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창출을 위한 대장정의 시작”
5월23일 한나라당 ‘이회창 경선대책위원회”의 출범을 두고 이총재의 한 측근이 던진 촌평이다. 말이 5월31일 총재 경선을 대비한 경선대책위이지 실제로는 그 이후를 겨냥한 ‘대권 산실’의 기능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총재 경선대책위가 위치한 곳은 서울 여의도 부국증권 빌딩 11층. 부국증권 빌딩에 있다 해서 속칭 ‘부국팀’으로 불린다. 부국팀이 구성된 것은 이번이 세번째.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사조직으로 그해 3월에 한번 구성됐고, 1998년 8월 총재 경선을 위해 다시 모였었다.
그러나 이번 ‘5·23 부국팀’은 과거와 달리 단출하게 구성됐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유가 뭘까. 이회창총재의 경선 압승을 예상하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화력을 총결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 조정식 총재보좌역은 “총선에서 승리한 지 얼마 안돼 치러지는 경선이라는 특성 등으로 부국팀이 실무적 보좌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 보좌관들이 파견돼 근무했고 전화 홍보요원이 상주한 것 외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아 과거와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이총재가 “조용하고 검소하게 경선을 치르자”고 말한 것도 조촐한 팀이 꾸려질 수밖에 없었던 한 이유였다.
이총재 측근으로 부국팀을 총지휘한 양정규 전의원은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명우보좌관 역시 “실무진까지 포함한 전체 인원은 1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과거 같으면 권역별 책임자도 정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없었다는 것.
그러나 이번 부국팀의 약소화는 하순봉 김진재 박희태 이상득 정의화 등 측근 의원들이 저마다 부총재 경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총재 경선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다. 또한 지난 총선을 통해 현역 의원과 지구당위원장 가운데 80% 정도를 ‘범 이회창계’로 묶은 터라 굳이 대형 조직을 만들지 않고 이들을 통합 조정하는 ‘헤드 쿼터’ 기능만 행사하면 충분하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총재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이회창후보측이 돈을 주고 대의원들을 모으고 있으며, 수적 우위를 앞세워 지구당위원장을 상대로 줄세우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외부에 알려진 ‘5·23 부국팀’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총괄:양정규 전의원 △본부장:김기배의원 △조직:이성희 총재특보 외 2명 △총무 : 이흥주 총재특보 △대변인:고흥길 의원 △기획-홍보 : 김홍신의원 외 5명 등이다. 이들 가운데 김홍신의원과 이흥주특보, 고흥길 의원 등은 경선 기간 내내 이총재를 수행했다.
부국빌딩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외곽에서 지원하는 넓은 의미의 부국팀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명우보좌관과 배중근비서관 등 의원회관팀, 금종래 비서실차장을 중심으로 한 총재 정무보좌역팀 등이다. 이원창의원(전국구)과 정태윤 위원장도 외곽에서 언론 홍보 등을 도왔다.
‘5·23 부국팀’의 면면을 볼 때 과거와 다른 점은 이총재 측근 중 윤여준의원(전국구)와 황영하 전총무처 장관, 유경현 전평통사무총장 등이 빠졌다는 점. 윤의원(상자기사 참조)은 지난 2·19 공천파동의 후유증으로, 황 전장관과 유 전사무총장은 지역관리 등의 이유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부국팀이 처음 만들어진 1997년 3월과 지금의 부국팀을 비교하면 중심 인물의 변화가 많아 이회창총재의 순탄하지 못한 항로를 읽게 한다. 1차 부국팀에서는 이총재의 정계입문 초기부터 핵심역할을 해온 원내 7인방과 원외 7인방이 중심축을 구성했다. 원내 7인방은 △총괄:하순봉 △기획 및 여론조사:서상목 △조직:백남치-변정일 △전략:김영일 △홍보:박성범 △연락업무 등:황우려의원으로 역할분담이 돼 있었다. 원외 7인방은 황영하 전총무처 장관, 유경현 전평통 사무총장, 이흥주 전총리비서실장, 고흥길 전중앙일보 편집국장, 안동일 변호사, 진영 변호사, 진경탁 전삼척지구당 위원장 등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돼 ‘이회창 대통령 후보 경선대책위원회’(위원장 황낙주)가 만들어졌고 ‘대통령 후보 이회창’을 만들어냈던 것.
