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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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과 염불 소리의 어울림 이만한 교향악이 또 있을까

세속의 정욕과 잡념까지 말끔히 씻어주는 듯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6-23 17: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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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탁과 염불 소리의 어울림 이만한 교향악이 또 있을까

    화엄사 각황전.

    여행자는 피곤에 못 이겨 의자에 앉자마자 눈부터 감았다. 지난 닷새 동안 그는 하루에 겨우 네댓 시간을 빼놓고는 하루 종일 차를 몰았다. 차가 쉴 때도 그는 일을 했다. 일이 끝나면 다시 차를 몰았고, 밤을 도와 달려 다음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서둘러 그날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한 다음 몇 시간 눈을 붙인 후 또 달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딱딱한 성당 의자였지만 그의 몸은 연체동물처럼 쉽게 교합이 되었다.

    얼마쯤 흘렀을까. 정확히 셈한다면 설익은 잠은 10분 안팎의 일이겠지만, 허우적거리는 순간이 영원토록 달콤하게 이어질 것 같은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이 누군가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걸음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여행자는 억지로 눈을 떴다. 노인이었다. 노인은 회랑을 걸어가 소실점의 끝에 이르러 흡사 하늘을 떠받친 듯한 고딕 기둥의 뒤편으로 잠시 사라졌다가, 교단의 2층 구석으로 다시 나타나 십자가 아래의 오르간에 가서 앉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그곳으로 몇 점 떨어져 있었다. 노인은 오르간의 건반을, 중음역의 하나를 꾹 눌렀다.

    여행자는 몸을 바로 세웠다.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던 관광객도 갑자기 다 사라진 오후의 작은 성당이 묵직한 소리들로 꽉 차기 시작했다. 조율을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인은 건반을 한두 번 더 누른 후에 자리를 고쳐 앉으며 팔을 내려뜨려 두어 번 흔들어 잡사까지 마저 털어낸 뒤, 다시 자리를 정돈한 다음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였다. 첫 음이 그저 소리였던 것에 비해 이제는 하나의 음악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때 여행자는 꽤 오랫동안 들어왔다고 여겼던 바흐의 오르간 음악에 대한 모든 기억을 송두리째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동안 그가 들었던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그저 전자기기에서 새어나오는 음향이었던 것이다.

    노인이 누른 오르간 건반은, 그 아래에 연결된 수많은 파이프에 의해 광대역의 음악으로 확대되어 성당 내부의 회랑과 십자가와 벽과 의자들 사이로 넘쳐흐르면서 홀로 앉아 있는 여행자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하였다. 어디서 시작하여 언제 끝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소리는 서로가 서로를 애무하고 또한 공명시키며 끝없이 변주되고 확장되어, 마침내 성당 가득히 미묘하고 기이한 공기의 울림을 형성해 어느새 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여행자의 뼈와 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기둥을 돌아나온 음, 회랑을 스쳐나온 음, 궁륭을 거슬러 올랐다가 하강하는 음, 의자 사이로 빠져나온 음들이 아홉 갈래 머리를 풀어헤치며 여행자의 온몸을 휘감았으므로, 여행자는 그 순간 진심으로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범종의 소리는 물리적 측량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대해

    거의 신비 체험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2006년 6월 필자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성 안느 성당에서 생생히 겪었던, 일종의 예술적 ‘성령계시’를 쓴 것이다. 나는 그때 진실로 무한히 확장되는 음의 세계에 포획당하였고, 그때 비로소 왜 바이올린이나 트럼펫이 아니라 파이프오르간이 유서 깊은 성당의 가장 영험한 자리에 놓여 있는지를 신비스럽게 체험했다. 그 소리는, 그 음향은, 그 음악은 죄와 벌의 세계이며 은총과 계시이며 지상의 남루한 삶을 위로하는 천상의 거룩한 위로였다. 나는 그때 진실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지난주에 지리산에서 나는 성 안느 성당에서 겪었던 신비 체험과 다를 바 없는 ‘영적 체험’을 받았다. 지리산의 한 자락인 곡성 쪽에서 고(故) 조태일 시인의 문학관을 취재하고, 더 깊은 저녁이 되기 전에 한 군데를 더 답사하기 위하여 구례로 꺾어 들어가 화엄사로 올라갔다.

