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한 국내 행사에 참석한 고(故) 천경자 화백(왼쪽)과 큰딸 이혜선 씨.
10월 2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한 찻집에서 기자와 마주 앉아 5시간 넘게 어머니(고(故) 천경자 화백·향년 91세) 이야기를 쏟아낸 큰딸 이혜선(70·섬유디자이너) 씨는 기자의 사진 촬영 요청을 끝내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 사진 대신 “가장 예쁜 엄마 사진과 대표작(그림)들을 게재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2003년 천 화백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12년 넘게 병간호를 해온 이씨가 겪은 ‘험한 일’ 중 하나가 천 화백의 생사 확인 문제를 둘러싼 마음고생이었다.
이씨가 기자에게 최초로 사망증명서를 공개하면서 천 화백의 생사 여부 논란, 사망 은폐 미스터리 등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씨의 동생들이 10월 27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혜선 씨는 유족 대표가 아니다. 어머니 유해를 어디에 모셨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법적 대응책을 찾겠다”고 밝히면서 새로운 논란과 미스터리가 증폭하고 있다. 이씨의 동생들과 일부 미디어는 천 화백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줬던 ‘미인도 위작 사건’을 다시 꺼내 들었고, 미술계는 천 화백의 미공개 유작이 얼마나 되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있다.
기자는 10월 26일 이후에도 이씨를 몇 차례 더 만났다. 그리고 10여 차례 이상 전화통화를 했다. 이 기간 이씨는 “어떤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도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너무 많이 속았고 뒤통수도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씨는 기자를 이렇게 불렀다)도 아직 100% 신뢰하지 못한다. 이런 말하는 나한테 섭섭한 감정이 있을지 모르지만 내 처지가 그렇다. 이해하시라”고 말하곤 했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기자는 물론 섭섭했다. 하지만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세상에 대한 그의 불신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게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망 은폐하는 패륜아로 몰려
천경자 화백이 생전 당시 딸 이혜선 씨와 함께 머물렀던 미국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
“한국의 한 TV 드라마를 보다 ‘내가 늙은 여류화가 그림이 있는데, 그 화가가 죽지를 않네’라는 대사를 우연히 들었는데 ‘아, 우리 엄마 얘기가 저런 식으로 드라마 소재까지 되는구나’라고 느껴져 서글펐습니다.”
천 화백 사망설이 언론에 간간히 보도되긴 했으나 가장 크게 점화된 것은 ‘대한민국예술원이 정식회원인 천 화백에게 지급하는 월 180만 원 수당을 2014년 2월부터 잠정 중단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6월쯤이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천 화백 본인의 수당 수령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이유를 밝혔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된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최고 영예로 꼽힌다. 보통 해당 경력 30년 이상으로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원로예술인이 후보가 되고, 총회에서 예술원 회원들이 투표해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회원이 될 수 있다. 전체 정원은 100명이고, 이 중 천 화백이 속한 미술 분야 정원은 25명이다. 기존 회원이 작고하거나 결원이 생겼을 때만 새 회원을 충원한다.
이씨는 “예술원 측이 엄마의 공식 의료기록 등을 요청한다는 얘기를 남동생(이남훈 씨)을 통해 전해 들었다. (나는) 자식들이 ‘우리 엄마 이렇게 많이 아픕니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자랑할 일 있느냐며 화를 냈다. 그 돈(수당) 안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엄마는 뇌출혈로 쓰러져 누워 계셨지만 내가 이런 사실을 하나하나 보고하듯 다 말씀드렸다. ‘엄마, 예술원 회원 탈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하니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하셨다”고 전했다. 결국 이씨는 ‘천 화백의 수당 수령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해달라’는 예술원 측 요청에 응하지 않고, 그 대신 회원 사퇴서를 냈다. 이 사퇴서는 ‘천 화백 의지인지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리되지 않았다.
“엄마가 맞아야 하는 주사 중에는 대당 1000달러(약 113만 원)가 넘는 것도 있었습니다. 엄마와 내가 왜 ‘주사 2대 값도 안 되는 돈(180만 원) 때문에 그런 수모와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너무 서글프고 화가 났습니다.”
이씨는 “이 파문이 있고 얼마 뒤 뉴욕 주재 총영사관 관계자가 직접 집으로 찾아왔더라. 이 관계자와 (초인종 음성시스템으로) 대화했는데 ‘뉴욕시에 천 화백 사망신고가 접수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확인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래서 “내가 ‘그럼 됐지. 왜 집까지 왔느냐’고 물으니 생존 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를 내린 서울(중앙부처)에서 ‘네 눈으로 직접 살아 있는 모습을 본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왔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7월 한 경매에서 8억6000만 원에 낙찰된 고(故) 천경자 화백의 작품 ‘막은 내리고’.
대한민국예술원은 10월 22일 천 화백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며 “지난해 2월부터 천 화백이 숨진 올 8월까지 월 180만 원씩 19개월 치 3420만 원의 예술원 수당과 장례비 보조금 100만 원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이씨는 “그 돈 정말 받기 싫다. 그래서 최근 한국 갔을 때 그 수당이 지급돼온 통장의 해지 신청부터 했다”고 말했다. 이어 “뉴욕에서 엄마 장례비용만 1만 달러(약 1130만 원)가 넘게 들었다. 장례비 보조금 100만 원 던져주고 ‘천 화백 장례식 치르는데 예술원 돈도 들어갔다’고 하려는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이씨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크고도 깊어서 아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들 회견엔 ‘엄마 천경자’가 없다”
이씨를 제외한 천 화백 유족들은 10월 27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차녀 김정희 씨(미국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칼리지 미술과 교수)는 “뉴욕 집에 주치의와 의료인이 많이 드나들었다. 4월에 어머니를 봤지만 이후엔 못 봤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해 11, 12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언니(이씨)에게서 들었을 때도 뉴욕으로 가서 어머니를 봤다”고 했다.
