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1

2005.02.01

국정원 대북공작 007 뺨치네!

중국서 지하 반북단체 원격 조종 … 베를린에선 북한 서기관 PC 통째로 빼내기도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1-26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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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대북공작 007 뺨치네!
    1월19일자 ‘조선일보’는 무려 세 개 면에 걸쳐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한국의 국가정보원과 유사한 기구) 산하 공작조의 주요 인물 납치 사실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공작조를 지휘한 인물은 함경북도 보위부(우리로 치면 국정원 함경북도 지부에 해당) 반탐처장(反探處長, 간첩 색출 책임자) 윤모 대좌(대령)와 지도원인 지모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였다. 두 사람의 지휘를 받은 공작조는 1999년부터 2001년 사이 20여 차례에 걸쳐 40여명을 북한으로 납치해갔다고 한다.

    이들이 납치해간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한국 국적으로 미국 영주권을 갖고 옌지(延吉)에서 탈북자를 도왔던 김동식 목사(2000년 1월16일)였다. 그리고 1960년대 말 북한 남자(조총련계)와 결혼해 북한에 들어가 살다가 98년 남편이 죽자 가족을 이끌고 탈북해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에 숨어 지내며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던 일본 여성도 납치해갔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보도에서 더욱 많은 사람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국정원 직원 A씨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A씨는 중국을 무대로 조선족과 연계해 반북(反北)활동을 펼친 사람이다. 북한 보위부는 A씨에게 협조해오던 조선족 석모씨를 납치해 A씨의 동선(動線)을 확인한 뒤, 99년 2월 A씨가 한국에서 온 사람을 맞으러 공항에 갔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공항에서 그를 납치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A씨가 공항에서 바로 한국으로 출국해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보도는 ‘과연 사실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우리 국정원은 정말 북한 보위부가 납치를 시도할 정도로 중국 등 제삼국을 무대로 치열하게 공작하고 있는가’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일보의 보도는 모두 사실이다. 적어도 2000년 전까지 국정원은 제삼국을 무대로 상당히 담대한 공작을 펼쳤다.

    국정원 대북공작 007 뺨치네!
    담대한 활동으로 북한 측의 납치 표적 되기도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기자 또한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신동아’ 2003년 1월호에 이미 보도했기 때문이다. 당시 A씨 납치를 시도했던 북한 보위부 공작원은 이춘길씨(가명)였다. 2002년 12월 기자는 중국에서 이씨를 만나 그가 관여했거나 알고 있는 보위부의 납치 사례를 듣고 이를 그의 육성수기 형식으로 정리해 신동아에 게재했다. 이씨는 수기에서 윤모 대좌와 지모 상좌는 윤창주와 지용수이며, 탈북 일본여성의 북한 이름은 양초옥이고 양씨를 북한으로 잡아들인 이는 자신이라고 밝혔다.

    통상 정보기관의 공작관은 실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A씨의 실명에 대해서는 확인된 게 없지만 그가 서울 소재 명문 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중국통’인 것만은 분명하다. A씨는 중국에서 활동할 때 한성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므로 이춘길씨를 비롯한 북한 보위부 사람들은 A씨를 한성원으로 불렀다.

    국정원 대북공작 007 뺨치네!

    북한 보위부 공작원으로 활동했던 이춘길씨.

    국정원의 대북공작은 92년 한-중 수교 이후 본격화됐다. 그 결과 98년 정체가 공개돼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흑금성 사건’의 주인공 박채서씨는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안기부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명윤 보위부 부장대리를 만나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실질적인 보위부장이기에 보위부장직은 공석으로 두고, 제1부부장이 부장 업무를 대리한다. 박씨는 이러한 부장대리를 만나 여러 차례 식사를 함께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와 김덕룡 당시 한나라당 의원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환심을 샀다(신동아 2002년 11월호 참조).

    북한 권력의 실세는 조선노동당인데, 노동당이 사용하는 모든 자금을 다루는 곳이 노동당 39호실이다. 따라서 39호실은 보위부만큼이나 중요한 기관으로 여겨지는데, 95년 39호실에서 중국 문제 담당자로 활동해온 사람이 박진만(가명)이었다.

    그런데 박씨는 부정축재한 것이 문제가 돼 ‘물 좋은’ 중국 담당을 빼앗기고 ‘철도 담당’으로 밀려났다. 박씨는 이에 불만을 품고 그동안 중국에서 몰래 만났던 안기부 직원과 접촉해 서울로 들어왔다. 그리고 안기부의 협조자가 될 것을 약속하고 다시 중국에 나가 조선족과 탈북자를 규합해 ‘민통련’이라는 지하 반북단체를 운영했다.

    국정원 대북공작 007 뺨치네!

    신동아에 게재된 이춘길씨의 수기.

