처럼 의견을 좀체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 국민은 미국이 현실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으며, 미국이 소련의 도전에 맞상대하기를 꺼린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어서 점점 더 우려하고 있음. 그들은 또 우리가 베이징을 잘 다루지 못한다고 보고 있음. 우리가 다른 곳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한반도의 난제들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없으리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