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06 513 호 (p 77 ~ 77)
[김정한 박사의 ‘자녀들과 함께 數學 하기’]

원리는 잊어버리고 공식만 외우는 세태
미국 MS수학연구소 선임연구원/ jehkim@microsoft.com
 

수학자 오일러

필자는 대학시절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나중에 수학으로 과를 바꿨다.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된 이후 변화한 점은 시험 보는 일이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실타래 풀 듯 하나씩 꼬리를 물고 정리되는 생각들을 적어내면 됐기에, 시험 전날은 오히려 할 일이 없어 시험 준비에 바쁜 친구들에게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표현하면 남들한테 ‘머리가 좋으셨군요’ 하는 비난조의 칭찬을 듣게 된다. 그러나 필자는 머리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원리를 이해한다면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답한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국 수를 순서대로 외우고 어머니들이 복잡한 요리 순서를 익히고 있듯, 수학의 문제풀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안타까운 느낌이 든다. 학생들은 어떤 틀을 찾아서 문제를 그 틀에 맞춰 풀어야 안심하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 푼 것은 완전치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미분의 원리를 설명하고 공식을 가르쳐주면, 원리는 잊어버리고 공식만 기계적으로 적용한다. 이렇듯 공식만 알고 있으니 문제가 배운 것과 조금만 달라도 풀지 못하고 쩔쩔매게 되는 것이다.

18세기 대표적 수학자인 오일러는 프랑스 과학원에서 주최하는 수학 콘테스트에 자신의 첫 수학 논문을 제출했다.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유럽의 쟁쟁한 수학자들이 참가한 이 대회의 주제는 선박의 돛대에 관한 내용이었다. 바다가 없는 스위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오일러가 선박이나 돛에 대해 알 리 없었지만, 그의 논문은 경험 많은 선배들의 논문을 제치고 2등상을 받게 됐다. 수학적 논리로 훈련된 그의 생각은 스위스의 산맥을 넘고 이웃나라 프랑스를 건너 대서양에 떠 있는 선박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오일러는 그 후 방대한 분량의 수학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죽은 뒤 47년 동안 계속해서 새 논문들이 발표될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다고 한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그의 연구 환경이다. 그에게는 1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는 주로 집에서 연구를 해 주변은 언제나 아이들의 괴성으로 어수선했다고 한다. 게다가 말년에는 실명(失明)에 이르렀지만, 그의 연구는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수학에 대해서는 문맹이나 다름없는 비서에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 적게 하여 400여 논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공식을 외워 풀어나가는 것이 수학이라면 빛을 볼 수 없는 이가 오일러였을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시험의 중요성만 강조한다. 아이들은 시험이 닥쳐야 공부에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데, 벼락치기 공부는 창의력을 제한하고 오히려 시들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의문은 뒤로 미룬 채 시험에 나올 만한 것,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만 공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해하여 응용하는 데 드는 노력과 암기하여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드는 시간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것같이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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