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건설기계코리아㈜ 김희장과장은 6월 중순 부인과 함께 제주도에서 5일 동안 휴가를 즐길 생각만 하면 일하고 싶은 의욕이 절로 샘솟는다. 마침 부인과 자신의 생일이 비슷해 생일 기념 여행을 겸해 휴가를 잡은 것. 김과장의 휴가계획에 부인은 기뻐하면서도 “여름 휴가시즌도 아닌데 마음대로 휴가를 가도 되느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휴가는 직장생활 10여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
외국계 기업 한국인 종사자 300만명
김과장의 이런 휴가계획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문이 98년 7월 볼보에 인수된 이후 생긴 변화 가운데 하나. 김과장은 “삼성중공업 시절엔 여름휴가를 가려고 해도 윗사람 눈치를 봐야 했으나 볼보에서는 자신의 계획에 맞춰 휴가를 가는 것은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면서 “당연한 얘기지만 휴가기간 자신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과장은 또 작년말 전혀 예상치 않았던 특별보너스 70만원을 받았다. 98년 670억원 적자에서 작년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것은 전직원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 회사측이 일률적으로 70만원씩 지급한 것. 김과장은 “과거 삼성 시절 만년 적자 계열사라고 해서 승진도 다른 계열사에 비해 늦었는데 ‘흑자가 나면 직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해온 볼보 경영진이 약속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털어놓았다.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 겉으로는 국산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외제인 기업들이 늘고 있다. 97년 1055건, 69억71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외국인 직접투자가 98년엔 1400건, 88억5200만 달러, 그리고 작년엔 2097건, 155억4200만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3월 중 370건(9억8100만 달러)을 기록, 올 1월의 사상 최고 기록 304건을 2개월만에 경신했다. 이에 따라 현재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한 기업은 약6000개에 이른 것으로 산업자원부는 파악하고 있다. 회사당 평균 직원수를 500명으로 가정하면 300만명이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현 정부 들어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증한 것은 물론 정부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의 결과다. 현 정부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단기적인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간접투자와 달리 기업경영참여를 통해 장기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안정적인 투자형태여서 우리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실제 작년의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는 155억 달러인 데 반해 유출은 1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증권투자를 위해 들어온 외자는 415억 달러인 반면 유출된 외자도 363억 달러에 이르러 직접투자에 비해 간접투자에서 더 빈번한 자금이동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어 환란(換亂)의 위험성이 있는 남의 돈’은 간접투자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물론 일부에서는 국내 기업의 해외매각과 합자가 활발해지면서 “알짜는 몽땅 외국에 팔려나가고 국내에는 껍데기만 남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4·13총선’ 기간 중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외치며 파업에 나섰던 완성차 4사 노조가 내걸었던 명분도 바로 이 점이었다. 일부에서는 기업 해외매각에 대해 국부유출 논란을 제기한 상태다.
그러나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하루아침에 ‘토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변신한 회사 직원들은 이런 논란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외국 기업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이 없어지고 외국인 경영진과 한국인 직원들이 신뢰감을 형성해가고 있다. 이들은 “외국인 회사 하면 연상되기 쉬운 고용불안을 아직은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외자유치로 회사가 우량기업으로 변신한 데다 투명한 경영을 하고 실적에 따른 보상을 해주기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고 입을 모은다.
외국인 경영진도 아직은 조심스러운 듯 갑작스런 변화를 꾀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우리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 헬샴 사장은 98년 10월16일 경남 창원 인근 장복산 정상에서 IMF 경제위기 조기 탈출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리면서 한복을 입고 한국식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제일은행 호리에 행장도 취임 직후인 올 2월말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국내가요를 불러 은행내에서 화제가 됐다.
이런 현실 때문인지 외국계 기업 직원들은 아직은 ‘각오한 만큼의’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작년 4월 미국 비스테온사가 인수한 한라공조의 경우처럼 한국인 경영진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는 경영 성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벨기에 맥주업체 인터브루사 대주주인 OB맥주 이계하차장은 “직원들이 처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수익성 위주의 내실경영 외에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차장은 그 이유를 인터브루사가 세계 40여개 국가에 공장을 거느리고 있어 현지화 전략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외국 기업의 합리적인 문화가 정착돼 가고 있는 것도 그런 변화 가운데 하나. 계층적인 직급 위주의 한국적 조직도 직원들의 창의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유연한 조직으로 변화했다. 당연히 일방적인 지시는 사라지고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분위기가 정착돼 가고 있다.
