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평양학생소년예술단’ 초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주최측인 평화자동차가 이들의 서울 방문을 발표한 것이 불과 3일 전인 5월23일이었는데도 좌석은 완전 매진되었다. 경쾌하고 씩씩한 북한 어린이들의 노래와 춤과 연주에 매료된 청중은 공연이 끝나자 10여 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청중의 호응에 고무된 북한 보도진들은 객석으로 내려와 쉴새없이 방송 카메라를 돌려댔다.
5월31일에는 평양교예단(서커스단)이 서울에 들어와 14회 공연을 갖고 6월11일 평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북한의 ‘문화 공세’는 6월12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분위기 띄우기’로 보인다. 요즘 북한의 ‘로동신문’은 김정일을 ‘통일의 화신’으로 묘사하기에 바쁘다. 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통일정책인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선전하며 세계 여러 나라가 3대 원칙 지지 서명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반면, 박지원-송호경간의 4·8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직전 “중동 특수 이상으로 북한 특수가 일어날 것”이라고까지 호언했던 우리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에 닥쳤음에도 덤덤하기 그지없다.
김정일 ‘통일의 화신’ 묘사
우리측이 발표한 4·8 합의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고 돼 있으나 북한측이 발표한 합의문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로 돼 있다. ‘초청’과 ‘요청’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큰 차이가 있다. 정상회담이 북한쪽 발표문대로 우리 ‘요청’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면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회담을 요청한 우리가 할 일이다. 반대로 우리 발표문대로 북한측 초청에 따라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분위기 띄우기는 초청 당사자인 북한이 맡아야 옳다.
주체를 강조해온 북한이 그들 발표문에 ‘요청’이란 단어를 넣었다면 그것이 내포한 뉘앙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까맣게 잊은 듯 분위기 띄우는데만 열심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른바 ‘김일성의 유훈 사업’ 중 하나이므로 북한의 로동신문과 중앙방송이 김정일을 ‘통일의 화신’으로 묘사하며 내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북한은 예술단과 교예단을 서울에 보내 우리가 해야 할 남한내 분위기 띄우는 작업까지 돕고 있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왜 남북정상회담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는 것일까.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킨 평화자동차는 통일교에서 운영한다. 평화자동차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으나, 현대나 기아자동차처럼 완성차를 생산한 적이 없다. 본사라고 해야 사무실 하나가 전부여서 ‘페이퍼 컴퍼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평화자동차가 지난 2월3일 북한 남포시 항구동에 평화자동차 종합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평화자동차는 이탈리아 피아트사 모델을 들여와 조립-생산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통일교 측은 평양 보통강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통일교는 ‘소명의식’ 때문에 대북사업에 열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대북사업의 일환으로 98년 5월1일 리틀엔젤스예술단을 평양에 보내 공연을 가졌다. 리틀엔젤스와 같은 북한의 예술단으로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소년학생궁전’ 등이 있다. 리틀엔젤스의 평양 공연 후 통일교 측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서울 답방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싸움’으로 묘사할 수 있는 남북한 정부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서울 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통일교 측의 노력과는 별도로 김보애씨가 이끄는 NS21은 3년 전부터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남북한 정부의 미묘한 신경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미묘한 신경전이란 쉽게 말해서 사업 불허는 이쪽에서 결정한 것인데 핑계는 저쪽을 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4·8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이뤄지자 북한은 ‘전격적’으로 OK 사인을 보내왔다. 김대표가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아태평화위의 황철 참사로부터 OK 사인을 받은 것은 4월30일이었다. 김대표는 ‘7월이나 9월쯤 평양교예단 서울 공연을 성사시킨다’는 생각으로 베이징에 갔으나, 황참사는 “정상회담 이전에 하자”고 치고 나왔다.
