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15일 아침, 베이징 외교무역부의 여자화장실 안. 미국의 무역협상단 대표가 휴대용 전화기로 워싱턴 백악관의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13년에 걸친 중국의 WTO 가입 협상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미-중 정상간의 극비 전화, 베이징 숙소의 미 협상단을 잠에서 깨운 주룽지 중국총리의 토요일 새벽 3시의 전화, 협상 테이블에서의 배짱과 구걸, 정치적 생명을 내건 두 강대국 지도자들의 대타협. 미-중간에 벌어진 중국의 WTO 가입 협상은 그 역사적 의의 못지 않게 두 강대국이 숨막히게 펼친 경제 협상의 한편의 대 드라마였다.
1986년 7월에 시작된 협상은 89년의 톈안문사태 등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으로 한가닥 가능성이 엿보이긴 했으나,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 협상보다는 북미자유무역 협정(NAFTA)에 더 신경을 썼고, 20년 넘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중인 중국 지도부도 권력 교체기의 국내 정치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13년을 끌어온 양국간 무역협상이 마침내 대타결의 실마리를 보인 것은 1999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지난 4월8일, 중국 주룽지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내게 총알 10발이 있다면, 9발로 부패한 관료들을 쏴죽이고 나머지 한발로 자살을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중국 경제개혁의 견인차 노릇을 자임한 사람이다. 워싱턴에 날아든 그의 안주머니에는 역사적 협상을 타결지을 만한 파격적인 조건이 들어 있었다. 중국에 진출할 미 전기통신 기업이 주식의 51%를 소유할 수 있다는, 중국으로서는 결정적인 양보안이었고, 중국은 일이 성사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중국의 미 핵기밀 절취 의혹으로 워싱턴 의회는 반중 분위기 일색이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고.
민주당의 한 로비스트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세 가지 기자회견문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행정부 내의 의견도 갈려 있었다는 얘기다. 협상책임자인 바셰프스키, 백악관의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새뮤얼 샌디 버거,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협상 타결파였던 반면, 백악관의 비서실장 존 포데스타와 클린턴의 경제보좌관 진 스펄링은 협상타결 반대의 입장, 즉 정치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이 어느 쪽에 가담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루빈은 결국 반대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주총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공개 석상에 섰을 때, 상원 원내총무인 공화당의 트렌 롯 의원은 “나쁜 시기의 나쁜 결정”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당뿐이 아니었다. 민주당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난색을 표했다. 당시 타결을 반대했던 한 고위관리는 “만약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주룽지 총리와 함께 협상안에 사인했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2주 정도 타결을 늦추어 정치적 파문을 감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더이상 물러날 여지가 없었다. 주총리는 마지막 기회라는 판단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미국의 가부간 대답을 재촉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공이 넘어왔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그였다. 그는 주총리에게 반문했다. “정말 지금 (타결을) 원한다면, 할 수도 있다. 나로서는 지금 하기가 어렵다. 정치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다. 그러나 정말 원한다면, 할 수도 있다. 정말 지금 사인하기를 원하는가?”
주룽지 총리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구걸하는 모습을 보일 의사는 없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과 주룽지 총리의 만남은 실패로 끝났다. 백악관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주룽지 총리가 제시했던 14쪽 분량의 협상조건을 공개했다. 중국에서는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협상안이었고, 이 협상안 공개는 주룽지 총리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반격의 빌미를 준 꼴이 됐던 것이다.
