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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38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수릉(綏陵)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3차례 천장 끝에 구리시에 자리잡은 수릉은 제례의 시작과 끝남을 알리는 배위(판위)가 홍살문 앞에 놓인 것이 특이하다. 배위의 위치는 후세에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홍살문 앞 네모난 판석이 깔린 곳이 판위다).

수릉(綏陵)은 조선 제24대 임금인 헌종의 부모 추존 황제 문조(文祖, 1809~1830)와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1808~1890) 조씨의 합장릉이다. 문조는 제23대 순조의 큰아들로 효명세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세자로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그의 아들 헌종이 대를 이은 뒤 추존됐다. 수릉은 아들 헌종의 능원이 있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의 동쪽 언덕 현릉(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아래 능선에 있다. 헌종의 경릉과 동구천 계곡을 끼고 동강(동측 언덕) 서강(서측 언덕) 하고 있다.

문조는 1809년에 태어났으며 순조 12년 3세에 왕세자에 책봉돼 효명세자로 불렸는데,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부터 왕위 계승을 위한 대리청정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승하해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이다. 그는 당시 안동 김씨 세도정치 세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순조를 도와 왕권을 강화하던 중이었다.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배척하고 인재를 널리 등용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대리청정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자신의 하례식 절차가 잘못됐다는 이유를 들어 외가인 안동 김씨 세력을 감봉 처리하고 질책하기도 했다.

외할아버지이며 안동 김씨의 실세였던 김조순에게 맞섰던 박종경의 아들을 등용하는 등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여러 분야의 인재를 등용했다. 김조순이 지금의 종로구 삼청동 경복궁 북동편에 옥호정(玉壺亭)이라는 개인 별장을 지어놓고 호세를 부릴 때였다. 그러나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만에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통치기반을 다져갈 무렵 세상을 등졌다.

통치기반 착착 다지다 세상 등져

효명세자는 역대 세자 중 예술문화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별히 춤사위를 즐겼다 한다. 궁과 종묘에 쓸 연향 등을 새로 만들고 발굴했으며 대규모 연회를 열기도 해 조선 궁중 향연의 절정기를 이루게 했다. 일종의 왕권 강화를 위한 국가적 시위로 해석된다.

왕위 계승자이며 잘나가던 아들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순조는 힘을 잃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다 4년 후 세상을 떴다. 이 틈을 타 안동 김씨 세도정치는 극에 달했다. 이에 왕실에서는 효명세자의 유일한 적자인 어린 나이의 환(奐·후에 헌종)을 왕세손으로 지명하고 곧바로 왕위를 받게 했다. 이와 동시에 순조의 비이자 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에 들어갔다.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는 추존돼 익종(翼宗)이 됐으며 능호는 연경묘에서 수릉(유릉이라 부르기도 한다)으로 바뀌었다. 이후 익종은 고종 때 문조익황제로 추존됐다. 효명세자의 왕실 이름(謂)은 영( ,한자 원음은 대인데 왕실에서 영으로 불렀다)으로 세자 책봉 후 효명(孝明)으로 불리다 추존왕 익종, 추존황제 문조로 호칭이 여러 번 바뀌어 뭇 사람을 헛갈리게 한다. 아무튼 자신의 친증조부 사도세자(장조)와 양증조부 효장세자(진종)처럼 세자에서 황제까지 이르는 사후 대우를 받은 행운아이기도 하다.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조선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을 보여주는 수릉의 문무석인은 얼굴이 길쭉하고 눈과 입술을 선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문조 부인 신정황후 조씨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2세에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돼 세자빈이 됐으며 효부라 칭찬을 받았다. 효명세자 승하 3년 전에 유일한 자식인 헌종을 낳았다. 신정황후는 왕실생활 11년 되던 해 남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자 23세에 홀로 돼 82세까지 60여 년을 수절했다. 그러나 왕실의 큰 어른으로 장수했지만 그것이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신정황후는 시어머니 순원황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자신의 친정 세력인 풍양 조씨 사이에서 세력 다툼의 주역이 됐다. 조선 왕실을 손아귀에 넣고 군림하던 그는 조선 왕실을 패망하게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가 된 신정황후는 이후 철종 때 대왕대비가 됐으며, 철종의 5명 아들이 모두 일찍 죽자 흥선대원군의 차남(고종)을 철종의 양아들로 삼아 수렴청정을 했다.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은 원래 왕실계보(‘선원록’)에서 왕위 계승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로부터 계산해도 200여 년 전, 즉 9대조 위에서 대가 갈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던 것. 신정황후는 대원군의 차남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남연군을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의 후손인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했다. 이에 대한 보답일까. 고종은 신정황후 내외를 황제로 추존하고 비각의 글씨도 친히 썼으며, 온갖 정성을 다해 모셨다. 신정황후는 왕후를 못했지만 그 대신 대비, 대왕대비를 거치며 왕실에서 70년 이상 최고 대접을 받고 살았다. 조선의 비(妃) 중 왕실생활을 가장 길게 한 이다.

