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국방백서에서 ‘주적’ 개념이 사라졌다.
국어사전에 ‘적(敵)’이란 단어는 있어도 ‘주적(主敵)’은 없다. 영한사전도 ‘enemy’를 적으로 번역해놓았지 주적으로 번역하진 않았다. 그렇다면 정부가 부활시키려는 주적의 개념은 무엇일까.
국방백서 발행주기가 2년으로 정례화된 것은 2004년 이후부터. 국방부는 1988~2004년까지는 매년 발행했고, 1988년 이전엔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만들었다(표 참조). 이승만·윤보선·전두환 대통령 시절엔 발행한 적이 없다. 국방백서를 두 차례 발행한 박정희 정부 때는 북한을 ‘북괴’로 표현해 적개심을 표출하는 데 그쳤을 뿐, 적이나 주적이라는 개념을 세우지 않았다.
국방을 하려면 목표(국방목표)가 있어야 한다. 이 개념은 전두환 정부 때 처음 정립했다. 국방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것이니, 그 목표는 국가목표 달성에 일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따라 ‘첫째, 자유민주주의 이념하에 국가를 보위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여 영구적 독립을 보장한다’는 등 세 가지로 정의된 국가목표가 설정됐다. 그리고 1981년 11월 28일 열린 국방부 정책회의에서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방목표는 적의 침공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고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며 지역적인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적’이라는 단어를 넣어 처음 국방목표를 세운 것이다.
1988년 국방백서에 ‘적’ 단어 들어가
이러한 사실은 공개되지 않다가 노태우 정부 출범 첫해인 1988년 발행된 ‘1988 국방백서’를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국방백서에 ‘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음을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노태우 정부는 공산국가들을 서울올림픽에 참여시키고 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북한과도 교역을 한다는 ‘7·7선언’을 했다.
이 노력이 성공을 거둬 서울올림픽은 8년 만에 동서 양 진영이 모인 큰 행사가 됐고, 한국은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1992년에는 남북기본합의서를 발효시켜 북한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 일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운동권 등에선 미국, 일본도 위협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무렵 1992년 1월 28일자 동아일보 1면에 ‘주적 개념 주변 열강으로 전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국방부가 발칵 뒤집혔다. 국방부는 ‘적이라는 말은 있어도 주적이라는 말은 없다. 도대체 주적이 무엇이냐’ ‘주변 열강은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으니 가상 적은 될 수 있어도 적은 될 수가 없다’ ‘주변 열강의 대표인 미국이 우리의 (주)적이 될 수 있느냐’는 등의 논리로 반박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 국방백서에는 적이란 단어가 들어 있지 않다. 적에 해당하는 것은 대개 ‘위협’으로 표현한다. 언론이나 학계에서는 위협을 ‘가상적(假想敵)’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국방부는 이러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 기사를 쓴 당시 김재홍 기자에게 따졌다. 2001년 퇴직한 김재홍 전 국회의원은 그 후 필자에게 이런 해명을 한 바 있다.
“1991년 김진영 대장이 제29대 육군총장에 취임하면서 ‘한반도에는 북한 외에도 위협 세력이 많다’고 연설했고, 최세창 국방부 장관은 ‘21세기에는 북한뿐 아니라 주변 위협에도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연설했다. 1992년 1월 28일 최세창 국방부 장관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유사한 취지를 담은 업무보고를 했기에 ‘지금까지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주적 개념이 주변 열강의 잠재적인 군사위협을 겨냥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라고 보도하게 됐다.”
이 설명대로라면 국방부에서는 ‘위협’이라고 한 것을 기자가 임의로 ‘주적’으로 바꿔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가 제시한 보충자료를 정리하면 이렇다.
북한에서 시비 DJ 정부 때 삭제
‘영미권에 주적을 뜻하는 단어 mainenemy가 없다. 대신 큰 적(大敵)을 가리키는 archenemy라는 단어는 있다. 우리 국어사전에도 주적이란 단어는 없고 대적(大敵)이라는 단어는 올라 있다. 큰 적인 archenemy를 일부 일본 매체가 주적(主敵)으로 번역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을 큰 적으로 보고, 주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위협을 주적으로 표현했다.’
정확히 말하면 잘못된 단어인데 우리 사회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그러나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애초 의도는 주변국을 주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보수파는 북한을 주적으로 부르고자 한 것이다. 이런 기류는 1993년 북한이 NPT(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1994년 3월 19일 북한의 박영수 대표가 판문점에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국방부는 북한의 불바다 발언 직전인 1994년 3월 10일 ‘적의 무력침공으로부터’라는 표현을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침략으로부터’로 바꿨다. 선진국 국방백서는 ‘적’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국방부는 그해 말 발행한 ‘1994~1995 국방백서’에 이 내용을 포함시켰다. 그러자 국방부를 향해 “주적이라는 말을 넣으라”는 보수층의 맹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국방부는 ‘1995~1996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상정한다’는 표현을 넣었다. 이때 주적은 대한민국이 만나게 될 여러 외부의 위협 중 북한을 가리킨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이 표현은 김대중-김정일의 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던 2000년 말 발행된 ‘2000 국방백서’에도 남아 있었다.
그러자 북한은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라는 표현을 빼라”며 2차 국방장관회담을 무산시켰다. 김대중 정부는 이에 굴복, 2001년 국방백서를 내지 못했다. 그해 국방부는 국방목표 항목이 빠진 ‘2001년 국방 주요 자료집’을, 2002년에도 역시 국방목표 항목이 빠진 ‘1998~2002 국방정책’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노무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노무현 정부는 국방백서 대신 ‘2003 참여정부의 국방정책’을 펴냈다. 그리고 2004년 발행한 ‘2004 국방백서’에서 ‘주적’이라는 단어를 뺀 국방목표를 게재하기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에 발행한 ‘2008 국방백서’에도 역시 주적 개념이 빠져 있다.
이번에 이명박 대통령이 부활시키겠다고 천명한 것이 바로 이 주적 개념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을 주적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국어사전에 ‘남북한 분단 상황에서 도발을 일삼은 적 북한을 특별히 지칭하기 위해 쓴 말’이라는 뜻의 주적이란 단어가 포함될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