주총리는 워싱턴을 떠나 나머지 방미 일정에 들어갔다. 덴버와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가 방미 마지막 날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결정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4월13일 뉴욕의 주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협상을 재개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협상단을 주총리의 다음 방문지인 오타와로 보내겠다, 여의치 않다면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도 좋다고 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구걸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주총리는 베이징에 돌아갈 때까지는 대답을 할 수 없다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했고 미국을 떠났다. 백악관은 언론과 의회에 협상이 곧 재개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중국측을 달랬다. 그러나 미-중간 협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주총리가 베이징으로 돌아갔을 때, 미국의 정보기관은 주총리의 정치적 기반이 몹시 흔들리고 있으며, 중국 지도부 내에서 경제개혁파인 장쩌민 주석과 주총리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대중 협상을 담보로 국내 정치에서 살아남은 반면, 주총리의 정치 파워는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그리고 주룽지 총리가 미국을 떠난지 3주후인 5월7일, 벨그레이드의 중국대사관 폭파사건이 터졌다. 중국대사관 폭파에 이어 5월26일에는 중국의 핵기밀 유출을 기정 사실화하는 미 의회의 콕스 리포트가 나왔다. 미-중 관계는 얼어붙었다. 7월26일, 베이징에서 양국간 경제회담이 재개되긴 했으나 WTO문제는 여전히 동면 상태였다.
양국 협상 타결의 마지막 불꽃이 점화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장쩌민 주석에게 인편으로 비밀서한을 보내면서였다. 협상 재개를 제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은 침묵했다. 10월16일 클린턴 대통령은 장쩌민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최종 협상안을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장쩌민 주석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1월8일, 클린턴 대통령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바셰프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라는 장쩌민 주석의 대응이 있었다. “성과가 없을 것 같으면 갈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하는 클린턴 대통령의 반문에 장쩌민 대통령은 “협상단끼리 만나게 하자”고 대꾸했다. 좋은 징조였다. 중국 대사관 폭파 보상금 450만달러 지급(7월30일), 미 재무장관 서머스와 주룽지의 회동(10월24일), 양국간에 재개된 군사교류의 순조로운 진행(11월4일) 등이 양국 정상간의 전화 통화를 가능케 한 요인들이었다.
클린턴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의 극비 전화통화 직후, 미 협상단 바셰프스키 일행은 베이징으로 급파됐고, 엿새에 걸친 막판 협상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역시 협상은 난항이었다. 4월의 이른바 ‘주룽지 카드’가 이미 한번 제시됐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줄다리기는 서로 양쪽의 의중을 다 읽은 채 진행되는 셈이었고, 그 탓에 베이징 협상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협상타결 이틀 전인 11월12일 금요일 밤. 협상에 진척이 없자 바셰프스키가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당신들은 내 시간만 빼앗았다. 주룽지 총리를 만나게 해달라. 아니면, 내일 아침 공항으로 가겠다.” 바셰프스키의 협상전략은 주효했다.
토요일 새벽 3시10분. 주룽지 총리의 전화가 바셰프스키 일행의 잠을 깨웠다. 지도자들 거주지역인 중남해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몇시간 뒤 바셰프스키 일행은 중남해로 안내됐고, 주총리와 얼굴을 맞댔다. 주룽지 총리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겠다”면서 협상의 여지를 보였다. 그리고 48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셰프스키는 ‘공항행’ 협상전략을 두 번이나 더 써먹었고, 그 때마다 주총리가 나서서 협상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곤 했다. 미 협상단은 결국 사흘 동안 세번이나 짐을 꾸렸다가 다시 풀곤 했던 셈이다.
클린턴-장쩌민 ‘힘’얻는 계기로
11월14일 일요일 밤. 바셰프스키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결렬 가능성을 알리면서,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월요일 아침에 귀국하겠다고 보고했다. 끝까지 해보다가 안되면 돌아오라는 것이 클린턴의 지시였다.
월요일 아침, 마지막 협상을 하기 위해 바셰프스키 일행은 외교무역부로 향했다. 타결의 기대는 이미 물건너간 뒤였고, 형식적인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곳에는 주룽지 총리가 미리 와 2층에서 미 협상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체 외교무역부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주총리가 미리 와 있다는 사실은 뭔가 변화가 있음을 시사했다.
