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9일 정오. 차가운 겨울바람이 강원도 두메 산자락을 타고 불어오는 가운데, 머리가 희끗한 중년남성이 눈 쌓인 산기슭의 한 묘소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는 잔에 술을 부었다. 잔을 올린 뒤엔 묘소 주인의 유가족 부부에게 거듭 허리를 숙이며 들릴 듯 말 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1968년 10월30일~11월2일 강원도 울진-삼척으로 남파된 무장공비 120명의 일원으로, 아군에게 생포된 2명 중 1명인 김익풍(69·경기 구리시 거주) 씨였다. 유가족은 당시 공비들에게 무참히 희생된 고(故) 이승복(당시 9세, 강원 속사초교 2학년) 군의 형 이학관 씨 부부였다.
김씨가 평창군 노동리 이승복 군 묘소를 찾은 것은 지난 10월22일에 이어 두 번째. 이날은 이군이 숨진 지 41주기 되는 날로 공식적인 첫 방문이자, 유가족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굳게 입술을 다문 김씨의 얼굴엔 그간의 파란 많은 세월을 말해주듯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추모제는 이군의 생일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기도 한 12월9일 정오 이승복기념관과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공동 주최로 거행됐다.
“남한 사회 안보불감증 심각”
41년 전 이날, 이승복 군 집에는 메주를 쑤던 어머니 주대하 씨와 아랫방에서 옥수수를 다듬던 형 학관(당시 15세), 숙제를 하던 승복과 동생 승수(7), 승자(4) 다섯 식구가 있었는데, 학관 씨만 흉기에 36군데를 찔린 채 짚더미에서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이웃집에 이삿짐을 날라주러 갔다 화를 면한 승복 군의 할머니(강순길)와 아버지(이석우)는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다. 할머니는 1980년 사망했고 아버지는 아직 투병 중이다.
김익풍 씨는 이승복기념관 측이 소재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내 추모제 참석을 권유함으로써 이 자리에 오게 됐다. 김씨는 이승복 사건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는 1968년 10월 남한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주민 포섭하고 요인을 납치해 월북하라는 밀명을 받고, 거액의 위조화폐를 소지한 채 15명 1개조의 조장(당시 계급 중위, 정치부소대장)으로 공작선을 타고 울진-삼척으로 침투했다.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국가에서 준 보조금으로 시작한 사업은 사기와 경험 미숙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는 부인, 자녀와도 떨어져 구리시 외곽의 채소밭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직접 (이승복 일가와)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내 동료들이 잔인하게 죽인 아이의 묘 앞에서 착잡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잘 사십시오’라고 했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김씨는 한때 이승복 사건이 조작됐다는 논란이 벌어진 데 대해 “한심스러운 일”이라며 일축했다.
“(이승복 군이) 이북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절대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간첩은 일단 남한 주민을 포섭하려고 하지,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는다. 그 아이가 자기들에게 안 좋은 말을 했으니 ‘아, 우리를 신고하겠구나’ 싶어 죽인 것이다.”
김씨는 우리 사회의 안보 불감증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한때 안보강사로 활동한 그는 “처음 10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안보교육을 했다. 당시는 남한 국민의 안보의식이 투철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좀 심한 표현인지 몰라도 서울 시내가 꼭 평양 거리 같다. 북쪽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1999년부터 해마다 12월9일 이승복 묘역을 찾은 영관장교연합회는 이날도 120여 명이 모여 추모제를 지낸 뒤 ‘이승복 역사복원 결의대회’를 갖고 지난 정권 교과서에서 삭제된 이승복의 반공희생정신을 다시 수록하고, 초등학교 교정에서 사라진 이승복 동상 복원과 장학사업, 기념관 관람객 확대 등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가졌다. 또 십시일반으로 모은 금일봉을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김씨에게 전하기도 했다.
그는 1968년 10월30일~11월2일 강원도 울진-삼척으로 남파된 무장공비 120명의 일원으로, 아군에게 생포된 2명 중 1명인 김익풍(69·경기 구리시 거주) 씨였다. 유가족은 당시 공비들에게 무참히 희생된 고(故) 이승복(당시 9세, 강원 속사초교 2학년) 군의 형 이학관 씨 부부였다.
김씨가 평창군 노동리 이승복 군 묘소를 찾은 것은 지난 10월22일에 이어 두 번째. 이날은 이군이 숨진 지 41주기 되는 날로 공식적인 첫 방문이자, 유가족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굳게 입술을 다문 김씨의 얼굴엔 그간의 파란 많은 세월을 말해주듯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추모제는 이군의 생일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기도 한 12월9일 정오 이승복기념관과 육해공군·해병대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 공동 주최로 거행됐다.
“남한 사회 안보불감증 심각”
41년 전 이날, 이승복 군 집에는 메주를 쑤던 어머니 주대하 씨와 아랫방에서 옥수수를 다듬던 형 학관(당시 15세), 숙제를 하던 승복과 동생 승수(7), 승자(4) 다섯 식구가 있었는데, 학관 씨만 흉기에 36군데를 찔린 채 짚더미에서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이웃집에 이삿짐을 날라주러 갔다 화를 면한 승복 군의 할머니(강순길)와 아버지(이석우)는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했다. 할머니는 1980년 사망했고 아버지는 아직 투병 중이다.
김익풍 씨는 이승복기념관 측이 소재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내 추모제 참석을 권유함으로써 이 자리에 오게 됐다. 김씨는 이승복 사건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는 1968년 10월 남한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주민 포섭하고 요인을 납치해 월북하라는 밀명을 받고, 거액의 위조화폐를 소지한 채 15명 1개조의 조장(당시 계급 중위, 정치부소대장)으로 공작선을 타고 울진-삼척으로 침투했다.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국가에서 준 보조금으로 시작한 사업은 사기와 경험 미숙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는 부인, 자녀와도 떨어져 구리시 외곽의 채소밭 비닐하우스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직접 (이승복 일가와) 맞닥뜨린 것은 아니지만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내 동료들이 잔인하게 죽인 아이의 묘 앞에서 착잡했다. 유족에게 ‘미안합니다. 건강하게 잘 사십시오’라고 했다.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김씨는 한때 이승복 사건이 조작됐다는 논란이 벌어진 데 대해 “한심스러운 일”이라며 일축했다.
“(이승복 군이) 이북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절대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간첩은 일단 남한 주민을 포섭하려고 하지,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는다. 그 아이가 자기들에게 안 좋은 말을 했으니 ‘아, 우리를 신고하겠구나’ 싶어 죽인 것이다.”
김씨는 우리 사회의 안보 불감증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한때 안보강사로 활동한 그는 “처음 10여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안보교육을 했다. 당시는 남한 국민의 안보의식이 투철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좀 심한 표현인지 몰라도 서울 시내가 꼭 평양 거리 같다. 북쪽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꼬집었다.
1999년부터 해마다 12월9일 이승복 묘역을 찾은 영관장교연합회는 이날도 120여 명이 모여 추모제를 지낸 뒤 ‘이승복 역사복원 결의대회’를 갖고 지난 정권 교과서에서 삭제된 이승복의 반공희생정신을 다시 수록하고, 초등학교 교정에서 사라진 이승복 동상 복원과 장학사업, 기념관 관람객 확대 등을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가졌다. 또 십시일반으로 모은 금일봉을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김씨에게 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