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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명품 시계’ 요지경

욕망에 울고 뇌물에 떨고

‘명품 시계’ 요지경

‘명품 시계’ 요지경

1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의 청와대 기념 시계. 1개의 가격은 3만2000원 선이다. 2 노무현 대통령의 시계 뒷면.

9월 터진 이국철 SLS그룹 회장의 정치권 금품 로비 사건이 연일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11월 17일 구속된 이 회장은 비장의 카드인 비망록을 공개하며 새로운 파장을 일으켰다. 총 5권으로 알려진 비망록 중 이번에 1권을 공개했다. 이 비망록에는 이 회장이 수억 원의 금품을 정관계 인사에게 건넨 사실뿐 아니라, 정권 실세의 보좌관에게 ‘명품 시계’를 건넨 사실도 포함돼 있다.

11월 22일까지만 해도 비망록에 소개된 시계는 500만 원대 까르띠에 시계뿐이었다. 이 회장은 2009년 회사 워크아웃을 피하기 위한 로비 과정에서 렌터카 업체 대영로직스 대표 문모 씨에게 현금 7억8000만 원과 함께 수백만 원대의 명품 시계를 건넸다. 이 시계는 여당 실세 의원의 보좌관 박모 씨에게 건너갔는데 검찰이 수사를 진행 중이던 최근에야 돌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념시계 선물은 관습

이 회장의 시계 로비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는 처음엔 여당 실세 의원 보좌관으로만 언급되더니, 결국 실세 의원이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이라는 실명이 거론되기에 이르렀고, 온갖 추측만 난무하던 시계 정체에 대해서도 500만 원대의 까르띠에로 밝혀졌다.

11월 28일 한 인터넷 매체가 공개한 또 다른 비망록 ‘이국철 비망록 - 검찰 편’에 따르면, 이 회장이 검찰 고위인사 5명에게 금품 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도 어김없이 돈과 함께 명품 시계를 건넨 사실이 적혀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이 회장은 “신세계 백화점에서 구입한 명품 시계 4개를 검찰 로비 명목으로 문모 씨에게 건넸다. 문모 씨는 1000만 원대 시계 1개, 200만~500만 원대 시계 2개 등 까르띠에와 오메가 시계를 검찰 측 고위인사와 정권 실세 측근에게 전한다며 가져갔다”고 한다. 이 비망록에는 뇌물로 건넨 시계 모양도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 회장의 연이은 폭로와 관련해 “비망록 내용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가 있으면 살펴볼 수 있지만, 비망록 자체만으로 수사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명품 시계’ 요지경

이국철 SLS그룹 회장 기자회견(10월 14일).

이 회장이 수억 원의 돈과 함께 여러 개의 명품 시계를 로비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일련의 뉴스를 접하면서 문득 ‘왜 시계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시계는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다. 처음 발명됐을 때부터 시계는 왕족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상적인 물건이 된 것은 3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1970~80년대 기계식 시계가 아닌 건전지로 작동하는 쿼츠 무브먼트가 발명된 이후 스틸 소재로 된 쿼츠 무브먼트의 저가 시계를 스위스가 아닌, 한국과 일본에서 본격 생산하면서 시계는 비로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 됐다.

한국에서 시계가 아무리 흔해졌다고 해도 3공화국이나 5공화국 시절 일명 ‘청와대 시계’는 그 자체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스위스에서 하청받아 OEM으로 시계를 만들던 오리엔트, 로만손 등에서 제작한 청와대 시계는 금도금을 한 값비싼 전자시계인데다, 대통령 이름과 함께 봉황이 그려져 있어 더 값져 보였다. 더구나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을 직접 ‘알현’했다는 증거기에 ‘롤렉스 금통 시계’만큼이나 자부심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취임 때마다 자기 이름을 새긴 청와대 기념 시계를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선물로 나눠줬다. 청와대뿐이 아니다. 국무총리실, 국회, 도청, 심지어 기업들도 기념 시계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 회장이 마련한 시계를 문모 씨로부터 전해 받은 박 보좌관도 이렇게 말했다.

