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의 실적에 대한 평가다.” 1월13일 단행된 개각에서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이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영전’하자 금감위 관계자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김대중정권 출범 이후 제시된 금융-기업-정부-노동 등 4대 부문 개혁 과제 가운데 이헌재장관이 금융-기업부문 개혁 과제를 맡아 그런 대로 무난하게 마무리지었기 때문에 그의 재경장관 발탁은 예정돼 있었다는 설명이다.
사실 이장관은 이번 개각을 앞두고 일찍부터 재경부 장관 0순위로 거론됐다. 이는 그가 김대중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이장관이 한국 구조개혁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돼 왔다는 점도 그의 발탁 요인으로 분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헌재위원장을 경제팀을 총괄하는 재경장관에 임명한 것은 김대통령이 그를 통해 구조 개혁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풀이했다. 이장관은 김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정부 조직개편을 통해 경제부총리가 부활되면 그대로 경제부총리를 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의 재벌 개혁은 이헌재장관이 김대중대통령당선자 시절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을 역임할 때 ‘입안’했던 틀 내에서 이뤄졌다. 98년 1월 당시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와 5대 그룹 총수간에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이후 기업구조개혁 추진 과정에 작용한 5대 원칙(기업 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 역량의 집중,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 강화) 역시 기획단장 시절 이헌재장관이 마련한 것.
이장관은 이때부터 김대중대통령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는 게 청와대나 금감위 관계자들의 설명. 김대중정부의 재벌 개혁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론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데 대해 김대중대통령이 높이 평가했다는 것.
김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이장관의 뛰어난 업무 능력에 주목했다고 한다. 오랜 동안 야당생활을 해온 김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측근 중 이장관만큼 경제지식이 해박하고 논리적인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또한 관료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참신함도 김대통령을 사로잡았다는 얘기다. 김대통령은 당시 이헌재기획단장을 두고 “저런 사람은 처음 본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또 “이장관이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힐망정 대통령에게는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깔끔한 일 처리 솜씨를 보여주며 모든 것을 공정하고도 투명하게 처리해 전혀 뒷말이 나지 않는 것 등을 높이 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장관의 엄정한 처신은 대우사태 처리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경기고 후배이며, 79년 재무부를 떠난 뒤 한때 대우그룹에 몸담기도 했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그를 김회장이 ‘거두어준’ 셈이다.
그러나 이장관은 ‘냉정했다’. 김대중정부 출범후 이장관은 대우그룹 구조조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김우중회장과 여러 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반드시 금감위 관계자를 대동하고 나갔다. 단 둘이 만났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헌재장관은 박태준총리의 든든한 후원을 받기도 했다. 박총리의 한 측근은 “2년 동안의 금융-기업 개혁 과정에 두 사람이 자주 만나면서 박총리가 이장관의 개혁 방향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 고 설명했다. 이 때문인지 작년 말 개각설이 나왔을 때 “총리가 될 박태준총재가 경제사령탑으로 이헌재위원장을 제청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원래 이장관을 김대중대통령에게 추천했던 사람은 자민련을 탈당, 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의원. 김대중대통령당선자 시절 김의원이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산하 기획단장에 이장관을 임명하면서 현 정권과 관계를 맺게 한 것.
그러나 한때 이장관이 이회창후보 쪽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여권 핵심인사 중에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이장관은 97년 대선 기간 중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 고문으로 이회창 후보를 위해 뛰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선거 일주일을 남겨두고 김용환의원의 권유로 DJP 캠프로 ‘도강’ (渡江)했다고 말한다.
이장관이 김대중정부의 ‘재벌 개혁 사령관’이라고 불린 것은 그가 맡았던 세 가지 직책 때문. 우선 98년 4월에 설립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뿐 아니라 금융감독위원회의 집행기구로 99년 1월 출범한 금융감독원 원장직도 겸임했다.
여기에 금융-기업 구조조정 전담기구인 구조개혁기획단 단장직까지 맡았다. 구조개혁기획단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98년 6월 발표한 55개 퇴출 기업, 5개 퇴출 금융기관 선정을 맡았던 곳으로 금융감독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조직. 이장관은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장악한 셈이었다.
일부에서는 이장관의 금융-기업 구조조정 추진 방식을 두고 ‘신관치’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불이 났는데, 소방수가 불구경만 할 수 없지 않느냐”며 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붕괴된 시장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이장관의 이런 입장에 시민단체도 지지를 보냈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장하성교수(고려대 경영학부)는 “이장관의 구조개혁 추진 방향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시장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장관의 시장 개입 논리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장관은 최근 워크아웃 대상 대우 계열사 경영진 선임 과정에서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작년 말 선임된 11개 계열사 중 정주호 대우차국내총괄대표, 남상국 ㈜대우 건설부문사장, 박성학 대우차판매 사장 등 무려 5개사의 대표이사가 기존 경영진인 데다 경기고 출신이었기 때문. 대우의 부실경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을 다시 경영진에 선임한 것은 이장관의 경기고 후배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금감위 구조개혁기획단 서근우 제2심의관은 “시민단체의 비판을 잘 알고 있지만 채권단이 대우 경영진으로 영입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선임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가령 대우자동차만 해도 몇 개월 안에 매각돼야 하는데 누가 이 회사 회장을 맡으려 하겠느냐는 이야기다.