1차 부국팀은 이총재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이회창 대통령후보 후원회’로 탈바꿈했다. 당을 중심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사조직 성격이 짙은 부국팀을 후원회로 돌린 것. 그러나 역시 대선에서의 핵심 역할은 부국팀에서 총괄했다. 이총재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부국빌딩에 계속 후원회 사무실을 유지한 것만 보더라도 부국팀에 대한 이총재의 애정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98년 8월31일의 한나라당 전당대회 총재경선에 대비하기 위해 2차 부국팀을 만든 것이 98년 8월초. 당시 구성을 보면 1차와 3차 부국팀의 중간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본부장:양정규 △실무총책:윤여준 △기획-조직:윤원중-유경현 △총무:황영하 △홍보:이원창-고흥길 △의전:이흥주 △여성:김정숙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이총재의 오늘을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 됐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3차 부국팀을 총괄한 양정규전의원은 “5월31일 전당대회가 끝난 뒤 부국팀은 곧바로 해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 의원 후원회’로 돌아간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가 관측통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4차 부국팀에 벌써부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체계화된 중-장기 플랜을 짜고 있다.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해 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미 물밑에서 2002년 5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및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는 ‘4차 부국팀’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총재 선출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권 플랜이 가동되는 셈. 부국팀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의 전위대를 맡을 것도 분명하다.
실제로 3차 부국팀에서는 이번 경선이 향후 대권 가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하는 보고서가 많이 작성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부국팀에서는 이총재의 득표율 못지 않게 김덕룡 강삼재의원 가운데 과연 누가 2등을 할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 이유는 김덕룡의원보다 강삼재의원이 2등이 되었을 경우 대권 가도에 더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강의원이 2등을 하면 그렇지 않아도 영남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영남 후보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부국팀의 판단. 부국팀에서는 강삼재의원을 ‘잠재적 라이벌’로 보고 있는 셈이다.
‘4차 부국팀 만들기’는 ‘이회창당 만들기’와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총재가 앞으로 당 체계를 쇄신하는 작업 등을 통해 민주적인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진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정식 총재보좌역은 “차갑다는 평을 듣는 이총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총재는 지난 경선 과정에서 스타일 변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5월25일 인천 로얄호텔에서 열린 이총재와 인천지역 대의원들과의 간담회 당시 모두 발언을 마친 이총재는 마이크를 들고 대의원들이 있는 단하로 내려가며 “마치 제가 MC가 된 것 같네요”라는 농을 하며 가벼운 분위기로 유도하려고 애썼던 것. 이총재는 다른 지역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도 단상에 기대 연설하는 등 기존의 ‘답답한 이미지’를 파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부국팀 관계자들은 “이총재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부국팀에서 이총재의 이미지 변신 필요성을 주문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한나라당의 일반적 관측. 지난 4·13 총선 이후 ‘독선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는’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총재 주변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왔던 까닭이다.
최근 이총재 측근 인사들은 지난 2·19 공천 파동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중진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지 않았으면 지금 얼마나 어려움을 겪겠느냐”는 것. 당시는 말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얘기다. 이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총재는 역풍이 있더라도 이회창식 정치를 펼쳐 다음 대선에서 국민으로부터 평가를 받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치밀하게 하나하나 풀어나갈 것”이라고 말해 이총재의 대권구상과 관련한 밑그림이 이미 상당 부분 그려져 있음을 암시했다. 이회창총재의 대권 플랜 산실인 부국팀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주목된다.
