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9

2005.04.05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현실과 허구 뒤섞어 탁월한 인물 묘사 … 철학적 팬터지 선구자 ‘포스트모던’ 이끌어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5-04-01 12: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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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보르헤스의 단편 ‘신의 글’의 한 장면 같은 피라네시의 동판화. 돌로 된 감옥, 두 손이 묶인 수인 등이 묘사돼 있다.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다. 대부분의 소설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소설의 팬터지는 철학적 팬터지에 견줄 게 못 된다. 버클리는 세계가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말했고,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 머릿속의 현상이라고 보았으며, 헤겔은 우주 전체가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이보다 더 큰 규모의 팬터지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 팬터지는 제 자신이 ‘허구’가 아니라 ‘실재’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멀리하는 내가 그나마 읽는 책들의 저자는 카프카와 조이스, 보르헤스 정도. 이들 외에 철학적 상상력을 능가하는 작가가 또 있는가. 이중 조이스는 내 이해력의 한계 너머에 있고, 카프카는 아직 꼼꼼하게 읽을 시간이 없었다. 만만한 것은 역시 보르헤스. 그의 소설은 대중에게 쉽게 읽힌다. 그러면서도 그 철학적, 문헌학적 깊이로 젠체하는 전문가들까지 간단히 압도해버린다. 한마디로 대중과 엘리트 모두를 만족시키는 이중 코드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도서관의 미로

    꽃이나 과일, 채소로 인물의 초상을 그린 이탈리아 마니에리스모(르네상스 양식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유행한 미술양식)의 화가 아르침볼도. 그의 작품 가운데 ‘도서관 사서’라는 그림이 있다. 서가의 책들로 인물의 얼굴을 만들어낸 것인데,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도서관을 세계로 알고 살았던 보르헤스를 떠올린다. 시립도서관 사서였던 보르헤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는 1946년 페론의 좌익 정권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로 사직당했다가 55년 페론 실각 후 국립도서관 사서로 복귀한다. 당시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과 맺은 우호관계는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다시 도서관 사서 일을 맡았을 즈음 그는 거의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시력을 잃어도 독서열은 남았다. 맹인이 된 그에게 날마다 책을 읽어준 이는 ‘독서의 역사’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 64년 어느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그는 손님으로 들른 보르헤스의 제안으로 매일 저녁 그의 집에 찾아가 책을 읽어주곤 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보르헤스와 같은 이름의 맹인수사가 등장한다. 육각형 미로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희극편을 불태운 호르헤 수사. 그의 모델이 된 것이 바로 보르헤스다.



    상상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해리포터’의 주술적 상상력, ‘반지의 제왕’의 신화적 상상력, ‘걸리버 여행기’의 지리적 상상력, 루이스 캐럴의 논리적 상상력, 그리고 쥘 베른의 과학적 상상력.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탠다면 보르헤스의 철학적 상상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보르헤스의 철학적 팬터지는 도서관에서 무르익은 것이다. 눈먼 사서에게 도서관은 곧 세계였고, 그 세계는 입구와 출구가 없는 미로였다. 개가식 도서관에서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책 속의 미로를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다 보면 누구나 보르헤스와 비슷한 상상을 하게 된다. 내 경우도 그랬다.

    바벨의 도서관

    어느 도서관에서 어떤 도서관을 꿈꾸었다. 과거에 쓰여졌고, 지금 쓰여지고 있고, 미래에 쓰여질 모든 책이 소장된 그런 도서관. 예컨대 한글의 자음은 복자음을 합해 23, 모음은 복모음을 합해 20. 그럼 원고지 한 칸에 들어갈 글자의 경우의 수는 초성(23)×중성(20)×종성(23)=10580. 원고지 한 장이 200칸이므로, 그 안에 들어갈 텍스트는 모두 10580200가지. 책 한 권을 원고지 1000장 분량으로 잡으면, 그것으로 쓸 수 있는 책의 가짓수는 (10580200)1000. 엄청난 숫자다.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마술적 사실주의를 선보이는 피라네시의 판화 작품.

    하지만 제아무리 커도 어차피 유한수 아닌가? 이렇게 앞으로 쓰여질 책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물론 그 책들의 대부분은 문법이 엉망일 테고, 문법이 맞아도 대부분 의미가 통하지 않을 것이며, 의미가 통해도 대개 시시한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또한 중요한 발견, 고귀한 생각, 탁월한 발상을 담은 텍스트도 끼여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다. 책을 쓴다는 것은 결국 이 도서관에서 바로 그런 책들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아닐까.

    이 상상의 도서관을 나는 ‘형이상학적 도서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런 도서관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 모양이 언젠가 본 안젤름 키퍼의 작품을 닮았을 것이라 상상했다. 쇳조각으로 만든 책이 꽂힌 거대한 서가의 모습. 이렇게 시각적 이미지까지 확보해놓고 그 팬터지를 글로 옮기던 중, 이미 똑같은 상상을 해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게 바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이 체험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보르헤스를 알게 되었다.

    마술적 사실주의

    보르헤스를 읽으면 데자뷔(d럍?vu·실제로는 체험한 일이 없는 현재의 상황을 전에 체험한 것처럼 똑똑히 느끼는 현상)를경험하게 된다. 이 장면, 어디서 봤더라? 이탈리아의 건축가 피라네시의 동판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보르헤스가 피라네시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신의 글’에서 주인공 치나칸이 갇힌 감옥은 피라네시의 ‘감옥’ 연작을 꼭 빼닮았다. 추측은 맞았다.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러 갔던 망구엘의 회상이다.