볼보기계코리아㈜ 이재환전무는 “과거와 달리 이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문제를 제기해도 끝까지 토론해서 결정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연초 경영 계획이 확정되면 계수화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보고서에는 과거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치로 채우고 있다는 것.
그러나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꼽는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 해도 ‘언어의 세계화’. OB맥주 직원들은 작년 6월 인터브루사에 인수된 이후 영어와 담쌓고 살던 부서의 직원들까지 예외없이 ‘영어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외국인 상사에게 영어로 브리핑을 해야 하고 결재서류도 영어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
어학 스트레스는 OB맥주뿐 아니라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 더구나 외국인 경영진들은 업무상 일이 있으면 와이셔츠 바람으로 담당자를 직접 찾아와 질문하기 때문에 어학 스트레스는 굉장하다. 보워터 한라제지 윤인철과장은 “직원들 가운데 영생영사(英生英死·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는다)를 외치며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지만 따라가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외국계 기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실적에 따른 급여 지급 등일 것이다. 그런 일은 현실화되고 있다. 직원들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외국인 사장 집무실을 노크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임원실에만 들어가려 해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던 토종 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제일은행 강원경과장은 “호리에 행장이 올 초 행장에 취임한 직후 방문한 거래 기업에서는 ‘역시 외국인 경영자가 다르긴 다르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과거 은행 임원들은 거래 기업을 방문해도 그 회사 임원들만 상대했는데 호리에 행장은 임원 이하 직원들을 직접 만나 질문하고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곤 했다는 것.
직원들에게 투명하게 경영 실태를 설명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그에 따라 보상해주는 외국계 기업들의 경영방침은 직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팬 아시아 페이퍼㈜(구 한솔제지 전주공장) 노사협의회 사원측 대표 김은주씨도 “과거와 달리 위에서 결정된 사안이 곧바로 사원들에게 전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경영목표를 달성하면 성과급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의 근무의욕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 이 회사 직원들은 작년에 고정 상여 900%에 200%의 성과급을 받았다.
한라공조에서는 회사측이 노조가 요구한 100%의 성과급 외에 100%를 더 주어 노조마저 어리둥절케 했다. 이 회사 노조 이강남사무국장은 “작년의 경우 매출액(5300억원)이나 세전 당기순이익(500억원)에서 창사 이래 최대치를 달성한데 따른 보상 차원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보워터 한라제지 윤인철과장도 “생산성이나 산업안전에 관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면 성과급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어 직원들의 의욕이 높다”고 말했다. 윤과장은 또 “외자유치를 통해 부실기업이 초우량기업으로 변신하자 거래처 사람들의 대우도 달라졌고, 과거 그룹 공채에서 성적이 괜찮은 사람들이 배치됐던 한라중공업 직원들이 이제는 오히려 보워터 한라제지 직원들을 부러워한다”고 자랑했다.