‘명품 시계’ 요지경

바쉐론 콘스탄틴 ‘1972 그랜드캠버’. 비대칭의 사각형 베젤이 특징으로, 베젤에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버전이다. 엘리게이터 스트랩.

“얘기가 끝나고 부담 갖지 말라며 회사 기념품이라고 상자를 놓고 갔다. 화려한 붉은색 포장으로 된 작은 상자였고, 회사 판촉용 정도로 생각했는데 열어보니 여성용 시계더라. 고가로 보여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다음 날 국회로 오라고 해서 돌려줬다.”

최근 명품 시계 로비 사건에 대해 한 시계 전문가는 “한국의 경우 청와대에 방문해도 시계를 주고, 회사 기념행사에서도 시계를 준다. 그래서 시계를 선물로 받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나 죄책감이 없다”면서 “최근 명품 시계가 인기라, 명품 시계는 받는 사람은 부담 없이 받을 수 있고 주는 사람 역시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어 로비 수단으로 시계를 주로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명품 시계에 얽힌 정치권 로비 스캔들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1억 원대 보석 시계, 2007년 김현미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 제기한 김윤옥 여사의 명품 시계 의혹 등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것이 바로 명품 시계 관련 뉴스다. 정치인과 연관된 시계 사건에는 몇 개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건넨 명품 시계가 대표적이다.

밝혀지지 않은 봉하의 피아제 시계

‘명품 시계’ 요지경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9월 2일 구리시 인창동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을 방문해 강계화 씨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손목에 차주었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던 검찰은 2009년 4월 22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2006년 9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갑을 앞두고 명품 시계 2개를 선물했다. 그 손목시계는 ‘스위스 P사 명품 시계’고 보석이 박혀 있어 개당 1억 원에 판매된다. 국내에 5~6개밖에 없는 명품 중 명품으로 박연차는 노 대통령으로부터 ‘고맙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진술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이 받은 P사는 피아제’라고 보도했다. 이 뉴스는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피아제는 스위스 명품 시계 가운데 최고가로 꼽히는 브랜드로 무브먼트에서부터 케이스, 보석 세팅 등 시계를 구성하는 전 부품을 브랜드 자체 공장에서 직접 제작하고 조립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피아제 시계의 평균 가격은 수천만 원으로, 특히 노 전 대통령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계에는 케이스에서부터 베젤(시계 테두리), 브레이슬릿(금속 줄)까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세팅돼 있어 그 가격이 억대에 이른다.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0일 대검중수부에 출두해 “집사람이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작년 박연차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집 근처 논두렁에 버렸다. 왜 버렸는지는 집사람에게 물어봐라”라고 대답했다. 이날의 검찰 수사기록이 언론으로 흘러 들어갔고, 뉴스를 접한 네티즌은 “금속탐지기를 가지고 봉하마을에 가서 시계를 찾아내자”는 글까지 올리며 노 전 대통령을 조롱했다.

‘명품 시계’ 요지경

1974년 모범원호대상자에게 시계를 선물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12월 해병청룡부대를 방문해 한 해병으로부터 팔각모를 선물 받고 답례로 손목시계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시계에 대한 노 전 대통령 측의 주장은 검찰이나 박 전 회장의 주장과 달랐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선물받은 경위는 박 전 회장이 시계를 대통령의 형 건평 씨에게 줬고, 노씨가 한참 후에 권 여사에게 전달한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언론보도를 보고야 알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회장은 줬지만, 노 전 대통령은 받는 적 없는 2억 원대 명품 시계 스캔들. 자신의 친인척과 관련한 각종 금품 로비 사건을 비롯해 억대 명품 시계 사건이 터진 며칠 후, 노 전 대통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피아제 시계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저 언덕 너머에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피아제 시계 사건처럼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유명한 시계 스캔들로는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터진 이명박 후보의 부인 김윤옥 여사의 명품 시계 사건이다. 당시 김 여사는 1000만 원 상당의 에르메스 버킨백을 들었다는 이유로 한 차례 곤혹을 치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품 시계 의혹을 받았다. 김현미 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이 이 후보의 넥타이를 고쳐 매주는 김 여사의 사진을 제시하면서 김여사의 시계가 1500만 원을 호가하는 스위스 명품 시계 ‘프랭크뮬러’라고 주장한 것. 김 대변인은 “국내 백화점 명품관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제품이다. 외국에서 들여왔다면 관세를 납부했는지 답하라”며 맹비난했다.