그때까지 아태측은 평양교예단 서울 공연 대가로 5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4월30일에는 300만 달러(약 33억원)로 내려주면서까지 사업 성사를 서둘렀다(그러나 아태는 컬러 TV 2만대를 받기로 했으므로 결국 500만 달러를 다 챙기는 셈이 된다). 그 바람에 김대표는 우리 정부로부터 사업 허가를 받고 공연 장소를 물색하고 협찬사를 찾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가까스로 남북정상회담 전에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이 ‘NS21이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권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5월 중순이었다. 그 즉시 그는 베이징의 아태 대표를 만나 “결혼식 때도 신랑-신부 앞에 화동(花童)이 가는데 남북정상회담도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아이들을 먼저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리틀엔젤스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서울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후인 5월16일 아태 측은 “평양에 있는 여섯 개 학생소년궁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어린이들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을 만들어 서울에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박사장은 김보애대표보다 훨씬 더 바빠졌다. 그날로 서울에 전화를 걸어 가까스로 오페라극장을 확보한 덕분에 그는 8일 후인 5월24일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리틀엔젤스의 평양 공연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온 것이라 공연료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알아서’ 보상해 주기로 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서울에서 ‘유격대 말파리’ ‘통일렬차 달린다’ 등 혁명가요를 신나게 불렀다. 그런데 관객들은 가락만 듣고 흥겨워 큰 박수를 보냈고 북한측 사진기자들은 이를 찍었으니 북한으로서는 전혀 잃은 게 없는 셈이다.
지금까지 남북한은 제3국과의 만남에서 각자의 통일정책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얻는 외교전을 펼쳐왔다. 김대중대통령은 각 국을 순방하며 햇볕정책이나 대북 포용정책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당부해왔다. 김정일은 북한을 방문한 각 국 대표들에게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설명하고 지지 서명을 받아왔다. 이러한 두 통일논리는 4·8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도출한 박지원-송호경 회담에서 최초로 부딪쳤다. 합의서에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라는 문구가 들어갔으니, 외견상 이 충돌에서 이긴 쪽은 북한으로 보인다.
70년 3월19일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린 뒤동독 언론들은 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서독 언론은 일제히 ‘회의적’이라고 평가했다. 남북정상회담도 이런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북한은 두 공연단의 서울 공연 테이프를 방송해 내부적으로는 그들이 이겼음을 과시하고, 외부적으로는 그들 합의문에 있는 ‘요청’이란 단어를 찾아내 남측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정상회담에 응해준 것이라며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김대중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은 이러한 북한의 술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는 분위기 띄우기보다 차분함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5월31일에는 평양교예단(서커스단)이 서울에 들어와 14회 공연을 갖고 6월11일 평양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북한의 ‘문화 공세’는 6월12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분위기 띄우기’로 보인다. 요즘 북한의 ‘로동신문’은 김정일을 ‘통일의 화신’으로 묘사하기에 바쁘다. 그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통일정책인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선전하며 세계 여러 나라가 3대 원칙 지지 서명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반면, 박지원-송호경간의 4·8 남북정상회담 합의 발표 직전 “중동 특수 이상으로 북한 특수가 일어날 것”이라고까지 호언했던 우리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이 코앞에 닥쳤음에도 덤덤하기 그지없다.
김정일 ‘통일의 화신’ 묘사
우리측이 발표한 4·8 합의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고 돼 있으나 북한측이 발표한 합의문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한다”로 돼 있다. ‘초청’과 ‘요청’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는 큰 차이가 있다. 정상회담이 북한쪽 발표문대로 우리 ‘요청’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라면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회담을 요청한 우리가 할 일이다. 반대로 우리 발표문대로 북한측 초청에 따라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것이라면 분위기 띄우기는 초청 당사자인 북한이 맡아야 옳다.