수릉은 원래 묘(墓) 형식으로 양주의 천장산(현 성북구 석관동 의릉) 남쪽 언덕에 있었으나, 헌종 즉위 후 추존왕 익종으로 추대되면서 수릉이라는 능호가 붙었다. 이후 세도정치의 풍파 속에 천장산 터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헌종 13년(1846)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했다가, 철종 7년(1855) 순조 비 순원황후 세력이 순조의 인릉을 파주 장릉 국내(局內)에서 서울 서초구 내곡동으로 옮기면서 수릉의 천봉론을 다시 내세워 그의 아들 헌종의 경릉이 있는 구리시 현 위치에 재천봉했다. 신정황후는 82세에 사망한 후 합장됐다.

이 능이 천봉되면서 동구릉 지역에는 9개의 왕릉이 들어서게 됐는데, 동구릉이라 부르는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이전까지는 동오릉, 동칠릉이라 불렀다. 왕실에서는 능역의 이름을 부를 때 설사 짝수의 능이 있다 해도 양수인 홀수로 서삼릉, 서오릉, 동오릉, 동칠릉, 동구릉이라 불렀다. 익종과 신정황후는 1899년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의 황제국으로 바꾸면서 윗대 5대조를 황제로 추존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로 추대됐다.

왕후 조씨는 70년 이상 왕실 주물러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수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지만 봉분 앞 혼유석을 하나만 마련해 단릉처럼 보인다.

수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릉이지만 봉분 앞 혼유석을 하나만 마련해 단릉처럼 보인다. 문인공간과 무인공간을 구분하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무인석이 같은 공간에 놓여 있다. 장명등도 문인공간과 무인공간의 중간에 배치돼 있다. 문인과 무인의 신분제도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상설은 영조 때부터 제정된 ‘국조상례보편’에 따른 것이다. 이때부터 문무석인의 얼굴이 길쭉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눈과 입술이 선으로 가늘게 표현된 특징이 생겼다. 얼굴은 원형에서 타원형으로 변형됐다. 어깨를 움츠리고 목을 앞으로 빼고 있는 형태에서 조선시대 후기 인물조각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수릉은 금천교가 사라졌고 제례 동선도 변형됐으며, 현재의 현릉 가는 길에는 수라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헌관이 제향의 시작과 끝을 고할 때 절을 올리는 배위(판위)도 홍살문 앞에 있어 원형 확인이 요구된다. 현재 동구릉 재실은 중수 복원 중이다. 원래 조선 왕릉 42기에는 재실이 모두 있었던 것으로 기록과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국가 혼란기를 거치면서 많은 재실과 능제 시설이 훼손, 멸실됐다. 재실은 능역을 관리하고 제례의 음식을 장만하는 ‘살아 있는 자’들의 공간이었다. 동구릉에는 수릉의 재실로 추정되는 재실 하나만이 남아 있다. 향후 9개 능원의 제례와 세계유산의 원형 보전을 위해 여타 능원의 재실도 복원돼야 한다.

