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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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철학과 리더십 가르쳐주신 내 삶의 영원한 스승”

미래에셋 회장 박현주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5-02-03 12: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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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철학과 리더십 가르쳐주신 내 삶의 영원한 스승”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47)은 ‘대한민국 제일의 투자전문가’로 꼽힌다. 증권사 샐러리맨 생활 11년 만에 미래에셋을 설립, 5~6년 만에 업계 수위를 다투는 회사로 키워냈다. 박 회장은 “내 경영철학과 투자 감각, 신용 제일주의와 리더십은 모두 어머니(79)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광주시 외곽 농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농사꾼이었다. “10리나 떨어진 초등학교를 내내 검정고무신만 신고 다녔어요. 운동화 한 켤레 못 사줄 형편은 아니었는데, 부모님께서 동네 애들 못 신는 거 내 자식만 신길 수 없다 하신 거죠.”

    비교적 평탄했던 소년 시절은 그가 광주일고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부친이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하면서 끝이 났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학업은 뒤로 미룬 채 딴 세계에 빠져 살았다. 전교 등수는 밑에서 2, 3등을 맴돌았다. “당시 어머니는 아버님이 남기신 정미소를 운영하고 계셨어요. 가장이 사라지면 살림 다 정리해 도시로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머니는 ‘지아비가 평생을 바쳐 일군 가업을 포기할 수 없다’며 새벽 네다섯 시부터 일에 몰두하셨죠. 강인하기가 겨울 대나무 같았어요.”

    1년 학비·생활비 한꺼번에 보내 ‘돈 관리하는 법’ 깨우치도록

    그런 어머니가 박 회장에게 아픈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생겼다. 고3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엇나가는 제게 끝내 꾸중 한번 않던 어머니셨어요. 그런데 절 불러 앉히시곤 ‘대학 못 가도 된다, 정직한 농사꾼이 되는 것도 좋은 일’이라며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가슴이 무너졌지요.”



    그가 재수 끝에 고려대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1년 학비와 생활비를 한꺼번에 부쳐주었다. 돈 관리하는 법을 스스로 깨치라는 것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박 회장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주식 투자를 했다. 이는 그가 대학원 시절 이미 명동 자금시장에서 ‘청년 투자분석가’로 이름을 날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머니는 입이 무겁고 일 처리가 정확하셨어요. 내일 돈 들어올 일이 있다 해도 실제로 그 돈을 손에 쥐기까지는 절대 말씀을 안 하세요. 또 무척 실용적이셔서, 벌써 30여년 전부터 명절을 서울에 올라와 쇠셨어요. ‘니들 다 서울 있는데 뭣하러 생고생을 하느냐’는 거였지요.”

    그는 특히 “어머니의 베푸는 삶에 감화받았다”고 했다. “한 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끝까지 도와주세요. 일가 친척이건 집안 일꾼이건 마찬가지죠. 동네 아이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일이 있어도 꼭 우리 형제만 호되게 나무라셨어요. 중학생 때 어려운 친구를 돕느라 큰돈을 뭉텅뭉텅 타간 적이 있는데, 용처를 뻔히 아시면서도 아무 말씀 없으셨어요.”

    어머니는 삶의 고비고비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1994년 동원증권 압구정지점장 시절이었어요. 분명 오를 것이라 예상한 삼성전자 주가가 한동안 제자리여서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어요. 근데 어머님께서 불쑥 전화하셔서 이러시는 거예요. ‘내 너한테 부탁 하나 하마, 출세하려고 하지 마라.’ 그 말씀이 제게 많은 용기와 깨달음을 줬습니다.”

    올 3월에는 집안에 큰 경사가 있다. 워싱턴대 의대 소아신경외과 종신교수인 맏형 태성씨가 뇌성마비 치료의 새 장을 연 공로로 ‘2005년 KBS 해외동포상 의학봉사상’을 수상하는 것이다. 박 회장은 “노환에 시달리는 어머니께 형님이 큰 효도를 했다”며 기뻐했다.

    “계속 혼자 사시기를 고집하셔서 거동이 불편해진 지난해에야 저희 집으로 모셔올 수 있었습니다. 제 생명의 뿌리이자 삶의 근원인 어머니께서 늘 건강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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