프랭크뮬러는 최근 수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끈 스위스 명품 시계로, 천재적인 시계 제작자 프랭크뮬러가 직접 만든 브랜드다. 독특한 문자판 디자인으로 멀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개성 강한 스타일이 특징이다. 김 대변인이 김 여사의 시계를 프랭크뮬러라고 주장한 것도 이 같은 독특한 시계 디자인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김 대변인의 주장에 “대통합민주신당이 1500만 원짜리로 둔갑시킨 시계는 국산 로만손 시계”라며 즉각 진화에 나섰고, 며칠 후 나경원 한나랑 대변인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이 후보 부인의 시계는 국산 ‘로만손 통일 시계’라며 확대 사진을 공개했다.

한나라당은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며 대통합민주신당을 상대로 10억 원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당시 로만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김 여사가 찬 시계는 2005년 8월 개성공단 입주를 기념해 제작한 한정판 시계로 가격은 7만 원대다.

오랜 법정 공방 끝에 2심 재판부는 “시계 매장 직원이 김 대변인 측에게 김 여사가 찬 시계가 프랭크뮬러인지 확인해준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김씨가 다른 점포에서 더 확인해보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볼 때 프랭크뮬러 시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자들에게 브리핑한 점이 충분히 인정된다”며 1심 무죄 판결을 뒤엎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김 여사는 김 전 대변인을 상대로 냈던 ‘고가 명품 시계’ 관련 민사 소송을 2008년 6월 취하했지만, 법원이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형사상 책임을 물은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2009년 김 전 대변인에게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일단락됐다.

김윤옥 여사가 찬 시계는?

‘명품 시계’ 요지경

1 8월 24일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을 방문 중인 김윤옥 여사가 수도 타슈켄트의 국립은행 미술관에서 고려인 화가 이스크라 신씨로부터 그림을 선물받고 있다. 2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미국을 국빈방문한 김윤옥 여사는 미셸 오바마 여사의 초청으로 10월 13일 오전 버지니아 주 애넌데일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준 사람은 있지만 받은 사람은 없는 수많은 시계 로비 사건과 1000만 원대의 명품 시계를 찼다고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대한민국 정치판을 보면서 아무렇지 않게 블랑팡을 차고 다니는 푸틴 러시아 총리와 파텍필립을 차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떠올랐다.

유독 명품 시계 얘기만 나오면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 언론과 네티즌 탓인지 이 대통령은 취임 후 거의 ‘청와대 시계’만 차거나 시계를 거의 노출하지 않았다. 재래시장을 방문해 여러 번 시계를 풀어줬는데 이때도 모두 청와대 시계였다. 자기 이름이 새겨진 청와대 시계를 즐겨 차는 대통령을 보면서 뇌물과 선물의 차이를 새삼 깨닫게 된다.

김 여사도 한동안 통일 시계인 로만손 시계 혹은 청와대 시계를 찼으나, 10월 미국 방문 당시에는 조금 다른 디자인에 시계를 찬 모습이 목격됐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개성 강한 스타일이다. 베젤에 보석이 세팅된 검정색 새틴 버전이다. 미셸 오마바와 다정하게 껴안는 사진 속 김 여사의 시계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김 여사는 올해 8월 중앙아시아 순방 때도 눈에 띄는 디자인의 시계를 찼다. 타원형의 다이얼 모양과 라운드형 브레이슬릿 디자인이다.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대 시계를 뇌물로 받은 정치인의 이야기와 함께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를 찬 영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쩌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재력에 맞게 소비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푸틴이나 사르코지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다만 연일 명품 시계 로비 사건이 새로운 소식을 쏟아내는 요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뇌물로 시계를 받는 사람뿐 아니라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 고가의 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차는 공직자는 국민의 비난 대상이 돼야 마땅하다.



주간동아 2011.12.05 815호 (p50~53)

  • 이은경 패션칼럼니스트 veditor@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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