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0

2001.11.22

“아플 때마다 건강보험증 빌려 써요”

노숙자·보험료 미납자 등 대여 다반사 … 같은 시기 반복진료 아니면 적발 불가능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11-23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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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플 때마다 건강보험증 빌려 써요”
    어이상하네, 얼마 전 뽑은 이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니….” 서울시 중구 회현동 K치과의원 김모 원장(48)은 요즘 일주일에 몇 번씩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한다. 의원 의무 기록부에는 분명 한 달 전에 뽑은 것으로 기록된 환자의 어금니가 멀쩡하게 그 자리에 박혀 있고, 염증이 심해 잘라낸 잇몸이 그대로 붙어 있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 환자에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도 그들은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다.

    그들은 누구고, 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K의원 인근의 서울역 노숙자들을 만나 자초지종을 물어보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입동인 11월7일 오후 지하철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자들은 한결같이 “건강보험증을 빌려 쓰다 보니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귀띔한다. 즉 한 달 전에 어금니를 뽑은 건강보험증의 주인과 나중에 이 보험증을 들고 간 환자는 동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이라는 것. 노숙자 이모씨(54)는 “같은 건강보험증을 가지고 10여명이 함께 쓰니까 보험증 주인이나 이전에 보험증을 빌려 쓴 노숙자나 어디를 어떻게 치료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문제 때문에 웬만큼 보험증을 빌려 써본 노숙자는 보험증에 한 번이라도 기재된 의원은 잘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플 때마다 건강보험증 빌려 써요”
    오랜 노숙생활로 아픈 곳은 많은데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의료시설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건강보험증을 빌려 쓰지 않고는 비싼 진료비와 약값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노숙자들의 호소. 이들은 가출 당시 건강보험증을 가지고 나왔지만 가족들이 보험금을 내지 않아 보험적용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설사 보험이 살아 있더라도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 때문에 건강보험증을 빌려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보험증을 빌려주는 사람이 드물어, 아플 때마다 주변 상점에 가서 통사정하거나 심지어 역무원을 붙잡고 대여를 부탁하는 노숙자도 많은 실정이다.

    하지만 건강보험증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 노숙자뿐만은 아니다. 현재 건강보험료를 3회(4개월) 이상 연체해 보험급여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만 전국적으로 274만명(7월 말 기준). 이중 갑작스런 가계 파산으로 보험료를 내지 못하게 된 지역보험 가입자나 실제 소득이 거의 없지만 의료보호 대상자로 지정되지 않은 사람(차상위 계층)들도 몸이 심하게 아프면 사실상 건강보험증을 빌려 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지난해 남편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대리운전 기사로 취직해 근근히 생활을 꾸려가는 이모씨(여·46)도 최근 딸이 맹장염 수술을 받느라 건강보험증을 빌려 쓴 경우.

    “남편의 파산으로 매달 13만원씩 나오는 보험료와 200만원 이상 밀린 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보험적용 대상에서 제외됐죠. 고3인 딸이 수학능력시험을 3주일 앞두고 갑자기 배가 아파 응급실에 갔더니 간단한 검사와 진찰만 받는 데 7만원이 나왔습니다. 어쩔 수 없이 딸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가진 회사 사장의 보험증을 빌려 썼습니다. 보험 처리해도 수술비가 40만원 나왔는데 만약 보험을 적용받지 못했다면 100만원이 훨씬 넘는 돈을 물어야 했을 겁니다.”



    이렇듯 보험증을 빌려 쓰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보험증’을 가지고 장사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일명 ‘쯩꾼’이라 불리는 보험증 대여업자가 바로 그들. 서울역 노숙자들 중에는 거리 행상이나 역전 인근 점포 주인처럼 안면 있는 사람의 건강보험증을 공짜로 빌려 쓰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형편이 ‘괜찮은’ 노숙자들은 ‘대여업자’에게 1회에 2000원씩 사례비를 주고 건강보험증을 빌려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노숙자 이씨는 “공짜로 빌려 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싫은 소리를 자꾸 듣다 보면 ‘쯩꾼’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울역 인근에서 노숙자의 소개로 만난 보험증 대여업자 최모씨(42)는 “주로 서울역과 각 공원 노숙자, 서울시 남산동 ‘쪽방’ 사람들을 상대로 20여명의 쯩꾼이 활동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최씨에 따르면 이들 ‘쯩꾼’들은 노숙자 밀집지역 근처에서 잡화점을 하는 사람들로 부업삼아 보험증 대여업을 하고 있다는 것. 대여업자 중에는 분실 신고해 한 사람당 10개 이상의 보험증을 확보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는 게 그의 주장. 즉 하루에 한 번씩만 빌려주더라도 2만원의 일당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험증을 자주 빌려가는 사람들에게는 대여비를 깎아주기도 한다. 일주일(6일) 내내 사용하면 50%인 6000원, 만성 환자의 경우는 처방전 받으러 갈 때마다 1000원씩 매번 챙긴다. 지역건강보험 가입자의 보험료 최하한선이 5800원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 대여업자는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노숙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폭리를 취하는 것이다.

    “아플 때마다 건강보험증 빌려 써요”
    그렇다면 이들의 건강보험증 대여행위가 의료기관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의료기관들이 환자가 보험급여 대상자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게을리하기 때문. 게다가 건강보험증만으로는 본인 확인이 불가능한 데다 의료기관이 본인 여부를 확인하려 해도 환자들이 신분증(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오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관리공단 곽정수 차장은 대여행위 확산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환자 본인 몫의 진료비와 약값만 확실히 낸다면 보험증 소유자가 누구든 보험급여는 그대로 나오니까 본인의 건강보험증이 아니더라도 의료기관이 손해볼 건 전혀 없다. 보험증을 빌려준 사람만 동의한다면 우리(공단)가 수진자 조회를 하더라도 잡아낼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건강보험공단의 또 다른 관계자도 “같은 시기에 반복될 수 없는 진료가 동시에 시행된 경우가 아니라면 건강보험증 대여행위의 적발은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한다. 즉 맹장염 수술을 한 사람이 또다시 맹장 제거 수술을 한다든지, 3개월 전 분만한 사람이 또 분만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면 대여행위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 실제 건강보험공단이 올 들어 7월 말까지 적발한 건강보험증 대여행위 건수와 그로 인해 각 개인에게 추징한 부당이득금 환수 실적도 고작 456건에 8000여만원에 머무는 실정이다. 이는 99년 62건, 지난해 76건에 비해 ‘폭증’한 수치지만 실제 이루어지는 대여행위에 비해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의료계 전반의 지적이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의 한 관계자는 “주민등록증과 건강보험증을 통합하는 안을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지만 문제점이 많아 시행이 불투명한 상태”라며 “그보다도 보험재정 안정을 통해 실제 소득이 없는 사람들을 의료의 사각지대에서 구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한다.

    “건강보험료 그거 왜 내. 의사들도 빌린 것인 줄 다 알면서 자기들에게 피해가 없으니 모른 체해 주는 거지 뭐.” 2000cc급 중형차를 굴리면서도 건강보험료를 단 한푼도 낸 기억이 없는, 서울역 주변 ‘건달’ 이모씨(40)의 말에서 건강보험증 대여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늘 건강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아플 때는 그도 서울역에서 2000원 내고 건강보험증을 빌려 쓴다. 하지만 하루 한 끼의 밥을 굶으며 ‘쯩’을 빌리는 노숙자와 의도적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고 보험증을 빌려 쓰는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구별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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