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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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워너-디즈니 사활 건 ‘전파전쟁’

일부지역 ABC방송 39시간 중단…차세대 미디어 주도권 확보 ‘한판 승부’

  • 입력2005-11-07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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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 워너-디즈니 사활 건 ‘전파전쟁’
    5월1일, ABC TV의 인기 있는 퀴즈 프로그램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나’(Who want to be a millionaire)를 보기 위해 채널을 돌린 뉴욕의 시청자들은 순간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ABC 퀴즈 프로그램 대신 ‘디즈니사가 타임 워너 케이블에서 ABC 방송을 뺏어갔다’는 자막이 계속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자막을 지켜보아야 했던 사람들은 뉴욕의 시청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로스앤젤레스, 필라델피아, 휴스턴 등 미국 10개 도시 350만 가정에서는 ABC 방송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내의 가장 큰 두 미디어 그룹, 타임 워너사와 디즈니간의 물밑 신경전이 드디어 전면전으로 치달았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일부터 일부 지역의 ABC 방송이 끊어진 것은 미국의 주요 케이블 방송사인 타임 워너사가 ABC 방송의 송출을 중단했기 때문이다(미국의 각 가정은 케이블 채널을 시청하지 않더라도 케이블을 통해 공중파 방송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싸움의 주체는 ABC가 아니라 타임 워너사와 ABC의 소유주인 디즈니다.

    분쟁의 발단은 타임 워너와 디즈니가 현재 케이블 텔레비전의 기본 시청료 외에 따로 시청료를 내야만 볼 수 있는 디즈니 채널을 기본 채널로 바꾸기 위한 교섭을 벌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디즈니가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요구하며 협상을 결렬시키자 화가 난 타임 워너가 디즈니의 ‘횡포’를 알리기 위해 디즈니가 대주주로 있는 ABC의 방송을 중단해 버린 것이다.

    타임 워너의 기상천외한 작전 덕분에 두 미디어 그룹간의 싸움이 전국에 ‘효과적으로’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 여파도 만만치 않다. 디즈니는 2일부터 시작된 뉴욕타임스 전면광고를 통해 ‘타임 워너가 ABC에 대한 시청자의 권리를 불법적으로 박탈했다’며 ‘이 오만한 케이블 독점 기업에 매운 맛을 보여주자’고 시청자들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주장에 따르면 타임 워너가 오는 24일까지로 잡혀 있는 협상 기한을 무시하고 아무런 경고 없이 ABC 방송을 중단해 버렸다는 것이다. 디즈니는 이번 기회에 케이블 채널을 끊는 시청자들에게 설치비용만 200달러가 드는 위성채널을 무료로 설치해주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예상 외의 강공에 당황한 타임 워너 역시 뉴욕타임스 전면광고로 맞대응에 나섰다. 타임 워너의 주장은 방송을 중단한 것이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쟁의 원인은 불성실한 협상 태도를 보인 디즈니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타임 워너는 시청자들에게 사과하는 의미로 케이블 텔레비전 시청료를 일시적으로 인하하는 한편, 유료영화채널 하나를 무료로 서비스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례없는 방송 중단 사태에 이어 두 미디어 그룹의 물량 공세에 시청자들은 얼떨떨할 뿐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타임 워너의 방송 중단 조치를 비난하는 추세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아무런 예고없이 시청자의 볼 권리를 박탈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이번 사건은 독과점 기업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라며 “법무부는 마이크로소프트만 신경쓰지 말고 타임 워너에도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 연방 방송위원회는 타임 워너에 최고 2억8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타임 워너와 디즈니는 각각 전면 광고를 통해 약속한 보복형 서비스를 실행하기 위해 적잖은 금전적 출혈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 타임 워너와 디즈니는 이처럼 무모한 전쟁을 도발한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디즈니 채널을 케이블 방송의 기본 채널 서비스에 포함시키는 문제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CNN, 타임, 워너브러더스, 워너뮤직 등 방송 잡지 영화 음악 등 미디어의 각 부문을 골고루 소유한 초거대 그룹 타임 워너는 미국 최대의 인터넷 업체인 아메리칸 온라인(AOL)과의 합병을 눈앞에 두고 있다. 타임 워너의 라이벌인 디즈니로서는 미디어 부문의 장악으로도 모자라 인터넷 서비스에까지 손을 뻗치는 타임 워너의 시도에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디즈니는 양사의 합병을 강력하게 반대하며 갖가지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다.

    사실 타임 워너와 디즈니는 지난 12월 디즈니 채널을 케이블의 기본 채널에 포함시키는 데에 서로 동의했다. 이들의 계약이 발표만 남은 상황에서 타임 워너는 AOL과의 합병이 성사단계에 이르렀음을 언론에 알렸다. 그러자 당황한 디즈니는 ‘상황이 바뀌었다’며 계약을 파기해 버렸다. 다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된 타임 워너는 다시 협상에 들어갔다.

    마지못해 협상 테이블에 나온 디즈니는 디즈니 채널 세개를 10년간 기본 채널에 포함시키는 대가로 기존의 계약금 외에 3000억원을 더 얹어줄 것을 요구했다. 타임 워너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4개월 동안 협상을 질질 끌면서 디즈니는 국회를 대상으로 타임 워너와 AOL의 합병을 저지하기 위한 맹렬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가망없는 협상 중에 양쪽의 갈등은 눈덩이처럼 쌓여 갔다. 이 갈등이 마침내 방송중단 사태로 폭발한 것이다.

    디즈니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즈니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와 합병한 타임 워너가 인터넷과 디지털TV를 연계하는 인터랙티브 전략을 구사해 시청자들을 독점해 버릴 것이 분명하다며 우려하고 있다. 그렇게 될 경우 타임 워너를 제외한 미디어 그룹들은 생존조차 불투명해진다는 것이다. 폭스, CBS, NBC 등 미국의 나머지 방송사들은 이러한 디즈니의 주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줄리아니 시장과 뉴욕의 찰스 슈머 상원의원 등 정치인들까지 중재에 나선 덕에 지난 5월2일 ABC 방송은 중단 39시간만에 재개되었다. 타임 워너와 디즈니의 협상 기한은 7월15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악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는 두 공룡 미디어 그룹이 7월까지 극적인 타협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미국의 시청자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7월로 미루어진 ‘미디어 전쟁 제 2라운드’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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