주총리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미 전기통신 회사의 50% 지분과 중국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법 15년 적용 조건이 제시됐다. 바셰프스키와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인 진 스펄링이 대답할 차례였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최종결심을 들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과 비밀스러운 통화를 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두 사람이 생각해낸 곳은 여자화장실. 바셰프스키와 함께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진 스펄링은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하는 내내 화장실 안을 서성거린 끝에 클린턴 대통령에게서 “예스”라는 최종 재가를 얻어냈고, 미-중간의 13년에 걸친 역사적 협상의 대단원은 베이징 외교무역부 여자 화장실 안에서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13억 최대 인구국 중국의 무역협상은 긴박하게 돌아간 협상전만큼 양측 모두 나름대로의 국내 조건이 산적해 있었다. 개혁개방의 방법론을 놓고 양분돼 있던 중국 지도부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대사관 폭파사건으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중국 포용정책을 추진중인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문화 차이도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제어기 노릇을 했고, 양국의 이해가 걸린 외교전략은 협상테이블에 찬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3명, 중국 지도자 2명이 장장 13년의 역사적인 협상을 이끌었다.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이 처음 미-중 수교를 논의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당시 지금의 WTO 협상의 주역인 클린턴 대통령은 대학생이었고, 주룽지 총리는 돼지농장으로 추방당했다가 복권이 되긴 했으나 힘없이 당 외곽을 맴돌던 처지였다. 양국간의 무역협상 타결로 임기말 권력 누수기의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중에 커다란 치적을 남기게 됐고, 경제개혁을 추진중인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는 다시 정치적 힘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100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동시에 수백만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 치열했던 양국 대표단의 협상전략과 긴박하게 돌아갔던 마지막 담판의 극적인 순간이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미-중 정상간의 극비 전화, 베이징 숙소의 미 협상단을 잠에서 깨운 주룽지 중국총리의 토요일 새벽 3시의 전화, 협상 테이블에서의 배짱과 구걸, 정치적 생명을 내건 두 강대국 지도자들의 대타협. 미-중간에 벌어진 중국의 WTO 가입 협상은 그 역사적 의의 못지 않게 두 강대국이 숨막히게 펼친 경제 협상의 한편의 대 드라마였다.
1986년 7월에 시작된 협상은 89년의 톈안문사태 등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으로 한가닥 가능성이 엿보이긴 했으나,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과의 무역 협상보다는 북미자유무역 협정(NAFTA)에 더 신경을 썼고, 20년 넘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중인 중국 지도부도 권력 교체기의 국내 정치에 우선순위를 두었다. 13년을 끌어온 양국간 무역협상이 마침내 대타결의 실마리를 보인 것은 1999년에 들어서면서였다.
지난 4월8일, 중국 주룽지 총리가 워싱턴을 방문했다. ‘내게 총알 10발이 있다면, 9발로 부패한 관료들을 쏴죽이고 나머지 한발로 자살을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중국 경제개혁의 견인차 노릇을 자임한 사람이다. 워싱턴에 날아든 그의 안주머니에는 역사적 협상을 타결지을 만한 파격적인 조건이 들어 있었다. 중국에 진출할 미 전기통신 기업이 주식의 51%를 소유할 수 있다는, 중국으로서는 결정적인 양보안이었고, 중국은 일이 성사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중국의 미 핵기밀 절취 의혹으로 워싱턴 의회는 반중 분위기 일색이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고.
