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인류 최악의 전쟁이었던 2차 대전을 끝내는 마침표였다. 동시에 인류는 어떤 전쟁보다 더 무시무시한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 핵무기의 위력을 절감했다.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던 조종사 토머스 패러비의 사망 소식은 다시 한번 미국인들을 종전(終戰)의 기억, 기쁨과 경악이 뒤범벅된 55년 전의 순간으로 이끌고 있다. 인류가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했고 그 무기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2차 대전의 종전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만약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연합국측이 아닌 독일이나 일본에서 개발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이 가정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미국은 극비리에 원자폭탄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일의 ‘폭탄 개발팀’이 미국을 앞질렀더라면 원자폭탄은 일본 대신 유럽과 미국에 떨어졌을 것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엔리코 페르미, 닐스 보어 등 유럽에서 망명한 물리학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독일에는 그들 못지 않은 탁월한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이 있었다.
사제간 엇갈린 운명이 역사 뒤바꿔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독일을 점령한 후 독일 원자폭탄 개발팀의 연구 자료를 손에 넣었다. 놀랍게도 연구 상황은 초보적인 데다가 모순투성이였다. 독일 개발팀은 원자폭탄의 ABC나 다름없는 우라늄의 핵분열 연쇄반응에도 이르지 못했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연구치고는 모든 것이 너무도 엉성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팀의 팀장이었던 하이젠베르크는 종전 후 자신이 고의로 원자폭탄 개발 연구를 지연시켰다고 증언했다. 원자폭탄 개발팀을 주도한 것은 전장에 끌려갈 운명에 처한 독일 물리학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며 진정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물리학이 무기 개발에 사용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과연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폭탄 개발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증언대로 히틀러의 수중에 원자폭탄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면서 시간을 끈 것인가. 이 부분은 지금껏 의문에 싸여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입자물리학의 세계에 철학적인 원리를 결합시킨 ‘불확정성의 원리’ 주창자로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도 천재로 일컬어지던 인물이었다. 2차 대전 중 연합국 측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할 밀사를 독일에 파견한 일까지 있었다.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이며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제간의 엇갈린 운명이 세계 역사를 바꾸어놓은 셈이다.
4월부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연극 ‘코펜하겐’이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상황, 영원히 풀리지 않을 ‘하이젠베르크의 수수께끼’를 무대 위에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극작가 마이클 프라이언이 쓴 이 희곡은 1941년 9월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비밀리에 찾아왔던 코펜하겐에서의 하룻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사망한 지금, 이들이 코펜하겐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어는 원자폭탄의 제조 원리인 우라늄 동위원소의 핵분열에 대한 핵심적인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진정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려 했다면 이 부분을 묻기 위해서 보어를 찾아왔을 것이다. 또는 독일에 남아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해 달라고 스승을 설득하려 했을 수도 있다. 반대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 ‘독일이든 미국이든 원자폭탄만은 만들지 말자’는 모종의 밀약을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연극은 이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린다.
종전 후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게서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서 폭탄 제조를 위한 핵분열 이론을 알아내려 한 것일까, 아니면 독일의 원자폭탄 제조가 시간문제라는 것을 ‘경고’하려 한 것일까.
연극 시작에 앞서 3월27일 뉴욕에서 열린 “연극 ‘코펜하겐’의 제작 과정”이라는 심포지엄에서도 가장 뜨거운 화두는 하이젠베르크의 수수께끼였다. 토론에 나선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여전히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카시디는 하이젠베르크의 증언이 실패한 연구를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였던 물리학자 한스 베스와 존 휠러는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 자료가 하이젠베르크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엉터리였다며 고의로 연구를 지연시켰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증언을 믿는다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도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과학자적 양심에 따라 원자폭탄은 개발할 수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진실일까. 그 주장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정치가들이 더이상 과학을 무기 개발에 이용하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나는 항상 기도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토로만은 진실에 가까운 듯싶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물리학자 벤자민 베더슨 박사는 “연극 ‘코펜하겐’은 현대물리학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끝을 맺었다.
