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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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펀드’는 벤처업계의 보험?

유력 인사들에 지분 나누어주고 바람막이 혜택…차명 많아 실체 확인도 어려워

  • 입력2005-05-27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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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설펀드’.

    상법이나 증권거래법 어디를 뒤져봐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 하나가 금융권은 물론 언론계, 정치권을 온통 뒤흔들고 있다. ‘알타펀드’니 ‘HC펀드’니 하는 이름을 붙인 ‘정현준 사설펀드’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사설펀드는, 그러나 벤처업계에 대해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 낯선 개념이 아니다. 동문이나 지인들 중심으로 수백만원씩 모아진 돈이든, 정현준씨처럼 수백억원대의 자금에 정관계 유력 인사들까지 끌어들인 대규모 자금이든 금융기관의 공모나 펀드 납입 과정을 거치지 않고 조성된 자금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사설펀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정현준씨와 정관계 인사와의 커넥션을 입증할 사설펀드의 실체가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이러한 펀드의 실체와 조성 경위, 그리고 운용 방식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최근 벤처업계에서 신규 주식을 공모하면서 정관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언론계 인사들까지도 두루 포함시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게다가 정현준씨의 경우처럼 금감원 고위직을 끌어들여 1억원을 투자하게 한 후 손실보전 명목으로 3억5900만원의 돈을 건네준 것은 가장 초보적인 수법에 해당한다는 것.

    ‘투자 자문’ 사설 업체들 지분 배분 역할

    오히려 더 큰 문제는 신생기업의 초기 자본금 구성 단계부터 지분을 나눠주는 형식으로 정관계 유력 인사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관계는 물론 언론계의 주요 인사들에 대한 지분 배분행위를 ‘조각’(組閣)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권 출범 후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것처럼 한 기업의 출자 지분을 정관계 인사를 포함해 적절한 비율로 배분한다는 것이다. 용어에서부터 최근 벤처기업들이 정관계 인사들을 바람막이로 포진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투자 자문’ 간판을 내건 사설업체들이 조각을 해주고 해당 회사의 지분이나 수수료를 받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일이 끝나고 나면 메모지 등 일체의 증거도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여의도역 주변 건물들과 증권거래소 주변, 그리고 강남역 일대 등 벤처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밀집한 지역 중심으로 포진해 있는 ‘쭛쭛투자자문’ ‘××투자컨설팅’ ‘△△애셋’ 등과 같은 소규모 사무실에서 이러한 ‘조각’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사채시장을 대표하는 명동 골목에는 ‘파이낸스’ 간판을 단 유사금융업종에 이어 최근에는 ‘부동산중개업’이나 ‘자동차보험 대리점’ 간판을 단 소규모 사무실에서도 사채업자들의 벤처 투자 컨설팅 등이 공공연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물론 정식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하기 위해서는 증권거래법에 의해 금융감독위원회에 등록한 뒤 활동해야 한다. 일정 수준의 자본금과 전문인력도 갖춰야 한다. 그러나 현행법상 자본금은 5억원 이상, 운용 전문인력은 3인 이상이면 되는 느슨한 설립 요건 덕에 이들 투자자문회사가 이미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물론 정식 설립 인가를 받지 않고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략 총납입금의 10% 정도를 떼어낸 뒤 ‘금융감독원의 모국장은 몇%, 기관투자가쪽의 모부장은 몇%, 유력 언론사의 모부장 몇% …’하는 식으로 라인업(line-up)을 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유력 정치인들도 빠지지 않는다. 해당 유력 인사의 측근을 차명으로 내세워 주민등록등본만 받아놓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들이 드러날 염려도 많지 않다. 650여명에 이르는 정현준씨의 사설 펀드 가입자 명단 중 정씨 본인이나 이경자 동방금고 부회장, 또는 정씨의 비서실 직원을 중심으로 하는 측근들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들이 정관계 유력인사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이름을 빌려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실제 이들 감독당국이나 기관투자가들을 포함한 유력 인사들이 납입대금을 집어넣지도 않고 지분만 확보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먹이사슬에 편승한다는 것이다. 정현준씨가 금감원 고위 간부를 끌어들였던 것처럼 투자자문사 등이 일종의 ‘보험용’으로 유력 인사들에게 지분을 설정해 놓고 전화로 통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그러다보니 주권을 교부하거나 주식배정통지서를 발송하는 등 정식으로 주식 보유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이들 지분 보유자 입장에서는 ‘망하면 그만, 터지면 대박’이라는 ‘위험률 제로’의 환상적 게임에 참가하는 셈이다. 법률정보사이트를 만들면서 50여명의 지인들로부터 10억원 정도의 자금을 조성한 경험이 있는 최용석 변호사는 “주권을 발행해도 부도가 나는 마당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사설펀드는 얼마나 취약한 상황에 놓이겠느냐”고 지적했다.

    공짜로 지분 갖는 경우도… 위험률 제로

    그러나 이러한 라인업 작업이 외부에 노출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사채시장의 한 관계자는 “특히 정치인의 경우 워낙 복잡한 세탁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지분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정작 그가 누구인지 드러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시중에서는 모증권사 사장으로 있는, 여권 실세 중 한 명인 중진의원의 친척 김모씨 등이 거명되고 있으나 실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도 “회사 내에서 이 정치인과 사장과의 관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면 기껏해야, 이른바 ‘깡쟁이’라고 불리는 어음할인업자 정도. 그러나 이들이 굴리는 돈이라야 10억원 안팎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들이 노리는 수익 역시 어음 할인에 따르는 0.1∼0.2% 정도의 차익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그야말로 사채시장에서 자금 순환의 최일선에 서 있는 ‘피라미’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현준씨 사건 이후 정치권 내부의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사설 펀드의 명단 자체가 무슨 문제냐는 것으로 모아진다. 따지고 보면 사설 펀드에 어떤 연유로 얼마만큼의 돈을 투자했든 이는 ‘법 밖의 일’일 수는 있을지언정 ‘불법적인’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벤처나 코스닥 투자자들이 그렇듯 이들은 현재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보고 있는 ‘선의의 피해자’들인데 이들 투자자을 상대로 뭘 캐내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현재 거론되고 있는 정치인들도 어찌 보면 정현준씨 그룹에서 설정해 놓은 시나리오에 말려든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검찰쪽 분위기도 현재로서는 정현준씨 주변에서 밝혀진 2∼3개 사설펀드의 가입자 중 ‘눈에 띄는 정관계 인사는 없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이미 박순용 검찰총장이 대검찰청의 국정감사에서 ‘리스트에 정치인은 끼여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했기 때문에 총장의 국회 답변을 뛰어넘는 수사 결과를 내놓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검찰에서는 수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정치권으로 파문을 확산시키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물론 여야 정치권이, 한나라당에 의해 ‘KKK’의 실명이 거론된 이후 사생결단식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는 점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래저래 정현준 사건이 불붙인 사설펀드 파동은 정치인 등 핵심에는 다가서지 못한 채 이번에도 유야무야되리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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