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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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과 매니저, 그 아리송한 관계

이태란 사건 계기로 ‘부적절한 사이’ 또 도마에 … 무명일 땐 문제없다 성공한 뒤 위기 맞아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2-28 15: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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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과 매니저, 그 아리송한 관계
    여자 연예인이 성관계 사실을 미끼로 자신을 협박한 매니저를 고소했다’는 사실은 이제 별 뉴스거리도 아니다. 지난 9월 초 신문 사회면에는 무허가 음반제작사를 차려놓고, 인터넷 광고를 보고 찾아온 10, 20대 여성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음반제작사 매니저 2명을 구속했다는 기사가 실렸고(이 사건은 1단짜리 기사로 처리되었다), 작년에도 한 매니저가 자신이 관리하는 탤런트에게 “일 때문에 만날 사람이 있다”며 경기도의 한 별장으로 유인해 성폭행하고, 이를 비디오로 찍어 협박하다 고소당한 사건이 있었다.

    여자 연예인과 매니저간 이런 사건은 사실 잊을 만 하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하고 금방 잊히는 것은 일반인이 잘 모르는 신인에게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주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이태란과 그 매니저에 관한 사건은 피해자가 이른바 ‘톱 클래스’에 속하는 탤런트고, 그런 인기 스타가 현 소속사 사장과의 성관계를 인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연예계에서 매니저와 여자 연예인 사이에 성(性)을 미끼로 한 종속관계가 은밀히, 그것도 상당히 폭 넓게 존재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으면서 사회 전체로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보도로는 이태란이 자신의 현 매니저인 안모씨를 폭행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고소했다고 알려졌으나, 기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이 사실을 먼저 포착한 쪽은 경찰이었다. 방배경찰서 형사계 강력반 연인훈 반장은 “안씨에게 다른 사기 혐의가 있어 조사하던 중 첩보를 통해 이씨와의 일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이씨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고 고소를 권유했다”고 말했다. 경찰의 개입이 없었다면 고소는 더 늦었을 수도, 또 사건 자체가 묻혀 버렸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연예인과 매니저, 그 아리송한 관계
    어찌 되었든 이태란은 고소장을 통해 “안씨가 지난 3년 동안 방송출연료, CF출연료 등 3억 원을 갈취하고 ‘변심하면 성관계 사실을 폭로하겠다’며 협박과 폭력을 일삼아 왔다”고 밝혔고, 경찰은 안씨를 긴급 체포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영장을 기각하고 경찰에 재수사를 지시했다.

    방배서의 연인훈 반장은 “폭력과 협박당한 일시,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갈취당한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안씨는 “대부분의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경찰의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이태란이 매니저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보도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사과정에서 이씨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고 ‘안씨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보복당할까 두렵다’며 불안해했다”는 것이 경찰의 말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매니저와 연예인 사이라기보다 연인 사이에 가까웠다. 두 사람이 결혼까지 생각하였다는 건 양측의 공통된 주장이다. 안씨가 운영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도 “평소 두 사람 사이는 무척 좋은 편이었다. 사장(안씨)은 촬영장에도 자주 나가고, 하루에도 수차례 전화통화를 해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씨가 이혼 경험이 있고, 가명을 써왔으며, 미국 영주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도 이번 사건을 통해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는 “태란씨가 예전 매니저와의 일도 있는데, 또 이런 일을 당한 걸 보면 참 복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이태란의 네 번째 매니저인 안씨는 이태란이 과거 매니저와 얽힌 계약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이다. 97년 SBS 톱 탤런트 선발대회에 입상하면서 화려하게 연예계에 입문한 이태란은 데뷔 이후 매니저 문제로 남모르게 큰 고통을 받아왔다. 이중계약 문제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그의 전 매니저는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이태란의 사생활에 대해 악의적 소문을 흘리고 다니기도 했다.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주고, 연인이자 매니저로 이태란과 함께 지내온 안씨는 최근 이태란이 자신을 멀리하자 “너와 나의 성관계를 폭로하겠다”며 이태란의 휴대폰에 성관계 때 신음소리를 음성 메시지로 남기는 등의 방법으로 협박해 왔다. 이 때문에 ‘백지영 비디오’ 같은 섹스비디오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지만, 경찰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이런 비디오는 발견되지 않았다.

    가수 백지영의 성관계 비디오를 찍은 김시원은 “백지영이 배신하면 써먹겠다”는 얘기를 주변에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비디오가 ‘사랑의 산물’이 아니라 일부 매니저와 연예인 사이의 ‘보험용’ 섹스비디오일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안씨 역시 이태란과의 ‘은밀한’ 관계를 협박 수단으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 연예인은 한없이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이태란 역시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사랑 받아온 그녀는 이미지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현재 MBC측은 “이태란이 피해자인 만큼 드라마 출연에 제재를 가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지만, 한 방송사 관계자는 “여론이 나빠지면 그때는 다시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전한다.

    물론 극소수의 일이겠지만 매니저들이 이렇듯 연예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약점을 이용하려 드는 데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신하겠다는 거냐’는 심리가 깔려 있다. 흔히 ‘악어와 악어새’에 비유하는 연예인과 매니저 관계는 계약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묘한 사이다. 무명일 때 연예인과 매니저는 ‘형·아우, 오빠·동생’ 하는 가족 같은 관계지만 고생이 끝나고 성공이 다가오는 순간, 관계는 위기를 맞는다.

    여자 연예인과 남자 매니저의 경우는 위험 요소는 더 크다. 하루종일 붙어다니는 일의 속성상 남녀간 감정이 싹틀 수 있고,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대형 매니지먼트사의 등장으로 업계 환경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연예가엔 지금도 매니저들이 계약을 맺은 연예인을 성적으로 농락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매니저와 동거하는 여자 신인도 꽤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영세한 회사의 매니저들은 신인을 상대로 불공정한 계약을 맺어 대부분의 수입을 챙기고, 심지어 매니저 승인 없이는 개인적 판단과 행동도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기도 한다.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연제협)가 MBC 보도를 문제삼아 출연 거부를 결정했을 때, 회원사들이 소속 연예인을 내세워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는 선언을 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이번 일로 일반인 사이에서는 연예계에 실재하는 것으로 드러난 인권 유린과 불공정 계약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연제협 자문위원 서희덕씨는 “극소수 악질 매니저의 경우를 일반화하지 말아 달라. 연제협은 97년부터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회원사들이 이에 따라 계약을 체결하도록 상호간 견제하고 있다. 매니지먼트가 하나의 산업으로 모습을 갖춰가면서 이런 관행은 자연스레 자체 정화될 것이다”고 말했다.

    비디오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킨 오현경은 사건 직후 미국에서 상당기간 은둔생활을 했다. 가수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 백지영 역시 최근 발표한 노래가 공중파에서 방송금지 되면서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항상 건강하고 밝은 이미지로 성실한 연기생활을 해온 이태란 역시 기자회견을 통해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고 오열했다.

    최은순 변호사(성폭력상담소 법률자문)는 “피해자인 여자 연예인이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한 것이고, 우리 사회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예문화 소비자들이 이번 문제에 대해 분별력 있는 판단과 성숙한 의식을 보일 때 악질 매니저들의 이런 관행이 사라질 것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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