5월23일 한나라당 ‘이회창 경선대책위원회”의 출범을 두고 이총재의 한 측근이 던진 촌평이다. 말이 5월31일 총재 경선을 대비한 경선대책위이지 실제로는 그 이후를 겨냥한 ‘대권 산실’의 기능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총재 경선대책위가 위치한 곳은 서울 여의도 부국증권 빌딩 11층. 부국증권 빌딩에 있다 해서 속칭 ‘부국팀’으로 불린다. 부국팀이 구성된 것은 이번이 세번째.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사조직으로 그해 3월에 한번 구성됐고, 1998년 8월 총재 경선을 위해 다시 모였었다.
그러나 이번 ‘5·23 부국팀’은 과거와 달리 단출하게 구성됐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유가 뭘까. 이회창총재의 경선 압승을 예상하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화력을 총결집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다”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 조정식 총재보좌역은 “총선에서 승리한 지 얼마 안돼 치러지는 경선이라는 특성 등으로 부국팀이 실무적 보좌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 보좌관들이 파견돼 근무했고 전화 홍보요원이 상주한 것 외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아 과거와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이총재가 “조용하고 검소하게 경선을 치르자”고 말한 것도 조촐한 팀이 꾸려질 수밖에 없었던 한 이유였다.
이총재 측근으로 부국팀을 총지휘한 양정규 전의원은 “체계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이명우보좌관 역시 “실무진까지 포함한 전체 인원은 1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과거 같으면 권역별 책임자도 정했지만 이번에는 전혀 없었다는 것.
그러나 이번 부국팀의 약소화는 하순봉 김진재 박희태 이상득 정의화 등 측근 의원들이 저마다 부총재 경선에 출마하는 바람에 총재 경선에 신경을 쓸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데도 원인이 있다. 또한 지난 총선을 통해 현역 의원과 지구당위원장 가운데 80% 정도를 ‘범 이회창계’로 묶은 터라 굳이 대형 조직을 만들지 않고 이들을 통합 조정하는 ‘헤드 쿼터’ 기능만 행사하면 충분하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이 때문에 총재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의원은 선거 과정에서 “이회창후보측이 돈을 주고 대의원들을 모으고 있으며, 수적 우위를 앞세워 지구당위원장을 상대로 줄세우기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외부에 알려진 ‘5·23 부국팀’의 체계는 다음과 같다. △총괄:양정규 전의원 △본부장:김기배의원 △조직:이성희 총재특보 외 2명 △총무 : 이흥주 총재특보 △대변인:고흥길 의원 △기획-홍보 : 김홍신의원 외 5명 등이다. 이들 가운데 김홍신의원과 이흥주특보, 고흥길 의원 등은 경선 기간 내내 이총재를 수행했다.
부국빌딩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외곽에서 지원하는 넓은 의미의 부국팀에 속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명우보좌관과 배중근비서관 등 의원회관팀, 금종래 비서실차장을 중심으로 한 총재 정무보좌역팀 등이다. 이원창의원(전국구)과 정태윤 위원장도 외곽에서 언론 홍보 등을 도왔다.
‘5·23 부국팀’의 면면을 볼 때 과거와 다른 점은 이총재 측근 중 윤여준의원(전국구)와 황영하 전총무처 장관, 유경현 전평통사무총장 등이 빠졌다는 점. 윤의원(상자기사 참조)은 지난 2·19 공천파동의 후유증으로, 황 전장관과 유 전사무총장은 지역관리 등의 이유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부국팀이 처음 만들어진 1997년 3월과 지금의 부국팀을 비교하면 중심 인물의 변화가 많아 이회창총재의 순탄하지 못한 항로를 읽게 한다. 1차 부국팀에서는 이총재의 정계입문 초기부터 핵심역할을 해온 원내 7인방과 원외 7인방이 중심축을 구성했다. 원내 7인방은 △총괄:하순봉 △기획 및 여론조사:서상목 △조직:백남치-변정일 △전략:김영일 △홍보:박성범 △연락업무 등:황우려의원으로 역할분담이 돼 있었다. 원외 7인방은 황영하 전총무처 장관, 유경현 전평통 사무총장, 이흥주 전총리비서실장, 고흥길 전중앙일보 편집국장, 안동일 변호사, 진영 변호사, 진경탁 전삼척지구당 위원장 등이었다. 이들이 중심이 돼 ‘이회창 대통령 후보 경선대책위원회’(위원장 황낙주)가 만들어졌고 ‘대통령 후보 이회창’을 만들어냈던 것.