김대중정부의 구조개혁 과정에서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임으로써 ‘DJ 정부의 스타 장관’으로 떠오른 이헌재장관. 그러나 그가 재경장관으로서 경제 관료들을 얼마나 잘 리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게 주변의 이야기다. 이런 평가는 그가 ‘경제 총수’로서 파워를 계속 행사하기 위해 시급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 이장관은 이번 개각을 앞두고 일찍부터 재경부 장관 0순위로 거론됐다. 이는 그가 김대중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이장관이 한국 구조개혁의 상징적인 존재로 부각돼 왔다는 점도 그의 발탁 요인으로 분석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헌재위원장을 경제팀을 총괄하는 재경장관에 임명한 것은 김대통령이 그를 통해 구조 개혁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풀이했다. 이장관은 김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밝힌 대로 정부 조직개편을 통해 경제부총리가 부활되면 그대로 경제부총리를 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김대중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 동안의 재벌 개혁은 이헌재장관이 김대중대통령당선자 시절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을 역임할 때 ‘입안’했던 틀 내에서 이뤄졌다. 98년 1월 당시 김대중대통령 당선자와 5대 그룹 총수간에 합의가 이뤄짐으로써 이후 기업구조개혁 추진 과정에 작용한 5대 원칙(기업 경영 투명성 제고, 상호 지급보증 해소, 재무구조 개선, 핵심 역량의 집중,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 강화) 역시 기획단장 시절 이헌재장관이 마련한 것.
이장관은 이때부터 김대중대통령의 눈에 들기 시작했다는 게 청와대나 금감위 관계자들의 설명. 김대중정부의 재벌 개혁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론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데 대해 김대중대통령이 높이 평가했다는 것.
김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이장관의 뛰어난 업무 능력에 주목했다고 한다. 오랜 동안 야당생활을 해온 김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측근 중 이장관만큼 경제지식이 해박하고 논리적인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 또한 관료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참신함도 김대통령을 사로잡았다는 얘기다. 김대통령은 당시 이헌재기획단장을 두고 “저런 사람은 처음 본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또 “이장관이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자기 손에 피를 묻힐망정 대통령에게는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깔끔한 일 처리 솜씨를 보여주며 모든 것을 공정하고도 투명하게 처리해 전혀 뒷말이 나지 않는 것 등을 높이 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장관의 엄정한 처신은 대우사태 처리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경기고 후배이며, 79년 재무부를 떠난 뒤 한때 대우그룹에 몸담기도 했다.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던 그를 김회장이 ‘거두어준’ 셈이다.
그러나 이장관은 ‘냉정했다’. 김대중정부 출범후 이장관은 대우그룹 구조조정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김우중회장과 여러 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그는 반드시 금감위 관계자를 대동하고 나갔다. 단 둘이 만났을 경우 생길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헌재장관은 박태준총리의 든든한 후원을 받기도 했다. 박총리의 한 측근은 “2년 동안의 금융-기업 개혁 과정에 두 사람이 자주 만나면서 박총리가 이장관의 개혁 방향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하게 됐다” 고 설명했다. 이 때문인지 작년 말 개각설이 나왔을 때 “총리가 될 박태준총재가 경제사령탑으로 이헌재위원장을 제청할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원래 이장관을 김대중대통령에게 추천했던 사람은 자민련을 탈당, 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의원. 김대중대통령당선자 시절 김의원이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았을 때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산하 기획단장에 이장관을 임명하면서 현 정권과 관계를 맺게 한 것.
그러나 한때 이장관이 이회창후보 쪽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여권 핵심인사 중에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이장관은 97년 대선 기간 중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 고문으로 이회창 후보를 위해 뛰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선거 일주일을 남겨두고 김용환의원의 권유로 DJP 캠프로 ‘도강’ (渡江)했다고 말한다.
이장관이 김대중정부의 ‘재벌 개혁 사령관’이라고 불린 것은 그가 맡았던 세 가지 직책 때문. 우선 98년 4월에 설립된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뿐 아니라 금융감독위원회의 집행기구로 99년 1월 출범한 금융감독원 원장직도 겸임했다.
여기에 금융-기업 구조조정 전담기구인 구조개혁기획단 단장직까지 맡았다. 구조개혁기획단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98년 6월 발표한 55개 퇴출 기업, 5개 퇴출 금융기관 선정을 맡았던 곳으로 금융감독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조직. 이장관은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장악한 셈이었다.
일부에서는 이장관의 금융-기업 구조조정 추진 방식을 두고 ‘신관치’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개의치 않고 “불이 났는데, 소방수가 불구경만 할 수 없지 않느냐”며 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붕괴된 시장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였다.
이장관의 이런 입장에 시민단체도 지지를 보냈다.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 장하성교수(고려대 경영학부)는 “이장관의 구조개혁 추진 방향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시장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장관의 시장 개입 논리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장관은 최근 워크아웃 대상 대우 계열사 경영진 선임 과정에서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작년 말 선임된 11개 계열사 중 정주호 대우차국내총괄대표, 남상국 ㈜대우 건설부문사장, 박성학 대우차판매 사장 등 무려 5개사의 대표이사가 기존 경영진인 데다 경기고 출신이었기 때문. 대우의 부실경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을 다시 경영진에 선임한 것은 이장관의 경기고 후배이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금감위 구조개혁기획단 서근우 제2심의관은 “시민단체의 비판을 잘 알고 있지만 채권단이 대우 경영진으로 영입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거절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을 선임했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가령 대우자동차만 해도 몇 개월 안에 매각돼야 하는데 누가 이 회사 회장을 맡으려 하겠느냐는 이야기다.
김대중정부의 구조개혁 과정에서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임으로써 ‘DJ 정부의 스타 장관’으로 떠오른 이헌재장관. 그러나 그가 재경장관으로서 경제 관료들을 얼마나 잘 리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게 주변의 이야기다. 이런 평가는 그가 ‘경제 총수’로서 파워를 계속 행사하기 위해 시급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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