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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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품없고 땟국 흐르는 ‘사랑의 신’

  • < 노성두 /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2-28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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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품없고 땟국 흐르는 ‘사랑의 신’
    피렌체 피티 미술관에는 독특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보볼리 정원 쪽을 보면서 길게 뻗은 회랑을 몇 개 지나고 나서 마지막 전시실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에로스. 사랑의 신이다. 그런데 무척 고단한 표정으로 세상 없이 잠들어 있다. 그것도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포근한 품이 아니고, 어둑한 뒷골목 인적 없는 땅바닥에 깔고 덮을 것도 없이 맨살을 뉘었다. 밤이슬이 차가울 텐데 어쩌나, 걱정이 문득 앞선다.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이 그림은 언뜻 보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한 발 다가서면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빨려 든다. 에로스가 맨 땅에 누워 잔다. 이건 너무 뜻밖이다. 다른 화가들 같았으면 두 뺨이 붉은 어린 아기가 앙증맞은 무지개 날개를 달고 깡충대며 화살을 쏘아대는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그렸을 텐데, 이건 미술의 역사에서 족보를 찾기 힘든 영 뚱딴지 같은 에로스가 떡하니 걸려 있는 것이다. 더구나 바로크 미술이라면 생기 넘치고 기운찬 구성에 정신이 아득할 만큼 보는 이의 마음을 들쑤셔놓는 게 보통인데, 카라바조 그림은 그런 것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차분한 명상그림이라면 잘 어울릴 것 같다.

    촌스러운 생김새에 노숙자 신세 … 왜 이렇게 그렸을까

    볼품없고 땟국 흐르는 ‘사랑의 신’
    에로스는 원래 대책 없는 장난꾸러기 신이다. 아무한테나 화살을 쏘아대는 바람에 말썽이 끊이지 않는 천방지축이다. 일단 화살에 심장이 꽂히면 대뜸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니 대책 없는 일이다. 살짝 긁히기만 해도 탈이 나는 건 마찬가지. 그래서 에로스 자신도 혼자 화살을 갖고 장난치다 생채기를 낸 적도 있었다. 아풀레이우스가 전하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도 처음에는 단순 우발 사고였다고 한다. 이런 에로스의 못된 손버릇 때문에 구설수에 빠진 신들도 하나둘이 아니다.

    오렌지 숲 위를 날아다니며 구름을 희롱하든지, 미끈하게 빠진 삼미신 엉덩이를 쿡쿡 쑤셔대든지 낑낑대며 활을 손질하거나, 장난기 닥지닥지한 표정으로 사랑의 승리를 선언하는 에로스였다면 나무랄 게 없다. 아프로디테가 발가벗고 제 몸을 감상할 때 청동거울을 받쳐드는 것도 에로스의 일과다. 가끔 못된 꿍꿍이를 저질러 볼기짝을 맞는 일도 있지만.



    어쨌든 다른 미술가들의 눈에 비친 에로스는 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게 공통점이다. 그런데 카라바조는 왜 이런 쓸쓸한 타박대기 에로스를 그렸을까? 또 언제부터 에로스가 노숙자 신세가 되었을까? 나그네의 신 헤르메스가 노정중에 바위 틈에서 꼬부리고 잠들었다든지, 영웅 테세우스나 헤라클레스가 괴물을 때려잡고 피로에 지쳐 잠시 눈을 붙이는 것으로 묘사된다면 그럴 만하겠지만 노숙자 에로스는 아무래도 앞뒤가 안 맞는다.

    카라바조의 그림 속에서 잠든 에로스는 남루하기 짝이 없다. 생김새도 촌스럽다. 귓불이 빨갛고 코 끝이 반들거린다. 입술은 반쯤 열렸다. 화살통을 베개 삼고, 두 날개가 곧 이불이다. 숨을 쉴 때마다 못난이 참외배꼽이 들썩인다. 잠결에도 활을 여며 쥔 주먹을 풀지 않았다. 밤이 퍽 깊었다. 어둠에 윤기가 흐르기 시작하는 시각이다.

    무심히 잠든 에로스가 지친 몸을 뒤척이는 순간, 표정 없는 달빛은 빛의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소년의 머리와 윗몸, 그리고 다리가 연결되는 부분에 어둠의 예리한 발톱이 스며들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빛과 스펀지처럼 빨려드는 어둠의 극단적 대비는 길게 누운 에로스의 잠든 모습을 마치 토막난 고깃덩이처럼 보이게 한다. 달빛은 파리하다 못해 섬뜩하다.

