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6

2000.10.26

시대를 타고 흐르는 발라드

  • 입력2005-06-30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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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까운 나이로 요절한 70년대의 싱어송라이터 김정호가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포크 듀오 어니언스의 목소리를 빌려 ‘작은 새’를 발표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이름 모를 소녀’를 내놓았던 1974년, 한국의 젊은 음악 수용자들은 나중에 발라드라고 불리게 되는 주류음악문법의 새로운 지평을 맞이하게 됐다. 그것은 기존 트로트의 애상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재즈적 요소가 강했던 전시대 이봉조 길옥윤 군단의 스탠더드 팝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젊은 ‘단조 서정성’의 도래를 의미했다.

    고(故) 김정호의 우수 어린 선율은 억압으로 아로새겨진 20대 청년문화 세대의 가슴을 위무했으며 언니 오빠들의 문화를 동경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10대 여중고생들의 센티멘털리즘을 더욱 세련된 형태로 다듬게 했다.

    통기타 폭풍의 세례를 받은 김정호는, 그러나 통기타 특유의 어쿠스틱적 명징함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오히려 통기타 사운드는 그의 발라드에선 부수적이었고 이 신세대 싱어송라이터는 현악 합주의 하모니를 더욱 강조하는 수법을 즐겨 구사했다. 이 뇌쇄적인 현의 뉘앙스는 그 이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모든 발라드 뮤지션들의 전가의 보도가 된다.

    김정호의 후계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당대 작곡가이자 가수는 다름 아닌 김동률이다. 대학가요제 그랑프리의 훈장을 달고 ‘전람회’라는 2인조 밴드로 데뷔한 그는, 솔로로 독립한 후에도 발라드의 영광을 놓치지 않았고, 미국 유학 중의 몸으로 2년 만에 발표한 그의 신작 앨범 ‘희망’은 서태지와 조성모, H.O.T.의 북새통 중에도 꾸준히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하고 있다.

    김동률은 조성모처럼 매력적인 엔터테이너 이미지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이승환처럼 압도적인 보컬을 구사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바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현악과 건반 편곡의 섬세한 탁월함이다. 그의 데뷔 때처럼 신해철과 공동 프로듀스한 이 앨범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기용해 그가 추구해 왔던 오케스트라의 미학을 가장 맵시 있게 조리하고 있다.



    역시 보스턴에 유학 중인 양파와 듀오를 이룬 이 앨범의 프로모션 곡 ‘벽’은 감정이입이 너무 지나치게 느껴지지만 앨범의 전편에 걸쳐 흐르는 김동률 특유의 고귀한 정취는 압권이다. 특히 마지막 곡 ‘희망’은 새천년의 한국 대중음악을 대표할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이 앨범에서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할 ‘눈대목’은 오케스트라 연주곡인 ‘윤회’와 신해철이 사물놀이를 이끌고 개입한 ‘염원’ 두 트랙이다. 가장 서구적인 세련됨을 추구했던 그가 서구의 한복판에서 우리의 전통적 아이덴티티를 그들의 악기로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트랙은 그저 빈 칸을 메우는 여흥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도전적인 문제의식의 개화를 짐작하게 하는 수작이다. 과연 서구를 향한 단순한 미망에서 벗어난 독창적인 문법, 곧 서구적 기교의 섬세함과 우리의 전통적인 질박함과 여백의 미학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인가.

    김동률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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