능원의 제례는 세계유산 등재 때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능원의 제향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표적인 제향 몇 가지를 들면, 우선 선왕과 왕비가 승하한 날을 기리기 위해 드리는 기신제(忌辰祭)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각 능의 봉양회가 기신제를 올리고 있다. 태조 이성계의 기신제는 매년 6월 27일 낮 12시 전후에 올린다. 태조가 승하한 지 600주년 되던 바로 그날, 그 시각에 멀리 스페인 세비야에서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유산이 됐다고 필자가 연재 첫 호에 소개한 일이 있다. 이날 정오에 건원릉에서는 황사손 주도하에 태조 승하 600주년 기신제를 올렸다. 다시 생각해보아도 드라마틱하다.

기신제 다음으로는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지에 올리는 시제(時祭)가 있다. 그리고 능역을 개수한 전후에 올리는 고유제(告由祭)가 있는데 흔히 민가에서 ‘고사를 지낸다’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외에 정자각의 수리를 위해 신위를 옮기거나 다시 모실 때 올리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 능원에 화재가 났거나 지형 및 수림이 피해를 입었을 때 올리는 위안제(慰安祭) 등이 있었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 올리는 삭망제(朔望祭)도 있었다.

시제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종 20년(1525) 단오절 시제 전날 밤 헌릉(서울 서초구 세곡동)의 재실에서 잠을 자던 직원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 준비한 제례를 거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 흉한 꼴을 본 제관을 바꿀 것인지 죽일 것인지, 재실 안인지 밖인지 등에 대해 조정의 삼공이 논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인조 때는 창릉 능침의 화재로 잔디가 타는 바람에, 임란 때는 왜구가 선정릉(강남구)의 능침을 파헤치고 성종과 중종의 시신에 손상을 입혀 위안제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실록과 능지 등에 전한다.

왜 왕릉 주변에 갈비집인가?

왕실 제사는 소 잡는 날 … 백성들과 함께 요리


18살에 급서한 효명세자 ‘문조’로 거한 대우를 받다

수릉 기신제 진설(상차림) 모습. 왕실 제사는 생고기를 올리는 것이 통례로, 육제향에는 일부만 올리고 나머지는 능역 관리자나 주변 수호군, 관아 등에 보내 백성과 나누게 했다.

지금도 왕릉 주변에는 홍릉갈비, 태릉갈비, 수원(융릉)갈비 등이 자리해 인기를 끌고 있다. 왜일까. 왜 왕릉 주변에 갈비집이 모여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그만한 역사와 유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시 소를 잡는 걸 금기시했다. 소는 농사를 돕는 큰 일꾼이었기 때문이다. 단, 왕이 친행해 제사를 올리는 특별한 날에는 가능했다. 왕실 제사는 일반 제사와 달리 생고기를 올리는 것이 통례로 육고기는 우성(牛腥·소 생고기)과 양성(羊腥·양 생고기) 그리고 시성(豕腥·돼지 생고기)의 각 부위를 몇 점씩 올렸다. 물론 고기를 삶는 솥(鼎)도 챙겼다. 이때 제향에는 일부만 올리고 나머지는 능역 관리자나 주변 수호군, 관아 등에 보내 백성과 나누게 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 요리가 왕릉갈비다. 당시 용기가 부족했으므로 백성과 나눌 갈비를 새끼줄에 동여매 나누어 가지고 가 요리를 한 것.

세계유산위원회는 조선 왕릉을 세계유산에 올리면서 능역의 보존과 세계인이 향유할 관광자원화를 위한 계획을 권고한 바 있다. 이참에 왕릉을 대표하는 먹을거리의 보존과 개발도 병행돼야 한다. 제향에 올리는 오색과일, 전, 탕, 다과, 두부 등의 세계화도 이루어져야 지속적인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입증받을 수 있다. 한편 빠질 수 없는 술(제주, 왕주)과 술병, 술잔(爵) 등의 복원과 이것들의 상용화를 위한 관광상품 개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들이 바로 5000년 문화민족의 고급 먹을거리였다.


주간동아 2011.01.31 773호 (p108~110)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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