    우리가 모르던 에로스의 정체는 플라톤의 ‘심포지온’에 기록되어 있다. 플라톤은 기원전 416년 비극작가 아가톤이 베푼 연회석상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해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소크라테스는 술꾼들을 둘러보면서 운을 뗐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과연 사랑에 충만한 존재일까?”

    아무 대답이 없자 소크라테스는 에로스에게 사랑이 한줌도 없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에 목마르지 않고, 빠름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건강이 건강을 염려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노상 사랑에 주려 사랑을 쫓아다니고 또 쉼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사랑의 신 에로스는 사랑이라곤 하나도 없는 존재라는 게 소크라테스의 설명이다. 이미 충분히 있는 것, 차고 넘칠 만큼 제 곳간에 넉넉하게 있는 걸 더 차지하겠다고 악착같이 탐하는 법은 없으니까. 그럴 듯한 말이었다. 이어진 소크라테스의 두 번째 질문.

    “에로스는 아름답고 착한 존재일까?”

    소크라테스는 이것도 부정한다. 신들이 애당초 이 세상의 질서를 정할 때 아름답고 착한 것에 대해서만 사랑을 느끼도록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란다.

    에로스가 프시케를 좋아해 동거까지 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에로스가 착하고 얌전한 프시케를 제 짝으로 고른 것은 바로 자기한테 아름답고 착한 구석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볼품없고 땟국 흐르는 ‘사랑의 신’
    이쯤 되자 술자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에로스가 잘생긴 미소년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 그게 아니라니까 그럴 수밖에. 일찍이 헤시오도스는 ‘신통기’에 신들의 족보를 정리하면서 에로스가 “불멸의 존재들 가운데 최고로 아름다우며… 신이고 인간이고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삭신을 녹여버린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시인 아나크레온과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금발머리’에 ‘황금 날개가 눈부시게 빛나는’ 에로스를 상상했다. 그런데 에로스가 볼품없고 맘씨 고약한 신이라니 어디서 그런 주장이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한술 더 떠 에로스가 신이 아니라고 못박는다. 좌중은 드디어 할 말을 잃고 만다.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간명했다. 신들은 영원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인데, 에로스는 그렇지 못하니까 한자리에 끼워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잠잠하던 아가톤이 참다못해 쏘아붙였다.

    “아니, 그러면 에로스가 인간이란 건가?”

    “아니지.”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이야?”

    “에로스는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 곧 다이몬일세.”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때 만티네아의 현명한 여사제 디오티마에게서 에로스의 출생 비밀에 대해 들었다.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날 일어난 사건이었다. 탄생을 축하하려고 신들이 모였는데, 그 가운데 포로스가 있었다. 부요의 신이다. 실컷 때려먹고 마신 뒤 제우스의 정원으로 들어가서 단잠에 빠졌다. 그때 문간에 빈곤의 신 페니아가 나타났다. 얻어먹을 게 없을까 기웃거리다 마침 포로스가 나 몰라라 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옳거니, 하고 몸을 붙였더니 그 참에 에로스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날 생명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이런 인연으로 에로스는 그 뒤 아프로디테와 동행하게 되었단다. 여사제 디오티마가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한테 귀띔해 준 에로스의 정체는 이랬다.

    “에로스는 늘 빈곤하지. 촌스럽고 못생긴 건 덤이야. 상상 밖이지. 막돼먹은데다 위아래가 없다니까. 신발짝도 못 얻어 신고, 잘 곳이나 있겠나, 아무 데서나 땅바닥 깔고 누우면 그게 안방이지. 남의 집 문간이나 길바닥에서 평생 풍찬노숙이야. 천성도 제 어미를 닮아 빈곤이랑 벗하고 지내는 녀석일세. 그런데 말이지, 에로스가 제 애비도 한턱 닮았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착하고 아름다운 걸 보면 사족을 못쓰고 달려간다네. 영리하고, 깡다구 좋고, 챙겨 입고 나서면 사냥꾼으로도 안 빠지니. 그러니까 에로스는 넉넉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지혜와 무지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그런 존재인 셈이지.”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에로스는 여사제 디오티마의 설명을 충실히 따랐다. 볼품없고 땟국 흐르는 에로스. 사랑에 충만한 사랑스러운 신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고단하고 애처로운 다이몬이다.

    에로스는 잠들어서도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에로스는 정말 고독한 존재일까? 끊임없이 사랑에 목마르고 주린 사람이 있다면 혹시 자신이 사랑의 화신이 아닌지 의심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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