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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기호의 ‘笑笑한 일상’

내가 머리칼만 풍성했다면 구준표 무릎 꿇렸다

  • 이기호 antigiho@hanmail.net

내가 머리칼만 풍성했다면 구준표 무릎 꿇렸다

내가 머리칼만 풍성했다면 구준표 무릎 꿇렸다
요 근래 아침마다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머리를 감을 때 우수수, 매생이국처럼 하수구 구멍을 막아버리는 머리카락 때문이다. 내가 무슨 해조류나 녹조류도 아닌데, 이게 왜 이리 많이 빠지나, 거울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플라스틱 빗으로 이리저리 가르마를 달리해보고, 헤어드라이어로 정수리의 머리칼을 앞으로 쓸어내려보기도 하지만(거참,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안쓰러워진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 없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것. 이제 나 또한 수백만 탈모 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런 처지가 돼버린 것이다.

“그래도 너는 결혼도 했고 직장도 있는데, 머리카락 좀 빠지면 어때?”

일전에 만난 친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10년째 고시공부를 하는 친구는, 나보다 일찍 탈모가 진행돼 이제는 어디가 이마이고 어디가 정수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시공부 10년 동안 얻은 것은 가계부채이고, 잃은 것은 머리카락과 가족의 신뢰라고 씁쓸하게 말한 친구는 아직 미혼이다. 몇 번인가 나도 아내에게 그 친구의 맞선 자리를 부탁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늘 한 가지였다.

“글쎄, 요즘은 맞선 보기 전에 사진을 먼저 본다는데…. 꼭 삼촌 같아서… 포토샵을 할 수도 없고.”

결혼도 하고 직장도 있다지만, 나 또한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내 이마를 힐끔거릴 땐, 뭔가 계속 찜찜한 기분이 되었다. 아내의 친구들과 동석하는 자리나 후배들 만나는 자리는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내 머리칼을 보고 뭐라 한마디 한 적은 없었다. 모두 내가 스스로 위축됐기 때문이다.



‘말은 안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를 안타깝게 생각할 거야. 그래, 너도 곧 지네딘 지단이 되겠구나, 헤딩은 잘하겠네, 돌아가면서 그렇게 말들을 주고받을지 몰라.’

나는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그러면서 또 한번, 세상 모든 탈모증 환자들이 품는 오해 ‘아아, 나도 머리칼만 풍성했다면 구준표 따위는 무릎 아래 뒀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니 떨어지는 머리칼이 더 원망스러웠고, 연좌제처럼 대를 이어 인물을 망치는 유전자가 한탄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신문에 끼여 날아온 전단지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유명한(권위 있는 대학에서 수차례 임상실험한) 헤어클리닉숍이 문을 연다는 광고지였다. 오픈 기념으로 무료 두피관리 1회와 함께, 방문 고객 모두에게 두피진단을 해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전단지를 신문보다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나, 여기 가보는 게 어떨까?”

아내는 전단지를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돌려 아이의 속옷을 꿰매며 말했다.

“당신, 요즘 이상하다. 애인이라도 생겼나봐?”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스레 발끈한 것은 나였다. 내가 지금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냐, 매일매일 칼퇴근해서 아이 씻기고 함께 방귀대장 뿡뿡이 노래 부르는 거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럼 내 애인이 뿡뿡이란 말이냐,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런 나를 아내는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다 너하고 아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좀더 이성적으로 아내를 설득시키려 노력했다. 내가 머리카락 때문에 의기소침해 있으면 직장생활도 엉망이 될 게 뻔하다, 아이 학부형 회의도 못 나가게 될 것이다, 아이 친구들이 정말 너희 아빠 맞느냐, 할아버지 아니냐 물어보면 우리 아이가 얼마나 큰 충격과 고통에 시달리겠느냐, 자기 또한 언제 대머리가 될지 모른다고, 그럴 바엔 아예 불량 청소년이 되는 게 낫겠다고 마음먹을지 모른다, 운운…. 나는 제법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당신 마음대로 해. 아이고, 거기서 더 빠지면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협박하겠네.”

아쉽고 속상하지만 가족 위해 대머리가 되는 기쁨

그렇게 해서 나는 다음 주, 전단지를 들고(그게 있어야 무료관리 1회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신장개업한 헤어클리닉숍을 찾아갔다. 찾아가긴 찾아갔지만…. 나는 무료관리도 두피진단도 받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사람들이 불친절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시설은 호텔 로비처럼 깔끔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3개월 관리비용이 200만원이라는데, 그만한 액수를 머리칼에 투자한다는 것이 양심상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아마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닐 수 없을 것이고, 아내는 장기주택저축을 해약해야 할 것이다. 아빠의 머리카락 때문에 자신이 어린이집을 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아, 그냥 가출해버리지 않을까? 나는 머리카락보다 못한 자식이었구나, 탄식하면서). 무료관리 1회는, 회원으로 등록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서비스였다. 그러니 그냥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전문용어로 ‘낚인’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시무룩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아내가 다가왔다.

“거, 자꾸 공짜 좋아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아내는 슬쩍슬쩍 웃으면서 말했다.

“난 당신 머리 빠지니까 더 좋던데…. 그 나이 같고 말이야.”

“위로하지 마. 나 지금 그럴 기분 아니야.”

나는 등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위로가 아니고… 그냥 그게 더 열심히 산 거 같잖아. 고생도 한 거 같고.”

“그게 위로라고…. 그럼 머리카락 많은 너는 곱게 자란 거냐?”

나는 계속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에이, 남자하고 여자하고 같나? 난 뭐 진짜 좋거든. 이제야말로 내 남편이 된 거 같고 말이야.”

아내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이건 뭐 자동적으로 타인 지향에서 내부 지향으로 된 거 아니야? 타인 지향이 얼마나 피곤한 건데….”

아내는 정말 기분이 좋은지 휘파람까지 불어가면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욱’하는 심정으로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너, 방심하지 마라. 특이한 거 좋아하는 여자도 많다. 취향은 다 다르다고.”

나는 ‘욱’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그래그래, 그러면 되지 뭐. 아유, 대머리 좋아하는 여자도 많지.”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깔깔 웃어댔다. 아내의 그 웃음은 뭐랄까, 정말이지 나를 내부 지향으로 만들어가는, 편안하고 적나라한 웃음처럼 여겨졌다. 그냥 한번 웃고 마는 것, 아내의 장기주택저축을 지켜주는 것, 계속 방귀대장 뿡뿡이의 연인이 되는 것. 그것과 머리칼을 바꾼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클클,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참, 한편으론 아쉽고 속상하기만 하니, 이래저래 나이 드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주간동아 2009.03.31 679호 (p78~79)

이기호 antigi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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