만약 원자폭탄이라는 신무기를 연합국측이 아닌 독일이나 일본에서 개발했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이 가정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미국은 극비리에 원자폭탄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일의 ‘폭탄 개발팀’이 미국을 앞질렀더라면 원자폭탄은 일본 대신 유럽과 미국에 떨어졌을 것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주도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작전인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엔리코 페르미, 닐스 보어 등 유럽에서 망명한 물리학자들이 대거 가담했다. 독일에는 그들 못지 않은 탁월한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오토 한이 있었다.
사제간 엇갈린 운명이 역사 뒤바꿔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독일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독일을 점령한 후 독일 원자폭탄 개발팀의 연구 자료를 손에 넣었다. 놀랍게도 연구 상황은 초보적인 데다가 모순투성이였다. 독일 개발팀은 원자폭탄의 ABC나 다름없는 우라늄의 핵분열 연쇄반응에도 이르지 못했다. 양자물리학에 대한 연구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연구치고는 모든 것이 너무도 엉성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팀의 팀장이었던 하이젠베르크는 종전 후 자신이 고의로 원자폭탄 개발 연구를 지연시켰다고 증언했다. 원자폭탄 개발팀을 주도한 것은 전장에 끌려갈 운명에 처한 독일 물리학자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으며 진정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할 생각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물리학이 무기 개발에 사용되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과연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폭탄 개발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증언대로 히틀러의 수중에 원자폭탄이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면서 시간을 끈 것인가. 이 부분은 지금껏 의문에 싸여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입자물리학의 세계에 철학적인 원리를 결합시킨 ‘불확정성의 원리’ 주창자로 동료 학자들 사이에서도 천재로 일컬어지던 인물이었다. 2차 대전 중 연합국 측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하이젠베르크를 암살할 밀사를 독일에 파견한 일까지 있었다. 반면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이며 192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덴마크의 닐스 보어는 미국으로 망명한 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사제간의 엇갈린 운명이 세계 역사를 바꾸어놓은 셈이다.
4월부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는 연극 ‘코펜하겐’이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상황, 영원히 풀리지 않을 ‘하이젠베르크의 수수께끼’를 무대 위에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극작가 마이클 프라이언이 쓴 이 희곡은 1941년 9월 하이젠베르크가 보어를 비밀리에 찾아왔던 코펜하겐에서의 하룻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모두 사망한 지금, 이들이 코펜하겐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보어는 원자폭탄의 제조 원리인 우라늄 동위원소의 핵분열에 대한 핵심적인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가 진정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려 했다면 이 부분을 묻기 위해서 보어를 찾아왔을 것이다. 또는 독일에 남아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해 달라고 스승을 설득하려 했을 수도 있다. 반대로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와 ‘독일이든 미국이든 원자폭탄만은 만들지 말자’는 모종의 밀약을 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연극은 이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린다.
종전 후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에게서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서 폭탄 제조를 위한 핵분열 이론을 알아내려 한 것일까, 아니면 독일의 원자폭탄 제조가 시간문제라는 것을 ‘경고’하려 한 것일까.
연극 시작에 앞서 3월27일 뉴욕에서 열린 “연극 ‘코펜하겐’의 제작 과정”이라는 심포지엄에서도 가장 뜨거운 화두는 하이젠베르크의 수수께끼였다. 토론에 나선 역사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여전히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카시디는 하이젠베르크의 증언이 실패한 연구를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맨해튼 프로젝트 참가자였던 물리학자 한스 베스와 존 휠러는 독일의 원자폭탄 연구 자료가 하이젠베르크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엉터리였다며 고의로 연구를 지연시켰다는 하이젠베르크의 증언을 믿는다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도 유태인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과학자적 양심에 따라 원자폭탄은 개발할 수 없었다’는 그의 주장은 진실일까. 그 주장의 진위를 따지기 전에 “정치가들이 더이상 과학을 무기 개발에 이용하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나는 항상 기도한다”는 하이젠베르크의 토로만은 진실에 가까운 듯싶다. 심포지엄에 참가한 물리학자 벤자민 베더슨 박사는 “연극 ‘코펜하겐’은 현대물리학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의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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