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4

2005.05.10

“깜짝쇼만 잘하는 한심한 총리”

日 고이즈미 집권 5년째 지식인들 혹평 … “주위 보지 못하는 ‘사고 결핍’ 전후 최악”

  • 도쿄=조헌주 동아일보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5-05-03 18: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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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지, 정치판이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4월2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만 4년의 집권을 넘어 5년째에 접어든 날, 일본 언론계의 한 정치담당 기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속 계보 없이 ‘한 마리 외로운 늑대’처럼 자민당 내를 떠돌던 고이즈미는 “자민당을 부숴놓겠다”는 자극적인 말로 개혁 의지를 피력하며 자민당 총재 선거에 승리하고 이어 총리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정치평론가들은 고이즈미의 승승장구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전후 일본 총리 가운데 재임 기간이 역대 5위에 드는 ‘장수 총리’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중의원 해산 등의 이변이 없는 한 자민당 총재 임기인 2006년 9월까지 계속 집권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그는 역대 3위의 장수 총리가 된다.

    벌써 재임 기간 역대 5위 ‘장수 총리’

    “외교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고이즈미는 그동안 해놓은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땅한 후임자가 없는 일본 정치판이 한심하기도 하고….”



    이 언론계 인사는 고이즈미에 대해 “장수에 성공한 점 이외에는 별 게 없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자신은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그는 4월26일 저녁 신축 총리 관저로 이사하기 직전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임기 5년째를 맞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지난 4년간 드디어 안팎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성공, 우정사업 민영화를 실현하기 직전 에 있다. 앞으로도 개혁에 매진해 일본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고이즈미는 4년 동안 개혁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남은 기간도 그럴 것이다.

    사실 개혁 구호는 요란했다. 하지만 실제 이뤄진 개혁이라고는 도로공단의 민영화, 낙하산 인사로 유명한 특수법인의 부분적 운영 개선에 불과하다. 일본 여론이 고이즈미를 높게 평가한 부분은 이 같은 개혁 조치가 아니다. ‘깜짝쇼’ 식의 두 차례 방북 등인 것이다. 여론이란 내용보다는 구호를 좋아하는 법이다. 일본의 경우 국민들의 정치 무관심 현상이 크기에 고이즈미의 ‘개혁 연출극’은 더욱 잘 먹혀 들어왔다.

    4년 전 발족 당시 고이즈미 총리 내각에 대한 지지도는 84%(아사히신문 조사)에 이를 만큼 폭발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자민당, 정부, 나아가 일본 사회를 죄다 바꿔놓을 것 같은 고이즈미의 저돌적인 태도에 일본 열도가 난리법석이었다. 자민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지지 정당이 없는 무당파, 심지어 야당인 민주당 지지자들까지도 고이즈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4년 세월은 고이즈미를 냉정하게 평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우정사업 민영화 법안 처리 매달려

    아사히신문이 4월에 한 여론조사 결과, 고이즈미 총리에 대해 ‘4년 전엔 기대했지만 지금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실망감을 피력한 사람이 53%에 이르렀다. 그는 아직 40%의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지만, 이 지지도의 배경에는 정치 혼란을 꺼리는 일본인들의 심리가 깔려 있다. 고이즈미가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임기 때까지 총리를 계속 맡기를 바라는 여론은 60%에 달한다. ‘실망했다’는 사람 가운데서 절반 이상이 집권을 계속 바라고 있다. 중의원 해산, 자민당 총재 선거, 총리 교체 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질 경우 가뜩이나 기진맥진해 있는 경제가 파국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고이즈미에 대한 혹평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보다 국제 정세와 사회 변화를 모색해온 학계·언론계 등 지식인 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이런 한심한 총리가 일본 대표선수라니 부끄럽다. 머리가 나쁘기로 소문난 모리 총리보다 더 심하다. 주위를 보지 못하는 전후 최악의 총리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직업인이 관료다. 그런데 일본의 관료 한 사람에게서 최근 이런 ‘속시원한’ 말을 들었다. ‘그래도 일본 관료 사회에서도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다.

    한국 등 주변국은 고이즈미의 내정 개혁보다 역시 외교 측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4년간 고이즈미 외교는 일관된 친미정책 외엔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두 차례의 방북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물꼬가 트이나 싶었지만 인기몰이 차원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낙착됐다. 강력한 추진력이나 철학이 없다 보니 납북자 문제가 발생하자 북-일 외교는 전면 멈춰 선 상태다. 최근 자민당 내 기류는 대북 강경파에 압도돼 내년 9월 퇴진 때까지 획기적인 대북관계 개선의 조짐을 예상하기 힘든 형편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연례화 등으로 한-일 관계도 외견상 크게 개선될 것 같았지만, 이는 김대중 정권 시기 일본 문화개방과 월드컵 공동개최 영향으로 일어난 일본의 한류 바람을 탄 허상일 뿐이었다. 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기 대일 외교 기조를 안이하게 설정했다, 결국 올 들어 독도 및 역사 교과서 문제 등을 계기로 고이즈미 정부가 역대 어느 정권보다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일 외교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고이즈미가 총리 취임 뒤 강행한 네 번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제 침략의 피해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한국엔 묵과하기 힘든 파렴치한 행위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의 주된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을 계기로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평화헌법’의 개정·개헌을 통한 군대 보유와 방위청의 국방성 승격 등의 심상찮은 움직임은 주변국이 우려할 사안이기는 하나 내정 간섭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 일은 침략 역사를 온통 긍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고이즈미는 우정사업 민영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것을 집권 5년을 맞아 첫 번째 승부처로 보고 있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결과 고이즈미 총리가 우정사업 민영화를 최대 현안으로 꼽는 데 대해, 여론조사 응답자 중 44%가 ‘의미 있다’고 평가한 반면 40%는 ‘별 의미가 없다’고 답변했다.

    이처럼 일반인이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우정사업 민영화에 고이즈미 총리가 매달리는 데는 정치적 계산이 있다. 자민당 내에 계보를 갖지 않은 채 모리파(派)의 엄호로 당 총재에 오른 그는, 집권 당시 최대 파벌이었으며 아직도 건재한 하시모토파 기반이 우정사업 분야라는 점 때문에 집요하게 이를 추진하는 것이다. 깜짝쇼에 능한지라 돌파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당내 반발이 워낙 거세기 때문에 당 내분, 조기 퇴진을 가져오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앞뒤를 재지 못하는 고이즈미의 ‘선천적 사고 결핍증’은 4년간 일본 외교의 한계를 드러냈고, 주변국에는 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점이 내정에서는 도리어 서민적 감각을 발휘하며 예상 밖의 ‘장수 총리’가 되게 한 묘약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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