민주당의 한 로비스트는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세 가지 기자회견문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만큼 행정부 내의 의견도 갈려 있었다는 얘기다. 협상책임자인 바셰프스키, 백악관의 국가안보담당 보좌관 새뮤얼 샌디 버거,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협상 타결파였던 반면, 백악관의 비서실장 존 포데스타와 클린턴의 경제보좌관 진 스펄링은 협상타결 반대의 입장, 즉 정치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이 어느 쪽에 가담하는지가 관건이었다. 루빈은 결국 반대편의 손을 들어주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주총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공개 석상에 섰을 때, 상원 원내총무인 공화당의 트렌 롯 의원은 “나쁜 시기의 나쁜 결정”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당뿐이 아니었다. 민주당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고 난색을 표했다. 당시 타결을 반대했던 한 고위관리는 “만약 워싱턴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주룽지 총리와 함께 협상안에 사인했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2주 정도 타결을 늦추어 정치적 파문을 감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더이상 물러날 여지가 없었다. 주총리는 마지막 기회라는 판단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미국의 가부간 대답을 재촉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공이 넘어왔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그였다. 그는 주총리에게 반문했다. “정말 지금 (타결을) 원한다면, 할 수도 있다. 나로서는 지금 하기가 어렵다. 정치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다. 그러나 정말 원한다면, 할 수도 있다. 정말 지금 사인하기를 원하는가?”
주룽지 총리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구걸하는 모습을 보일 의사는 없었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과 주룽지 총리의 만남은 실패로 끝났다. 백악관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주룽지 총리가 제시했던 14쪽 분량의 협상조건을 공개했다. 중국에서는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협상안이었고, 이 협상안 공개는 주룽지 총리를 궁지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국내 반대파들에게 반격의 빌미를 준 꼴이 됐던 것이다.
주총리는 워싱턴을 떠나 나머지 방미 일정에 들어갔다. 덴버와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가 방미 마지막 날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결정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고, 4월13일 뉴욕의 주총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협상을 재개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협상단을 주총리의 다음 방문지인 오타와로 보내겠다, 여의치 않다면 베이징에서 다시 만나도 좋다고 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구걸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주총리는 베이징에 돌아갈 때까지는 대답을 할 수 없다면서 클린턴 대통령의 제의를 거절했고 미국을 떠났다. 백악관은 언론과 의회에 협상이 곧 재개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중국측을 달랬다. 그러나 미-중간 협상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주총리가 베이징으로 돌아갔을 때, 미국의 정보기관은 주총리의 정치적 기반이 몹시 흔들리고 있으며, 중국 지도부 내에서 경제개혁파인 장쩌민 주석과 주총리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대중 협상을 담보로 국내 정치에서 살아남은 반면, 주총리의 정치 파워는 곤두박질쳤던 것이다. 그리고 주룽지 총리가 미국을 떠난지 3주후인 5월7일, 벨그레이드의 중국대사관 폭파사건이 터졌다. 중국대사관 폭파에 이어 5월26일에는 중국의 핵기밀 유출을 기정 사실화하는 미 의회의 콕스 리포트가 나왔다. 미-중 관계는 얼어붙었다. 7월26일, 베이징에서 양국간 경제회담이 재개되긴 했으나 WTO문제는 여전히 동면 상태였다.
양국 협상 타결의 마지막 불꽃이 점화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장쩌민 주석에게 인편으로 비밀서한을 보내면서였다. 협상 재개를 제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은 침묵했다. 10월16일 클린턴 대통령은 장쩌민 주석에게 전화를 걸어 ‘최종 협상안을 전달하겠다’고 했으나 장쩌민 주석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1월8일, 클린턴 대통령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바셰프스키를 베이징으로 보내라는 장쩌민 주석의 대응이 있었다. “성과가 없을 것 같으면 갈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하는 클린턴 대통령의 반문에 장쩌민 대통령은 “협상단끼리 만나게 하자”고 대꾸했다. 좋은 징조였다. 중국 대사관 폭파 보상금 450만달러 지급(7월30일), 미 재무장관 서머스와 주룽지의 회동(10월24일), 양국간에 재개된 군사교류의 순조로운 진행(11월4일) 등이 양국 정상간의 전화 통화를 가능케 한 요인들이었다.
