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컬렉션(왼쪽). 저스트 앵 끌루 컬렉션. [Paul Mc Lean © Cartier, © Cartier]
까르띠에 레드 박스. [Laziz Hamani © Cartier]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1910~1987)가 남긴 말이다. 그의 말대로 사랑의 선물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겐 표현을 해야 한다. 만약 사랑을 말이나 행동이 아닌 주얼리로 표현한다면? 2019년을 보내기 전 까르띠에의 ‘러브’를 소개하고 싶다.
까르띠에의 러브는 순금으로 만든 팔찌다. 손목에 끼운 다음 반드시 스크루 드라이버로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고정하는 게 특징이다. 연인들이 이 팔찌를 서로의 팔목에 채운다는 것은 십중팔구 ‘구속’을 의미할 테다. 구속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좋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자발적인 아름다운 구속 아닌가. 이 팔찌를 차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기꺼이 구속되겠다’는 ‘소중한 약속’을 의미한다.
172년의 사랑과 로맨스
1 러브 팔찌와 버튼 테일러 다이아몬드를 착용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2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처드가 버튼, 피터 오툴. 3 러브 팔찌를 착용한 알리 맥그로우와 스티브 맥퀸. 4 러브 팔찌를 착용한 여배우 코트니 이튼. [© Cartier, gettyimages, Paul Mc Lean © Cartier]
러브 팔찌와 까르띠에에서 쌍벽을 이루는 팔찌가 ‘저스트 앵 끌루’다. 못을 모티프로 해 만든 디자인으로, 최근 가장 핫한 컬렉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브와 저스트 앵 끌루는 오늘날 까르띠에 브랜드를 상징하는 ‘아이코닉 주얼리’ 컬렉션이 됐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유명한 연인들의 러브스토리, 혹은 사랑에 빠진 주변 커플들의 사랑 이야기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두 팔찌는 172년 까르띠에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1847년 루이 프랑스 까르띠에는 스승이던 아돌프 피카르의 아틀리에(Atelier·공방)를 인수한 뒤 자신의 성(姓)을 따 ‘메종 까르띠에’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이다.
메종 까르띠에는 루이 프랑스 까르띠에의 아들인 알프레드 까르띠에가 물려받은 이후 날로 번창했다. 알프레드는 첫째아들인 루이 까르띠에(루이)에게는 프랑스 본사의 관리를 맡겼다. 둘째아들 피에르 까르띠에(피에르)는 러시아의 유명 보석 세공사인 ‘칼 파베르제’가 있는 곳으로 보내 해외시장 진출을 추진하게 했다. 막내아들 자크 까르띠에(자크)는 영국으로 보내 뉴 버링턴가에 설립한 런던 지사의 경영을 맡겼다. 이때가 20세기 초반(1902)이었다.
세 아들 모두 까르띠에 성장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러브 팔찌는 둘째아들 피에르와 관련이 있다. 피에르는 러시아에서 익힌 경험을 토대로 1909년 미국 뉴욕 5번가에 지사를 설립했다. 세계 최강 대국으로 성장하던 미국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계기였다.
마침내 1917년 뉴욕 맨션이 메종 까르띠에로 바뀌었다. 피에르는 메종 까르띠에 5층에 최첨단 워크숍도 마련했다. 미국에서 점점 독보적인 명성을 쌓아가던 메종 까르띠에에 1937년 두 명의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1937년 미국 작곡가 어빙 벌린이 부인 엘린을 위해 최고급 에메랄드 및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주문했고, 같은 해 시리얼로 유명한 포스트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 마저리 메리웨더 포스트도 다이아몬드 및 사파이어 빕 네클리스 같은 최고급 주얼리의 제조를 의뢰했다. 두 개의 작업을 지시하고 제작 과정을 감독하고자 파리에 거주하던 까르띠에의 숙련된 장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러한 작업을 거치며 까르띠에는 미국에서 ‘주얼러’로 명성을 더욱 확고히 굳히게 됐다.