이 발언 이후 기자가 만난 뉴욕 문화계 인사들은 “천 화백 사망설 때문에 이씨가 대한민국예술원 및 일부 언론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일 당시(지난해 6월) 김씨 등 동생들이 ‘엄마가 살아계신 건 분명하다. 언니(이씨) 말이 맞다’고 공개적으로 한마디만 해줬으면 사망설 논란이 이렇게 반복적으로, 오래 계속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김씨는 회견에서 “언니는 이해할 수 없는 인격과 행동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고 했지만 제삼자들은 김씨 등 동생들의 침묵이나 ‘무관심’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셈이다.
이씨는 “동생들이 ‘왜 엄마의 사망 소식을 바로 알리지 않고 장례식도 혼자 치렀느냐’고 따지고 있다”는 기자 말에 “엄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바로 알렸으면 그런 식의 기자회견을 하는 날짜가 두 달 정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것 말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기자회견 내용을 전해 듣고는 ‘아, 동생들이 엄마를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말했다.
특히 ‘서울시 측에 추모식 개최를, 정부 측에 금관문화훈장 추서를 요구한 것’에 대해 이씨는 “엄마는 이미 받은 은관문화훈장도 어디 뒀는지 모를 정도로 그런 일엔 큰 관심이 없었다. 화려한 추모식이나 훈장 같은 건 엄마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엄마에겐 자신의 그림이 전부이고, 그 그림을 대중이 감상하고 사랑해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회견 중에 동생들이 ‘엄마는 국민을 사랑하셨다’는 식의 표현을 썼다던데, 그건 정치인이 쓰는 표현 아니냐. 엄마는 그냥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서울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들이 그런 요구를 한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미술계 취재 경력이 전무한 기자는 천경자라는 이름은 알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거의 모른다. ‘미인도’ 위작 논란도 천 화백 사망 이후 관심을 갖게 됐다.
10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덕수궁길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화백에 대한 추도식이 열렸다.
“일부 언론은 ‘이제라도 천 화백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좋은 취지로 미인도 기사를 다루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도와 달리 엄마도 저도 미인도 얘기가 다시 나오는 걸 전혀 원치 않습니다. 화가가 ‘이 그림은 내가 그린 게 아니다’라고 한 사안입니다. 무엇을 더 밝힐 게 있습니까. 오히려 선생님(기자)처럼 미술을 잘 모르는 대중 사이에 계속 ‘저 그림이 천 화백 것인가’라는 오해만 생기게 합니다. 미인도 얘기는 제발 그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인도’에 대한 대표적 오해가 ‘천 화백이 그린 진짜 미인도가 있고, 논란이 된 가짜 미인도가 따로 있다’는 것이라고 이씨는 전했다. 뉴욕 미술계에서 수십 년간 활동한 이씨는 한때 뉴욕 유명 미술관과 세계적 감정기관을 찾아가 “이 미인도 논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한결같은 대답은 “화가가 살아 있을 땐 그림 감정을 할 필요가 없다. 화가가 ‘내 작품 아니다’ 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 화가가 세상을 떠나고 없을 때 비로소 제삼자인 감정가가 나서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이씨가 천 화백을 다룬 방송이나 신문에 가장 많이 항의한 내용도 ‘제발 그 가짜 미인도를 화면이나 지면에 소개하지 말라. 그러면 대중은 그 그림이 천 화백 것이라고 계속 오해한다’는 것이었다. 기자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다.
1991년 인터뷰 당시 촬영된 천경자 화백의 생전 모습.
미술계에선 천 화백의 유작 규모에 대해 ‘100점설’ ‘300점설’ 등이 떠돌아다닌다. 존재도 확인되지 않은 그림들의 가치가 계속 치솟고 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엄마는 자신의 그림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팔아서 시중에 떠돌아다니게 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책임 있는 공공기관에서 맡아 한군데 모아서 대중이 마음껏 감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 남은 과제는 엄마의 그 희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전남 고흥군에 기증했다 (내가) 반환받은 엄마 작품 66점에 대해서도 온갖 근거 없는 추측과 소문이 나돌았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이씨는 “엄마 그림을 너무 아마추어적으로 관리해서 그림이 많이 상했다. 전시된 그림을 볼 때마다 ‘제가 너무 아파요’라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반환 요청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술계 일각에선 ‘이씨가 이 그림을 고가에 시장에 내다 팔았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씨는 “그 그림 66점은 그대로 다 있다. 너무 상해서 다시 전시할 수도 없다. 미술학도들이 엄마 작품을 연구하는 리서치용으로는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8월 천 화백의 유해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해 천 화백의 대표작 93점이 전시된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았다. 혼자 유해를 안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장거리비행을 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엄마가 그 그림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저는 무척이나 잘 압니다. 그래서 그 그림들이 제대로 전시돼 있지 않거나 소홀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이 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도 ‘그림이 잘 있느냐’며 불안한 마음을 늘 갖고 있었습니다.”
천 화백으로선 ‘난 이렇게 세상을 떠나지만 내 그림들은 대중과 함께 잘 호흡하게 해달라’는 마지막 압력 시위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