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2

2005.02.08

“한평생 자기희생의 삶나에겐 언제나 완벽한 분”

시인/ 교수 이성복

  • 대구=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5-02-03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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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평생 자기희생의 삶나에겐 언제나 완벽한 분”
    시인 이성복 교수(계명대 문예창작과)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집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인 유기체를 이루고 있으며, 치밀한 계획 하에 잘 계산되고 제어된 풍경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해 여름의 끝’ 등 지금도 꾸준하게 읽히는 그의 시집들은 장인이 빚은 작품처럼 완결성을 갖췄다. 이성복은 스스로를 ‘1등을 하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사람’ ‘완벽한 글이 아니라면 내 이름표를 달아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 있잖아요. 선두에 서지 않으면 불편해하는 사람. 제가 그래요. 근데 다행인 건 밖으로 드러내며 딴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음성치질처럼 안으로 끙끙대는 편이란 거죠.(웃음) 이건 제게 성장의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가로막는 벽이기도 했어요. 이런 성격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거예요.”

    이 교수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완벽한 사람이었다. 학교는 문턱조차 넘어본 적 없는 어머니는 열여덟 살 나이에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월급쟁이에게 시집왔다. 그러나 2남3녀를 낳아 기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자존심 세고 지기 싫어하며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 교수가 대여섯 살 무렵, 아버지가 병을 앓아 집안이 흔들릴 정도였으나 어머니는 꿋꿋하게 외풍을 막아내며 자식들을 챙겼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도 다섯 남매를 모두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성공해야겠다’는 욕심에 서울 유학을 가겠다며 울며 보채는 이 교수를 말없이 지원해준 이도 어머니였다.

    “가난한 살림 꾸리며 5남매 뒷바라지 … 내 작품의 단골 손님”

    “5학년 때 서울 성신여자고등학교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했어요. 서울 아이들의 새하얀 교복 칼라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어떻게든 1등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에서 삯바느질하며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해서라도 장원 못 하면 고향에 못 내려간다’는 ‘앵벌이’식 산문을 써서 억지로 장원했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표정 변화 없이 ‘잘했다’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올해 여든아홉이 된 그의 어머니는 거동은 불편해도 기억력은 이 교수보다 정확할 정도로 정신력이 대단하다. 어머니는 대학에 간 손녀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는 “연애 안 해보면 시집도 못 간다”는 말로 손녀딸을 꾹꾹 찔러 결국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기억력이 가물가물한 여든일곱의 아버지를 홀로 수발하는 어머니 소원은 남편보다 먼저 세상 떠나지 않는 것. 이 교수는 “아버지는 어머니 기억 위에 사시는 분”이라 말한다.

    이 교수의 작품에는 어머니가 자주 등장한다. 30대의 젊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언젠가 닥칠 어머니와의 이별은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런 일이었다. 그 고통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을까, 젊은 아들은 그런 고민을 했다.

    그러나 이제 쉰을 넘긴 아들은 어머니를 생로병사의 인생 과정에 선 하나의 생명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루고 머물다 파괴되고 텅 비는 것이 인생의 과정. 그 앞에 어머니가 있고 그 뒤를 아들이 걷는다. 그래서 더는 어머니와의 이별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아니다.

    “지금도 제사 때마다 조상에게 ‘우리 아들 글 잘 쓰게 해달라’고 비는 어머니에게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제게 성모 마리아처럼 자기희생으로 아들을 위하는 분이셨어요. 지금은 원경에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월과 함께 어머니도 풍화해가고 있음을 사진 찍듯 시를 통해 이해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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