클린턴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의 극비 전화통화 직후, 미 협상단 바셰프스키 일행은 베이징으로 급파됐고, 엿새에 걸친 막판 협상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역시 협상은 난항이었다. 4월의 이른바 ‘주룽지 카드’가 이미 한번 제시됐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줄다리기는 서로 양쪽의 의중을 다 읽은 채 진행되는 셈이었고, 그 탓에 베이징 협상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협상타결 이틀 전인 11월12일 금요일 밤. 협상에 진척이 없자 바셰프스키가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당신들은 내 시간만 빼앗았다. 주룽지 총리를 만나게 해달라. 아니면, 내일 아침 공항으로 가겠다.” 바셰프스키의 협상전략은 주효했다.
토요일 새벽 3시10분. 주룽지 총리의 전화가 바셰프스키 일행의 잠을 깨웠다. 지도자들 거주지역인 중남해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몇시간 뒤 바셰프스키 일행은 중남해로 안내됐고, 주총리와 얼굴을 맞댔다. 주룽지 총리는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주겠다”면서 협상의 여지를 보였다. 그리고 48시간이 흐르는 동안 바셰프스키는 ‘공항행’ 협상전략을 두 번이나 더 써먹었고, 그 때마다 주총리가 나서서 협상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곤 했다. 미 협상단은 결국 사흘 동안 세번이나 짐을 꾸렸다가 다시 풀곤 했던 셈이다.
클린턴-장쩌민 ‘힘’얻는 계기로
11월14일 일요일 밤. 바셰프스키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결렬 가능성을 알리면서, 극적인 변화가 없는 한 월요일 아침에 귀국하겠다고 보고했다. 끝까지 해보다가 안되면 돌아오라는 것이 클린턴의 지시였다.
월요일 아침, 마지막 협상을 하기 위해 바셰프스키 일행은 외교무역부로 향했다. 타결의 기대는 이미 물건너간 뒤였고, 형식적인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곳에는 주룽지 총리가 미리 와 2층에서 미 협상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좀체 외교무역부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주총리가 미리 와 있다는 사실은 뭔가 변화가 있음을 시사했다.
주총리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미 전기통신 회사의 50% 지분과 중국 수입품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법 15년 적용 조건이 제시됐다. 바셰프스키와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보좌관인 진 스펄링이 대답할 차례였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최종결심을 들어보아야 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과 비밀스러운 통화를 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두 사람이 생각해낸 곳은 여자화장실. 바셰프스키와 함께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진 스펄링은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하는 내내 화장실 안을 서성거린 끝에 클린턴 대통령에게서 “예스”라는 최종 재가를 얻어냈고, 미-중간의 13년에 걸친 역사적 협상의 대단원은 베이징 외교무역부 여자 화장실 안에서 그렇게 막을 내렸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13억 최대 인구국 중국의 무역협상은 긴박하게 돌아간 협상전만큼 양측 모두 나름대로의 국내 조건이 산적해 있었다. 개혁개방의 방법론을 놓고 양분돼 있던 중국 지도부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대사관 폭파사건으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중국 포용정책을 추진중인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의 거센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국내 정치뿐만 아니라 양국간의 문화 차이도 협상의 진전을 가로막는 제어기 노릇을 했고, 양국의 이해가 걸린 외교전략은 협상테이블에 찬바람을 불게 만들었다. 미국 대통령 3명, 중국 지도자 2명이 장장 13년의 역사적인 협상을 이끌었다.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이 처음 미-중 수교를 논의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당시 지금의 WTO 협상의 주역인 클린턴 대통령은 대학생이었고, 주룽지 총리는 돼지농장으로 추방당했다가 복권이 되긴 했으나 힘없이 당 외곽을 맴돌던 처지였다. 양국간의 무역협상 타결로 임기말 권력 누수기의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중에 커다란 치적을 남기게 됐고, 경제개혁을 추진중인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는 다시 정치적 힘을 얻게 되었다.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1000만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고 동시에 수백만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 치열했던 양국 대표단의 협상전략과 긴박하게 돌아갔던 마지막 담판의 극적인 순간이 새로운 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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