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2

..

칠산정에 올라 시름을 내쉰다

평온을 찾아 떠나는 전남 영광

  •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입력2009-11-18 15:1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칠산정에 올라 시름을 내쉰다

    <B>1</B> 칠산정에서 내려다본 백수해안도로.

    달력을 들춰보니 남은 것은 겨우 한 장. ‘아,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난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르륵 흘러간다.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돌아보니 빨간 신호등 앞에 신호대기로 서 있던 시간들만 떠오른다. 아우토반 위의 스포츠카처럼 달리겠다던 연초의 계획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답답해진 마음을 풀어보려고 가방을 둘러멨다. 그리고 전라남도 영광으로 향했다. 백수해안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다 보면 먹먹한 가슴이 시원해지겠지 싶었다. 불갑사에 들러 도깨비기와에 인사도 하고, 매번 그냥 지나치던 영산성지도 찾아가리라.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길, 백수해안도로

    뭔가 응어리지고 풀리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생각나는 곳이 영광의 백수해안도로다. 이 도로는 내겐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드라이브 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치유의 길이라고나 할까. 백수해안도로는 영광 백수읍 백암리 석구미 마을에서 대신리를 거쳐 원불교 성지가 있는 길용리까지 이어지는 길. 전체 길이는 16.5km에 이른다. 왼쪽의 해안절벽, 오른쪽의 넓은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멋진 바위들까지… 빼고 붙일 것 없이 멋진 풍경화 한 폭이 연출된다.

    이곳에 오면 해안도로를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는 칠산정과 백암전망대, 얼마 전 문을 연 노을전시관, 영화 ‘마파도’ 촬영장을 차례로 찾는다. 그중에서도 발걸음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칠산정이다. 바다에 옹기종기 떠 있는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사산도, 오산도, 육산도, 칠산도 일곱 섬에서 이름을 딴 이곳에 서면, 나고 드는 차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 늠름하게 선 절벽과 절벽을 때리는 파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수해안도로는 드라이브도 유명하지만, 바다를 가깝게 볼 수 있는 칠산정에서 노을전망대까지 약 3km 구간을 걷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길을 걷다 보면 고민스러운 순간을 만나게 된다. 건강 365계단과 칠산전망대가 나오는데, 전자는 내려가야 나오고 후자는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중 건강 365계단은 길이 바다까지 이어져 특별한 느낌을 준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라, 계속 가다 보면 용왕님이 기다리지 않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하게 된다. 물론 칠산전망대는 전망대 나름의 맛이 있다. 하나만 고르기 힘든 시간, 선택은 각자에게 맡긴다.

    마라난타의 삶이 내게 말을 걸다

    영광에 갔다면 한 번쯤 들르는 곳이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와 불갑사다. 백제는 고구려에 이어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384년 침류왕 원년 불교가 들어온 곳이 바로 영광이다. 그래서 영광에는 불교 유적지가 풍부하다.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法聖浦)도 백제에 불교를 전하러 온 성인 마라난타가 뱃머리를 댄 포구라는 뜻에서 이름 붙은 곳이다.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는 입구부터 범상치 않다. 마라난타가 전한 불교와 불교예술을 기반으로 만든 곳이라 인도의 향이 깔려 있다. 들어가면 대승불교 문화의 발원지이기도 한 인도 간다라(현재 파키스탄)의 불교 조각양식과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곳이 나타난다.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를 여유롭게 돌아보고 간 곳은 마라난타가 창건한 불갑사다. 얼마 전 찾았을 때 불갑사는 꽃무릇 세상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번잡하기도 했다. 절은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 조용한 불갑사가 더 마음에 다가왔다.

    불갑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꽃창살이 정교한 대웅전과 절 뒤를 감싼 참식나무 군락이다. 보물 제830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형식으로 지어졌다. 연화문과 국화문, 소슬빗살무늬로 처리된 꽃창살 덕분에 대웅전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불갑사의 또 다른 볼거리는 용마루 위에 있는 도깨비 얼굴 모양의 기와다. 언제, 누가, 왜 저렇게 지었는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근엄한 절 위에 앉은 도깨비기와에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칠산정에 올라 시름을 내쉰다

    <B>2</B>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불갑사. <B>3</B>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산성지 들어가는 길. <B>4</B> 영산성지.

    소박한 아름다움, 영산성지

    영광에 불교 유적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불교의 소태산 대종사와 관련된 영산성지도 있다. 영산성지는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태어나 도를 깨친 원불교의 발상지다. 원불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종교 중 하나. 그런 원불교의 창립 정신이 녹아 있는 곳으로, 작은 원불교 세상이 펼쳐졌다.

    영산성지로 들어가는 가로수 길은 ‘세상에, 여기 이런 길이 있었어?’라고 놀랄 만큼 아름답다. 푸른 가로수가 아담한 터널을 이루는 그 길을 지나가면 뭔가 다른 세상이 나타날 듯한 기대감이 든다. 영산성지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태어난 집, 그가 깨달음을 얻은 곳, 원불교와 관련된 교육기관들이 소박하게 펼쳐져 있다. 공부를 해서 덕을 쌓는 방 ‘적공실’, 영원히 사랑한다는 ‘영모전’. 이름도 건물만큼이나 정갈하다. 검소하고 소박한 원불교 특유의 문화가 피부로 다가왔다.

    가로수 터널을 다시 통과해 정관평(貞觀坪)으로 향했다. 정관평은 바닷물을 막아 만든 논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는 8명의 제자와 ‘버려진 곳을 개척해 국가 사회의 생산에 도움이 되자’는 취지로 논을 일구기 시작해 2만6000평의 농토를 일궈냈다. 한 종교의 교주가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언뜻 그려지지 않았다. 개화기 선구자이기도 한 소태산 대종사는 이렇듯 물질의 중요성을 인정한 정신적 지도자였기에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칠산정에 올라 시름을 내쉰다

    <B>5</B> 한적한 법성포구. <B>6</B>‘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의 이름이 붙은‘굴비(屈非)’.

    비겁하지 않은 생선, 굴비

    영광을 말할 때, 이 얘기를 안 꺼내면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는 것 같다. 바로 굴비. 법성포에 가면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굴비거리가 있다. 영광에 여행을 다녀오면 꼭 배와 손이 두둑해진다. 굴비정식으로 혀를 호강시켜주고 그때 그 맛을 추억하고자 굴비 두름을 들고 올라오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조운이 쇠퇴하고 토사 유입으로 수심이 얕아져 조기 잡기가 쉽지 않아졌다고는 하지만, 영광굴비는 여전히 이름만으로도 아우라가 넘쳐흐른다. 왜 그렇게 영광굴비가 유명한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영광의 굴비 건조방식에 있다. 굴비는 썩히지 않고 말리는 것이 중요한데, 법성포는 지리적인 여건상 건조가 잘되고 맛있는 굴비를 만들기에 적합한 습도와 기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일염으로 염장하는 제조 방식이 더해져 전국 최고의 굴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굴비’라는 이름에도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있다. 고려 인종 때 법성포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에 반해 이를 임금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아부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 된 도리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굴비(屈非)’로 이름 지었다는 것.

    굴비의 유래를 듣고 나니, 상에 올라온 굴비가 좀더 특별해 보였다. 백수해안도로에서 머리를 쓸어올리며 열심히 분위기를 잡던 게 몇 시간 전인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굴비를 먹고는 어느새 함박웃음을 짓다니. 이래서 마음이 울적하면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볼 일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