1차 부국팀은 이총재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이회창 대통령후보 후원회’로 탈바꿈했다. 당을 중심으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사조직 성격이 짙은 부국팀을 후원회로 돌린 것. 그러나 역시 대선에서의 핵심 역할은 부국팀에서 총괄했다. 이총재가 대선에서 패배한 뒤 부국빌딩에 계속 후원회 사무실을 유지한 것만 보더라도 부국팀에 대한 이총재의 애정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98년 8월31일의 한나라당 전당대회 총재경선에 대비하기 위해 2차 부국팀을 만든 것이 98년 8월초. 당시 구성을 보면 1차와 3차 부국팀의 중간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본부장:양정규 △실무총책:윤여준 △기획-조직:윤원중-유경현 △총무:황영하 △홍보:이원창-고흥길 △의전:이흥주 △여성:김정숙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이총재의 오늘을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 됐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3차 부국팀을 총괄한 양정규전의원은 “5월31일 전당대회가 끝난 뒤 부국팀은 곧바로 해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회창 의원 후원회’로 돌아간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정가 관측통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4차 부국팀에 벌써부터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체계화된 중-장기 플랜을 짜고 있다.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해 나갈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미 물밑에서 2002년 5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및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대비하는 ‘4차 부국팀’의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총재 선출을 계기로 본격적인 대권 플랜이 가동되는 셈. 부국팀이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의 전위대를 맡을 것도 분명하다.
실제로 3차 부국팀에서는 이번 경선이 향후 대권 가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하는 보고서가 많이 작성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부국팀에서는 이총재의 득표율 못지 않게 김덕룡 강삼재의원 가운데 과연 누가 2등을 할 것인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 이유는 김덕룡의원보다 강삼재의원이 2등이 되었을 경우 대권 가도에 더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강의원이 2등을 하면 그렇지 않아도 영남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영남 후보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 부국팀의 판단. 부국팀에서는 강삼재의원을 ‘잠재적 라이벌’로 보고 있는 셈이다.
‘4차 부국팀 만들기’는 ‘이회창당 만들기’와 동시에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총재가 앞으로 당 체계를 쇄신하는 작업 등을 통해 민주적인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진력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조정식 총재보좌역은 “차갑다는 평을 듣는 이총재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총재는 지난 경선 과정에서 스타일 변화를 도모하기도 했다.
5월25일 인천 로얄호텔에서 열린 이총재와 인천지역 대의원들과의 간담회 당시 모두 발언을 마친 이총재는 마이크를 들고 대의원들이 있는 단하로 내려가며 “마치 제가 MC가 된 것 같네요”라는 농을 하며 가벼운 분위기로 유도하려고 애썼던 것. 이총재는 다른 지역에서 열린 간담회에서도 단상에 기대 연설하는 등 기존의 ‘답답한 이미지’를 파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부국팀 관계자들은 “이총재 스스로가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부국팀에서 이총재의 이미지 변신 필요성을 주문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 한나라당의 일반적 관측. 지난 4·13 총선 이후 ‘독선적이고 빈틈없어 보이는’ 이미지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총재 주변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왔던 까닭이다.
최근 이총재 측근 인사들은 지난 2·19 공천 파동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중진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키지 않았으면 지금 얼마나 어려움을 겪겠느냐”는 것. 당시는 말들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얘기다. 이총재의 한 측근 인사는 “총재는 역풍이 있더라도 이회창식 정치를 펼쳐 다음 대선에서 국민으로부터 평가를 받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치밀하게 하나하나 풀어나갈 것”이라고 말해 이총재의 대권구상과 관련한 밑그림이 이미 상당 부분 그려져 있음을 암시했다. 이회창총재의 대권 플랜 산실인 부국팀이 어떤 그림을 그릴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