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9

2020.10.09

진중권 “종북몰이보다 대북정책 편향 지적하는 게 보수의 싸움법” [진중권의 직설 18]

“상대의 논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능력 키우는 것이 보수에게 절실한 과제”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9-29 16: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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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뉴스1]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뉴스1]

    박근혜 정권 시절에 노회찬·유시민 씨와 ‘노유진의 정치카페’라는 팟캐스트를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방송에서 유시민 씨는 청와대나 새누리당에서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이나 일을 할 때마다 ‘내재적 접근을 해 보자’고 말하곤 했었다. 다시 말해 정권 측에서 하는 말이나 일을 한번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돌려 까기 위한 반(半) 농담에 가까웠지만,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렇게 입장을 바꿔 보는 것이 상대의 의사나 의도를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 그것만으로도 상대를 겨냥한 비판의 정확성과 설득력을 꽤 높일 수가 있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

    우리나라에서 ‘내재적 접근’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것은 재독학자 송두율 씨로 기억한다. 북한 사회를 자본주의 체제의 기준으로 비판할 게 아니라, 북한 정권이 표방하는 사회주의적 가치를 기준으로 비판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이념을 놓고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다 보면 아집에 빠져 상대방에 대해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내재적 접근’이 북한을 비판하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인 것은 아니다. 

    송두율 씨의 생각은 이른바 ‘자문화 중심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을 정치의 맥락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주의 체제에 자본주의의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자문화중심주의’, 일종의 문화제국주의라는 것이다. 이 비판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함정이 숨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모든 것을 문화적 상대성으로 치부하는 순간, 우리는 기준의 보편성을 잃고 문화상대주의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북한의 인권문제도 북한체제의 시각으로는 얼마든지 정당화될 게다. 이 모두를 허용하면 ‘인권’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로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내재적 접근’을 주장하는 송두율 씨의 주장은 다분히 북한체제의 옹호론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 편향은 그를 국가보안법으로 체포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풀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국가보안법’을 옹호하는 이들 역시 ‘내재적 접근’의 은밀한 옹호자들이다. UN에서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반인권적”이라며 폐지를 촉구했을 때, 한국의 우익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내세워 ‘인권’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무력화시켜 왔다. 남한의 반인권적 제도가 분단 상황이라는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북한의 반인권적 행태들도 같은 논리로 다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주창하는 ‘내재적 접근’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판을 할 때에 먼저 사유실험을 통해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이때 ‘나 역시 그와 똑같이 했을 것’이라 판단이 된다면, 그 비판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비판은 보편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중에 ‘내로남불’ 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일단 그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봐도 그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그때 비판을 해도 늦지 않다. 아니, 그런 비판이야말로 진정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그런 비판은 힘이 매우 강하다.

    ‘호의의 원칙’을 적용해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유튜브채널 '알라뷰'를 진행하는 유시민 이사장. [알릴레오 화면 캡처]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유튜브채널 '알라뷰'를 진행하는 유시민 이사장. [알릴레오 화면 캡처]

    상대의 주장에 내재적 접근을 할 때에 필요한 것이 이른바 ‘호의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다. 이는 ‘상대가 설사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일단 그를 이성적 존재로 여겨 그가 하는 말을 되도록 말이 되게 해석해 주라’는 해석학의 원칙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그 부분을 비판하라는 것이다. 그 부분이야말로 상대가 제 논리를 가지고도 정당화할 수 없는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비판을 할 때 상대가 도저히 방어할 수 없는 지점이 어딘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지점을 과도하게 넘어설 경우 상대에게 빌미를 줘서 역공을 당하기 십상이다. 



    예를 들어 유시민 씨가 최근 김정은 위원장을 가리켜 “계몽군주”라고 했다. 호의의 원칙을 적용하여 해석하면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이 김일성·김정일과 달리 합리적인 구석이 있다는 뜻이리라. 실제로 김정은은 과거의 ‘수령 무오류론’에서 벗어나 인민들 앞에서 경제정책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하기도 하고, ‘축지법’과 같은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전설일 뿐이라고 말하는 등 나름 합리적인 면모를 보여 왔다. 이번에도 이례적으로 남측에 신속히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 아마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게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를 ‘계몽군주’라 부른 것은 분명히 선을 넘은 것이다. 