외국 기업들의 투명경영 의지는 기업의 자금담당 임원 자리를 외국인으로 가장 먼저 교체하는 데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기업의 외자유치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외국 기업들은 최고경영자보다 자금담당 임원을 최우선으로 요구한다. 한국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돈줄만큼은 장악하겠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동료들 사이의 끈끈한 정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점. 제일은행의 한 과장급 간부는 “외국인 임원들이 모두 그 방면의 전문가여서 이들과 함께 일하려면 전문성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며 “과거처럼 퇴근 후 동료들과 한잔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일부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밝히는 ‘실망감’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바스프의 한 팀장급 간부는 “높은 임금, 자유스런 분위기 등 외국 기업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생각만큼 임금도 높지 않은 데다 업무 강도도 세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직무수준도 높아 불만을 표시하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기업의 국내 상륙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또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가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점도 일부에서 확인되고 있다. 서울대 윤영관교수는 “이런 점에서 국내 기업 해외매각을 두고 국부유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라면서 “선진자본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계 기업 한국인 종사자 300만명
김과장의 이런 휴가계획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삼성중공업 건설기계부문이 98년 7월 볼보에 인수된 이후 생긴 변화 가운데 하나. 김과장은 “삼성중공업 시절엔 여름휴가를 가려고 해도 윗사람 눈치를 봐야 했으나 볼보에서는 자신의 계획에 맞춰 휴가를 가는 것은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면서 “당연한 얘기지만 휴가기간 자신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도록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과장은 또 작년말 전혀 예상치 않았던 특별보너스 70만원을 받았다. 98년 670억원 적자에서 작년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한 것은 전직원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 회사측이 일률적으로 70만원씩 지급한 것. 김과장은 “과거 삼성 시절 만년 적자 계열사라고 해서 승진도 다른 계열사에 비해 늦었는데 ‘흑자가 나면 직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말해온 볼보 경영진이 약속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털어놓았다.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 이후 겉으로는 국산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외제인 기업들이 늘고 있다. 97년 1055건, 69억71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외국인 직접투자가 98년엔 1400건, 88억5200만 달러, 그리고 작년엔 2097건, 155억4200만 달러로 대폭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3월 중 370건(9억8100만 달러)을 기록, 올 1월의 사상 최고 기록 304건을 2개월만에 경신했다. 이에 따라 현재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한 기업은 약6000개에 이른 것으로 산업자원부는 파악하고 있다. 회사당 평균 직원수를 500명으로 가정하면 300만명이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얘기다.
현 정부 들어 외국인 직접투자가 급증한 것은 물론 정부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의 결과다. 현 정부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외국인 직접투자가 단기적인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간접투자와 달리 기업경영참여를 통해 장기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안정적인 투자형태여서 우리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실제 작년의 경우 외국인 직접투자는 155억 달러인 데 반해 유출은 11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증권투자를 위해 들어온 외자는 415억 달러인 반면 유출된 외자도 363억 달러에 이르러 직접투자에 비해 간접투자에서 더 빈번한 자금이동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어 환란(換亂)의 위험성이 있는 남의 돈’은 간접투자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물론 일부에서는 국내 기업의 해외매각과 합자가 활발해지면서 “알짜는 몽땅 외국에 팔려나가고 국내에는 껍데기만 남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4·13총선’ 기간 중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를 외치며 파업에 나섰던 완성차 4사 노조가 내걸었던 명분도 바로 이 점이었다. 일부에서는 기업 해외매각에 대해 국부유출 논란을 제기한 상태다.
그러나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통해 하루아침에 ‘토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변신한 회사 직원들은 이런 논란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오히려 외국 기업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불안감이 없어지고 외국인 경영진과 한국인 직원들이 신뢰감을 형성해가고 있다. 이들은 “외국인 회사 하면 연상되기 쉬운 고용불안을 아직은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외자유치로 회사가 우량기업으로 변신한 데다 투명한 경영을 하고 실적에 따른 보상을 해주기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고 입을 모은다.
외국인 경영진도 아직은 조심스러운 듯 갑작스런 변화를 꾀하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 우리 문화에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볼보건설기계코리아 헬샴 사장은 98년 10월16일 경남 창원 인근 장복산 정상에서 IMF 경제위기 조기 탈출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리면서 한복을 입고 한국식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제일은행 호리에 행장도 취임 직후인 올 2월말 직원들과의 회식자리에서 국내가요를 불러 은행내에서 화제가 됐다.
이런 현실 때문인지 외국계 기업 직원들은 아직은 ‘각오한 만큼의’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작년 4월 미국 비스테온사가 인수한 한라공조의 경우처럼 한국인 경영진을 그대로 유임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는 경영 성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벨기에 맥주업체 인터브루사 대주주인 OB맥주 이계하차장은 “직원들이 처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수익성 위주의 내실경영 외에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차장은 그 이유를 인터브루사가 세계 40여개 국가에 공장을 거느리고 있어 현지화 전략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그렇다고 해서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외국 기업의 합리적인 문화가 정착돼 가고 있는 것도 그런 변화 가운데 하나. 계층적인 직급 위주의 한국적 조직도 직원들의 창의성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유연한 조직으로 변화했다. 당연히 일방적인 지시는 사라지고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분위기가 정착돼 가고 있다.
