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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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서성이는 ‘90년대의 추억’

연극 ‘책, 갈피’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11-01-24 1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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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에 서성이는 ‘90년대의 추억’
    연극 ‘책, 갈피’(작·연출 이양구)는 대전의 한 서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재경, 재경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만년 2등 지혜, 재경을 좋아하는 작가 지망생 영복, 영복을 좋아하는 날라리 학생 보경, 서점 주인 지현, 지현을 좋아하는 현식 등 얽히고설킨 여섯 명의 이야기가 아기자기하고 진솔하다.

    시간은 지현을 제외한 인물들이 중학생이었던 1991년으로 돌아간다. 이후 1994년, 1998년, 2002년 그리고 이들이 서른 살이 된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들의 이야기는 도발적이지 않고, 새로운 화두도 없다. 하지만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보편성과 진정성을 띠고 있다. 30대 이상 관객은 순수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따뜻하게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고, 청소년 관객은 시대가 다름에도 자신들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고민거리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이 격하지 않게 진행되면서 그 속에 인물들이 생활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애환이 잔잔히 녹아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보들레르의 시 ‘앨버트로스’에 감정이입하며 작가를 꿈꾸던 영복이 더는 소설을 읽지 않는 사연이나 서점 주인 지현이 이혼 후 다시 서점에 출근하게 된 모습 등이 호들갑스럽지 않게 표현된다.

    내레이션으로 극을 진행하는 사회자는 재경이지만, 실질적 화자는 영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자서전의 형식을 취한다. 글쓰기를 접었던 영복이 극 말미에 서점에서의 추억을 담은 책을 쓰는데, 그에게 창작의 동기를 제공한 것은 소설 ‘길’이다. 대전 출신의 작가가 쓴 이 소설은 자신들의 아지트인 서점과 그 주변의 환경을 담은 책으로, 영복에게 다른 명작들이 주지 못한 생생한 ‘삶’을 제공했다. 또한 이러한 영복의 모습에서 작가의 자기 반영적인 문체를 감지할 수 있다.

    ‘첫사랑’과 ‘학창시절의 추억’을 다룬 작품은 많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전혀 진부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작·연출자인 이양구는 연극 ‘핼리혜성’ ‘별방’ 등을 통해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주목하며 자전적 내용을 담은 이야기를 애틋하고 따뜻하게 그려낸 바 있다.



    이 극은 소재, 드라마 전개 방식, 형식, 연기 등이 전체적으로 조화로웠을 뿐 아니라 무대 구성도 훌륭했다. 제한된 조건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내며 따뜻한 감성을 배가시킨 조명도 한몫을 했다. 단일 세트로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데 시대 배경에 맞는 음악, 브로마이드 등으로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 무대 구성에서는 재치까지 느껴졌다. 2월 27일까지, 대학로 상상아트홀 블루, 02-3676-3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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