러브 팔찌
[© Cartier]
이듬해 까르띠에 뉴욕 아틀리에에서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Aldo Cipullo)가 독특한 러브 모델을 발표했다. 남녀 모두 착용할 수 있는 유니섹스 러브 브레이슬릿(팔찌)이었다. 무엇보다 팔찌를 낀 다음 특수 제작한 스크루 드라이버를 이용해 팔목에서 빠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착용 방법이 특징적이었다.
이 팔찌는 중세 기사가 십자군전쟁을 떠나기 전 아내에게 정조대를 매달았다는 데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평생 동안 연인의 팔목을 휘감는 팔찌라니. 하지만 작은 전용 드라이버로 나사를 죄는 획기적인 콘셉트는 큰 인기 상품이 됐다. 스크루는 연인 간 소중한 감정을 봉인하고, 결합시키며, 맹세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는데, 당시 주얼리 소비층은 이런 발상에 격하게 공감했다. 당시에는 단순한 주얼리 이상의 혁신적인 존재라는 평도 들었다.
무엇보다 영국 윈저 공작부인과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알리 맥그로, 줄리 앤드루스 등이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이 큰 힘이 됐다. 결과적으로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었다. 수많은 연인이 서로의 팔목에 러브 팔찌를 채워줌으로써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
[gettyimages]
그는 너트형 커프 링크스(셔츠의 커프스를 고정하는 장신구), 나사형 필박스 같은 공구(工具)의 세계에서 착안한 컬렉션도 내놓았다. 1970년대 반(反)순응적인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공구 컬렉션은 치풀로가 1974년 까르띠에를 떠날 때까지 계속 제작됐고, 그와 까르띠에는 승승장구했다. 1971년 11월 3일 ‘뉴욕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스크루를 이용해 손목에 고정시키는 러브 브레이슬릿에 이어 이번에는 18캐럿 골드 소재의 네일 형태 커프 링크스를 선보인다. 착용하기 쉬운 주얼리라는 콘셉트에 매우 적합하다. 셔츠나 폴로셔츠에 착용할 것.’
저스트 앵 끌루
[Nils Herrmann, Cartier Collection © Cartier | © Cartier | Marian Gerard, Cartier Collection © Cartier]
1970년대 네일 브레이슬릿이 저스트 앵 끌루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게 2012년이다. 1970년대 러브 브레이슬릿에서 2012년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에 이르기까지 까르띠에의 컬렉션은 진화를 거듭했다.
러브 컬렉션은 클래식한 모델부터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화려한 버전, 그리고 네클리스와 이어링 등 다양한 스타일로 구성돼 있다. 반항적인 아우라가 그대로 표현된, 손목과 목선을 장식하는 브레이슬릿과 네클리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기존 모델보다 얇은 두께로, 합리적 가격대의 신제품이 저스트 앵 끌루 라인업에 추가했다. 시계와도 스타일리시하게 매치가 가능하며, 한 개의 팔찌에 다른 소재나 크기의 팔찌를 더하는 등 다양한 스타일링을 연출할 수 있다.
2012년 러브 브레이슬릿과 저스트 앵 끌루는 4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의미 있는 만남을 최초로 가졌다. 그해 까르띠에는 저스트 앵 끌루를 쇼윈도에 진열하면서 ‘70년대 까르띠에와 알도 치풀로의 조우(Cartier and Aldo Cipullo, New York City in the 70’s)’라는 전시를 뉴욕에서 개최했다.
러브 팔찌는 올해 정확히 50년을 맞는다. 저스트 앵 끌루는 2012년 갓 태어난 아기였으며, 지금은 일곱 살배기다. 하지만 둘 모두 시간을 뛰어넘어 까르띠에의 전설적인 아이코닉 주얼리 컬렉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러브 브레이슬릿과 저스트 앵 끌루는 옷이나 그날의 활동에 맞춰 선택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주얼리를 몸에 걸치는 방식에 혁명을 가져다 줬다. 또한 아버지가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다. 43세 터울의 사랑받는 형제인 셈이다.
러브와 저스트 앵 끌루 컬렉션은 까르띠에 공식 웹사이트, 메종 청담 및 전국 백화점과 면세점에 입점해 있는 부티크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