    “그 거실에서, 로마의 원형의 폐허를 조각한 피라네시의 작품 아래서 나는 키플링… 하이네의 시들을 읽었다.”

    피라네시야말로 보르헤스에서 마르케스로 이어지는 중남미 ‘마술적 사실주의’의 근원이 아니었을까. 마술적 사실주의에 속하는 작품은 종종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다. 피라네시의 동판화를 보라. 3차원의 공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라. 뭔가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 에셔의 그림처럼 교묘한 시각적 트릭을 이용해 ‘있을 수 없는’ 공간을 마치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저 공간이야말로 마술적 사실이 아니겠는가.

    보르헤스도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다. 그의 방법은 가짜 인용. 그가 소설에 인용하는 텍스트들에는 실존하는 저자의 것과 가짜 저자들의 것이 섞여 있다. 진짜 인용과 가짜 인용을 뒤섞음으로써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 안다 하는 전문가들도 그의 소설에 인용된 저자들이 실존인물인지, 가공의 저자인지 알아내는 데 애를 먹는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도 종종 이 기법을 써먹곤 하는데, 이는 물론 보르헤스의 영향일 것이다.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영화 ‘매트릭스’는 보르헤스의 ‘원형의 페허’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다.

    원형의 폐허

    ‘원형의 폐허’라는 단편이 있다. 불의 신을 모시는 한 도인이 신의 도움으로 꿈을 빚어 아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 불의 신의 도움으로 태어나서 그런지, 몸이 불에 타지 않는 것. 아이가 다 자라자, 도인은 아들을 폐허로 변한 어느 신전에 사제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지나는 이들에게서 우연히 저 아래 어느 사원에 몸이 불에 타지 않는 도인이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도인은 불면의 밤을 보낸다. 아들이 불에 타지 않는 몸을 보며 탄생의 비밀을 알아내지 않을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민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도인이 살던 그 신전이 불길에 휩싸인다. 몸을 피할까 생각도 했지만 삶에 지친 도인은 그냥 불길에 제 몸을 맡기기로 한다. 마침내 불길이 그의 몸을 덮쳤을 때, 도인은 뜨겁게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문득 제 몸이 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 ‘식스 센스’의 극적 반전을 연상케 하는 결말이다.

    이 소설과 영화 ‘매트릭스’를 비교해보라. 시놉시스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형의 폐허’에서 도인은 저 자신도 꿈으로 빚어진 가상임을 깨닫게 된다. 가상세계에서 동료 인간들을 구하려는 네오. ‘매트릭스’ 2편에서 그는 저 자신의 행위마저 실은 미리 프로그램된 가상임을 깨닫게 된다. 그가 구하려는 시온은 이미 여섯 번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기적으로 불에 타서 폐허가 되는 원형의 신전을 그대로 닮았다.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던’이 보르헤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소설에 흐르는 시간은 기독교의 구원사관, 그것이 세속화한 근대의 직선사관이 아니다. 그것은 외려 무한히 돌고 도는 불교적인 윤회의 시간,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동일자의 영겁회귀의 시간이다. 이것이 탈근대의 세계감정을 특징짓는다. ‘케네디를 추모하며’라는 짧은 글에서 그는 이 젊은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을 명상한다.

    “이 총탄은 오래된 것이다. 1897년 아레돈도라고 하는 몬테비디오 출신의 한 청년이 우루과이 대통령을 향해 쏘았던 바로 그 총탄이다. …30년 전 한 배우의 범죄적 또는 마술적인 작업에 의해 발사된 같은 총탄이 링컨을 죽였다. …전에 총탄은 다른 물건이었다. …그것은 구세주의 몸을 관통했던 칙칙한 못과 십자가의 목재들이었고 …어느 날 소크라테스가 마셨던 잔잔한 독배였다.”

    근대 철학에서는 인식을 ‘자연의 거울’에 비유했다. 인식이란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우리의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가려놓은 거울’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은 매우 상징적이다. 보르헤스는 거울 앞에서 커다란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거대한 철제 서가에 쇳조각으로 만든 책이 꽂혀 있는 안젤름 키퍼의 작품.

    “어렸을 적부터 거대한 거울 앞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기괴한 현실의 복제 또는 증식의 공포에 대해 알고 있었다. 내가 계속해서 하느님과 천사에게 했던 기도들 중에는 거울의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들어 있었다. …다른 때에는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나 거울 속에서 달리 변형돼버린 내 얼굴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그저 ‘판타지’ 소설로 읽는 것도 물론 정당한 하나의 독서법이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소설에 깔린 형이상학적 사유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아찔함을 체험해야 한다. 그의 소설이 일으키는 철학적 현기증은 ‘포스트모던’이라는 낯선 사유방식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이기도 하다.



    Tips 1.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술적 사실로 대중을 사로잡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시인·소설가. 실험적이고 독특한 발상의 작품들을 남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로 불리며 움베르토 에코 등 현대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불한당들의 세계사’ ‘픽션들’ ‘칼잡이들의 이야기’ 등 그의 대표작들이 여럿 번역돼 있다.

    Tips 2.지오바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이탈리아의 건축가·판화가. 로마 건축물과 그 주변을 묘사한 대형 판화 작품을 남겨 고전 고고학의 성장과 신고전주의 미술 운동에 기여했다. 동판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을 반복해 새기는 방식의 독창적인 판화 기법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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