    민통련은 김정일 체제를 비난하는 전단을 만들어 북한에 뿌리고 김일성 동상 폭파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반북활동을 펼쳤다. 북한에서는 보위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기무사에 견줄 수 있는 보위사(보위사령부)도 방첩활동을 한다. 민통련의 활동이 활발하자 보위부와 보위사는 각각의 정보원을 비밀리에 민통련에 가입시켰는데, 보위부의 끄나풀로 민통련에 가담한 이가 바로 이춘길씨였다.

    보위부와 보위사는 각각의 정보원을 통해 박진만씨를 원격조종하는 이가 국정원 직원 한성원씨이고, 한씨는 이따금 옌지에 나타나 장기간 암약하다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돼 두 사람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 한편 이춘길씨는 박진만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해 98년 5월26일 옌지의 대우호텔에서 한성원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씨는 한성원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북한 공작원이 된 것이다.

    98년 9월9일은 북한 정권 수립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9·9절 행사를 며칠 앞두고 청진에서 대형 김일성 동상을 폭파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다. 깜짝 놀란 북한은 민통련이 이 사건을 사주했을 것으로 보고 보위부와 보위사에 즉각 박진만과 한성원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9월4일 저녁, 박진만의 동선을 잘 알고 있는 이씨는 옌지에 있는 연남각 식당에 10여명의 협조자(공작원)를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8시쯤 박씨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오자 강제로 차에 태워 그날 밤 함북 보위부 측에 인계했다. 그리고 박씨의 납치 사실을 비밀에 붙여놓고 한씨가 중국에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한씨가 옌지에 나타나지 않자 99년 2월4일 박진만씨의 협조자로 활동해온 석두옥씨(조선일보에서 석모씨로 소개한 조선족)를 납치해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한국인이 모 아파트 5층에 있다”는 실토를 받아냈다. 이씨는 즉시 아파트로 달려갔으나 그 사이 한성원씨로 추정되는 한국인은 방도 제대로 치우지 않고 빠져나갔다. 이로써 한성원씨 납치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한성원의 그림자는 한동안 북한 정보기관을 짓눌렀다고 한다.

    컴퓨터 바꿔준 뒤 삭제한 북한 자료 복원

    2003년 9월22일 재독학자 송두율씨가 귀국했을 때 국정원은 “송씨는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와 동일 인물이다. 그는 북한이 발부해준 비밀 여권을 갖고 북한을 방문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지검 공안1부는 국정원의 주장을 받아들여, 2003년 11월19일 송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나 2심 재판부는 “송씨가 노동당 후보위원으로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는 것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해 송씨는 독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송두율씨 사건 이면에 한성원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송씨 사건이 진행될 당시 몇몇 언론은 ‘국정원과 검찰이 독일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 서기관으로 3년간 근무하다 99년 홀연히 미국으로 망명한 김경필이 작성한 A4 용지 2035매 분량의 대북 보고문을 송씨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로 법원에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김경필이 작성한 보고서가 법원에 제출됐다고 하자, 적잖은 사람들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국정원을 도와준 것으로 오해했다.

    김경필의 대북 보고문은 당시 베를린에 파견돼 있던 국정원 공작관 H씨가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단독 입수한 것이었다. 김경필은 조선노동당의 해외공작 기구인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관으로, 독일을 중심으로 H 공작관은 한 유럽의 친북 인사를 관리해왔다. H공작관은 이러한 김씨와 가깝게 지내던 재독 범민련 조직원 최모씨에게 접근했다. H 공작관에게 포섭된 최씨는 98년 김경필에게 접근해, “당신의 PC가 낡았으니 새것으로 교체해주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김경필은 크게 의심하지 않고 하드 디스크에 저장돼 있던 파일을 모두 지운 후 PC를 내주고 새 PC를 얻었다.

    김경필의 PC를 확보한 H 공작관은 즉시 기술자를 불러 김경필이 삭제한 모든 자료를 복원했다. 여기서 국정원은 ‘송두율=김철수’로 판단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고, 5년 후 송두율씨 재판이 있자 이 자료를 A4 용지 2035매로 출력해 법원에 제출했던 것이다.

    김경필의 컴퓨터를 확보한 국정원은 곧 김경필을 접촉해 귀순 공작을 펼쳤다. 그제야 자신의 자료가 몽땅 국정원에 넘어간 사실을 안 김경필은 고민을 거듭하다 99년 1월 아내와 함께 미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요청했다. 그 후 김경필 부부는 독일 정보기관인 BND와 미 CIA로부터 장기간 신문을 받고 미국에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김경필이 사라지자 크게 당황한 북한 이익대표부는 사방으로 김경필을 수색한 끝에 ‘그 유명한 한성원’이 김씨 실종에 관여했다고 잘못 판단했다. 이때쯤 북한 정보기관은 한성원씨의 본명이 한형수인 것으로 판단하고 “국정원 직원 한형수가 김씨를 납치해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H 공작관과 한성원은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덕분에 국정원은 북한 공작 조직이 국정원 내부에까지 침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2000년 이후 한성원씨와 H씨가 별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씨와 H씨는 불안을 느껴 해외공작을 중단하고 이름을 바꿔 국내 부서에만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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