주체를 강조해온 북한이 그들 발표문에 ‘요청’이란 단어를 넣었다면 그것이 내포한 뉘앙스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까맣게 잊은 듯 분위기 띄우는데만 열심이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른바 ‘김일성의 유훈 사업’ 중 하나이므로 북한의 로동신문과 중앙방송이 김정일을 ‘통일의 화신’으로 묘사하며 내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북한은 예술단과 교예단을 서울에 보내 우리가 해야 할 남한내 분위기 띄우는 작업까지 돕고 있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왜 남북정상회담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쓰는 것일까.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킨 평화자동차는 통일교에서 운영한다. 평화자동차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으나, 현대나 기아자동차처럼 완성차를 생산한 적이 없다. 본사라고 해야 사무실 하나가 전부여서 ‘페이퍼 컴퍼니’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평화자동차가 지난 2월3일 북한 남포시 항구동에 평화자동차 종합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평화자동차는 이탈리아 피아트사 모델을 들여와 조립-생산할 예정이다. 그 외에도 통일교 측은 평양 보통강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통일교는 ‘소명의식’ 때문에 대북사업에 열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대북사업의 일환으로 98년 5월1일 리틀엔젤스예술단을 평양에 보내 공연을 가졌다. 리틀엔젤스와 같은 북한의 예술단으로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과 ‘평양소년학생궁전’ 등이 있다. 리틀엔젤스의 평양 공연 후 통일교 측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서울 답방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싸움’으로 묘사할 수 있는 남북한 정부의 미묘한 신경전으로 인해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의 서울 방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러한 통일교 측의 노력과는 별도로 김보애씨가 이끄는 NS21은 3년 전부터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남북한 정부의 미묘한 신경전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미묘한 신경전이란 쉽게 말해서 사업 불허는 이쪽에서 결정한 것인데 핑계는 저쪽을 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4·8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가 이뤄지자 북한은 ‘전격적’으로 OK 사인을 보내왔다. 김대표가 베이징에 나와 있는 북한 아태평화위의 황철 참사로부터 OK 사인을 받은 것은 4월30일이었다. 김대표는 ‘7월이나 9월쯤 평양교예단 서울 공연을 성사시킨다’는 생각으로 베이징에 갔으나, 황참사는 “정상회담 이전에 하자”고 치고 나왔다.
그때까지 아태측은 평양교예단 서울 공연 대가로 5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4월30일에는 300만 달러(약 33억원)로 내려주면서까지 사업 성사를 서둘렀다(그러나 아태는 컬러 TV 2만대를 받기로 했으므로 결국 500만 달러를 다 챙기는 셈이 된다). 그 바람에 김대표는 우리 정부로부터 사업 허가를 받고 공연 장소를 물색하고 협찬사를 찾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그는 가까스로 남북정상회담 전에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이 ‘NS21이 평양교예단의 서울 공연권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5월 중순이었다. 그 즉시 그는 베이징의 아태 대표를 만나 “결혼식 때도 신랑-신부 앞에 화동(花童)이 가는데 남북정상회담도 회담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아이들을 먼저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리틀엔젤스 평양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서울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틀 후인 5월16일 아태 측은 “평양에 있는 여섯 개 학생소년궁전 중에서 가장 우수한 어린이들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을 만들어 서울에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박사장은 김보애대표보다 훨씬 더 바빠졌다. 그날로 서울에 전화를 걸어 가까스로 오페라극장을 확보한 덕분에 그는 8일 후인 5월24일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서울 방문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리틀엔젤스의 평양 공연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온 것이라 공연료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알아서’ 보상해 주기로 했다).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은 서울에서 ‘유격대 말파리’ ‘통일렬차 달린다’ 등 혁명가요를 신나게 불렀다. 그런데 관객들은 가락만 듣고 흥겨워 큰 박수를 보냈고 북한측 사진기자들은 이를 찍었으니 북한으로서는 전혀 잃은 게 없는 셈이다.
지금까지 남북한은 제3국과의 만남에서 각자의 통일정책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얻는 외교전을 펼쳐왔다. 김대중대통령은 각 국을 순방하며 햇볕정책이나 대북 포용정책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지지를 당부해왔다. 김정일은 북한을 방문한 각 국 대표들에게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설명하고 지지 서명을 받아왔다. 이러한 두 통일논리는 4·8남북정상회담 합의를 도출한 박지원-송호경 회담에서 최초로 부딪쳤다. 합의서에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면서’라는 문구가 들어갔으니, 외견상 이 충돌에서 이긴 쪽은 북한으로 보인다.
70년 3월19일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린 뒤동독 언론들은 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서독 언론은 일제히 ‘회의적’이라고 평가했다. 남북정상회담도 이런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북한은 두 공연단의 서울 공연 테이프를 방송해 내부적으로는 그들이 이겼음을 과시하고, 외부적으로는 그들 합의문에 있는 ‘요청’이란 단어를 찾아내 남측 요청에 따라 마지못해 정상회담에 응해준 것이라며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김대중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은 이러한 북한의 술수까지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청와대는 분위기 띄우기보다 차분함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