    반북 이데올로기를 발동해 북한의 신속한 사과를 애써 폄훼하거나, 정권의 ‘종전선언’ 추진 자체를 반대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사안을 진영대립이나 이념갈등으로 바꿔놓으면, 현 정권에서 추진하는 대북정책에 공감해 온 계층을 모두 적으로 돌려세우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권에서 추진하는 대북 유화정책을 인정하되, 그 가치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국가의 책무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낫다. 이런 식으로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드러나는 ‘편향’을 정확히 지적해야 한다. 이런 비판에는 보수만이 아니라 중도와 진보의 일부까지도 동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가장 효율적인 비판은 상대의 논리를 활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현 정권에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남북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자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북한의 비인도적 조처로 자국민이 희생당했는데 결의안조차 못 낸다면, 이 사건을 처리하는 정권의 자세에 뭔가 ‘편향’이 있다는 얘기다. 그것만 지적하면 된다. 게다가 민주당은 세월호 사건 이후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임을 강조해 왔다. 자기들이 표방해온 가치를 수호하고, 자기들이 강조해 온 책무를 수행하는 데에 자기들이 실패한 것이다. 이 얘기를 하려고 굳이 반북 이데올로기로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

    집회가 표현주의 예술인가

    8.15 광화문집회. [뉴스1]

    8.15 광화문집회. [뉴스1]

    ‘남북관계의 개선이 중요하지만,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국가의 책무가 더 중요하다. 남북관계의 개선도 실은 이 상위의 가치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는 분명히 보수의 스탠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스탠스는 동시에 보편성이 있기에 보수가 아닌 이들에게까지 소구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보수진영에서는 이런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종북몰이’로 일관해 왔다. 상식을 향해 전선을 넓혀야 할 순간에 좁은 이념으로 퇴행하는 식으로 자신을 고립시켜 온 것이다. 대통령이 ‘간첩’이라거나 정부가 ‘종북’이라는 주장은 보수의 일각에서나 상식이지, 바깥에서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보수에 부족한 것이 바로 이 ‘내재적 비판’의 능력이다. 상대의 논리를 안에서 무너뜨려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되니 종북 ‘딱지’를 붙여 밖에서 두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상대에게 타격을 주기는커녕 괜히 상대만 결집시켜 주고, 자신을 진영의 좁은 울타리에 가두게 된다. 진영 안에 갇히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잃게 된다. 8.15 광화문 집회는 보수가 ‘자기 객관화’의 능력마저 잃었음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 ‘시위’는 제 주장을 밖으로 알려 사회적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하는 것. 그런데 사회에서 만류하는 집회를 강행하면서 대체 누구를 설득하겠다는 말인가. 

    인터넷 댓글에 대통령을 ‘문재앙’, ‘문죄인’이라 적는 이들이 있다. 내 경우에 그런 표현이 들어간 댓글들은 아예 읽지를 않는다. 그런 글은 대통령보다는 글쓴이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공산당’이니 ‘종북좌파’니 하는 마찬가지다. 이런 표현이 들어간 글들은 민주당의 문제보다는 외려 그 당을 비난하는 이들의 문제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냥 쌓인 분노를 분출해 해소하려고 쓰는 글이라면 말릴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글쓰기로 어떤 정치적 효과를 노린다면, 생각을 달리 해야 한다. 그런 글은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역효과만 내기 때문이다. 

    병서에 이르기를 ‘지피기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정치의 맥락에서 ‘지피’(知彼)는 내재적 비판의 능력을, ‘지기’(知己)는 자기 객관화의 능력을 가리킨다. 지피도 안 되고 지기도 안 되면 싸움에 이길 수가 없다. 보수가 다수이자 주류였을 때에는 ‘종북몰이’로 비판을 대신하고 제 입장을 독단적으로 내세워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 안주하다 보니 보수가 내재적 비판과 자기 객관화의 능력을 습득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보수인사들의 거친 언설을 들어보면, 그 목적이 남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판은 표현주의 문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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