볼보기계코리아㈜ 이재환전무는 “과거와 달리 이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문제를 제기해도 끝까지 토론해서 결정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연초 경영 계획이 확정되면 계수화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보고서에는 과거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치로 채우고 있다는 것.
그러나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꼽는 가장 큰 변화는 뭐니뭐니 해도 ‘언어의 세계화’. OB맥주 직원들은 작년 6월 인터브루사에 인수된 이후 영어와 담쌓고 살던 부서의 직원들까지 예외없이 ‘영어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외국인 상사에게 영어로 브리핑을 해야 하고 결재서류도 영어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
어학 스트레스는 OB맥주뿐 아니라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겪는 공통적인 어려움. 더구나 외국인 경영진들은 업무상 일이 있으면 와이셔츠 바람으로 담당자를 직접 찾아와 질문하기 때문에 어학 스트레스는 굉장하다. 보워터 한라제지 윤인철과장은 “직원들 가운데 영생영사(英生英死·영어에 살고 영어에 죽는다)를 외치며 열심히 하는 사람도 많지만 따라가기 힘들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외국계 기업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실적에 따른 급여 지급 등일 것이다. 그런 일은 현실화되고 있다. 직원들이 와이셔츠 바람으로 외국인 사장 집무실을 노크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임원실에만 들어가려 해도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던 토종 기업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제일은행 강원경과장은 “호리에 행장이 올 초 행장에 취임한 직후 방문한 거래 기업에서는 ‘역시 외국인 경영자가 다르긴 다르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전했다. 과거 은행 임원들은 거래 기업을 방문해도 그 회사 임원들만 상대했는데 호리에 행장은 임원 이하 직원들을 직접 만나 질문하고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곤 했다는 것.
직원들에게 투명하게 경영 실태를 설명하고 목표를 달성하면 그에 따라 보상해주는 외국계 기업들의 경영방침은 직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팬 아시아 페이퍼㈜(구 한솔제지 전주공장) 노사협의회 사원측 대표 김은주씨도 “과거와 달리 위에서 결정된 사안이 곧바로 사원들에게 전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인센티브제를 도입해 경영목표를 달성하면 성과급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직원들의 근무의욕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 이 회사 직원들은 작년에 고정 상여 900%에 200%의 성과급을 받았다.
한라공조에서는 회사측이 노조가 요구한 100%의 성과급 외에 100%를 더 주어 노조마저 어리둥절케 했다. 이 회사 노조 이강남사무국장은 “작년의 경우 매출액(5300억원)이나 세전 당기순이익(500억원)에서 창사 이래 최대치를 달성한데 따른 보상 차원으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보워터 한라제지 윤인철과장도 “생산성이나 산업안전에 관한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면 성과급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어 직원들의 의욕이 높다”고 말했다. 윤과장은 또 “외자유치를 통해 부실기업이 초우량기업으로 변신하자 거래처 사람들의 대우도 달라졌고, 과거 그룹 공채에서 성적이 괜찮은 사람들이 배치됐던 한라중공업 직원들이 이제는 오히려 보워터 한라제지 직원들을 부러워한다”고 자랑했다.
외국 기업들의 투명경영 의지는 기업의 자금담당 임원 자리를 외국인으로 가장 먼저 교체하는 데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기업의 외자유치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한 법무법인 변호사는 “외국 기업들은 최고경영자보다 자금담당 임원을 최우선으로 요구한다. 한국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직접 돈줄만큼은 장악하겠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과거와 같은 동료들 사이의 끈끈한 정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점. 제일은행의 한 과장급 간부는 “외국인 임원들이 모두 그 방면의 전문가여서 이들과 함께 일하려면 전문성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라며 “과거처럼 퇴근 후 동료들과 한잔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일부 외국계 기업 직원들이 밝히는 ‘실망감’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바스프의 한 팀장급 간부는 “높은 임금, 자유스런 분위기 등 외국 기업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생각만큼 임금도 높지 않은 데다 업무 강도도 세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직무수준도 높아 불만을 표시하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계 기업의 국내 상륙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또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가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친다는 점도 일부에서 확인되고 있다. 서울대 윤영관교수는 “이런 점에서 국내 기업 해외매각을 두고 국부유출 논란을 벌이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라면서 “선진자본 유치경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인정하고 하루빨리 이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