    단단하고 명징한 시를 써온 이성부 시인이 ‘능선길 이쪽과 저쪽이 딴 세상이라/ 이쪽 비탈에서는 바람 잔잔해 몸들 추스르지만/ 저쪽에서는 바람 사나워 몸들도 밀려간다’고 쓴 것처럼, 구례와 남원 사이의 국도를 벗어나고 사하촌의 요란한 간판들을 비켜 달리자마자 지리산은 곧 ‘화엄의 산’이 되었다. 산은 금세 깊어졌고, 천왕문을 지나, 이 사찰의 가람 배치에 따라 보제루 오른쪽의 운조각을 지나 경내로 들어섰을 때 대웅전은, 그리고 지리산의 산세를 그대로 묘사하여 지은 듯한 장엄한 각황전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행자는, 그러니까 나는 다소 지친 상태여서 보제루 앞에서 조금씩 줄어드는 관광객의 수를 세면서 쉬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곡성으로, 다시 구례로 쉬지 않고 움직였기에 피곤하였고, 그래서 하마터면 저물어가는 해를 못 이기고 깜빡 잠이 들 뻔했다. 그때 사찰 일을 보는 분이 스님들께서 나오시니 일어나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곧 저녁 예불이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

    일어나서 보니 어느새 저녁 예불 준비는 다 끝난 참이었다. 신도와 관광객들이 보제루 양편의 운조각과 범종각 아래에 모여 있었다.
    목탁과 염불 소리의 어울림 이만한 교향악이 또 있을까

    화엄사 보제루 뒷면의 화엄 현판.

    이윽고 스님들이 처소에서 나와 정중한 걸음으로 대웅전과 각황전으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몇 분의 젊은 스님들이 운조각과 범종각으로 올라갔다.

    그때부터 30분 가까이, 스님들은 법고(法鼓)를 시작으로 목어와 운판과 범종을 치며, 한번 들으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장엄한 경지의 예불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음악이면서 동시에 귀를 살랑거리는 저자의 소리가 아니라 지리산의 계곡과 능선이 함께 공명하며 무한하게 펼쳐져나가는 화엄의 기도가 되어 퍼져나갔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위로하고, 목숨을 다한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의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 극락으로 왕생시키는 소생의 소리가 지리산의 나무와 숲과 풀을 적시며, 소설가 김성동의 표현대로 ‘짙은 회색의 승복색’보다 더 짙어져가는 서녘의 하늘 위로 무한히 번져갔다.

    목탁과 염불 소리의 어울림 이만한 교향악이 또 있을까

    화엄사 저녁 예불.

    범종의 소리는 물리적 측량을 가늠하기 어려운 질량으로 공기를 밀어내고, 앞 소리의 경내에 그윽이 번져가는 순간에 다시 뒷소리의 명징한 소리가 뒤따라나와서,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몸을 완전히 감싸안아 돌면서, 가만히 서 있지만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만은 아닌, 그 순간만큼은 진실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잡상(雜想) 따위를 버리고 싶은 경지로 몰아갔다.

    그 모든 음향악이 끝났을 때, 33번의 범종 소리가 멈추고, 그 여운이 경내를 어루만지고 지리산 계곡으로 사라지는 순간에, 각황전에서 스님들의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그윽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진실로 피곤해서가 아니라 모종의 다른 느낌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로소 나는 내가 있는 곳이 다른 명칭의 사찰이 아니라 ‘화엄사’임을 생각했다. 아, 이 짧은 지면에서, 내 짧은 지식으로 어찌 ‘華嚴’의 세계를 논술할 것인가. 그러니 부족하다면 아니 한만 못하므로 시인의 각혈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

    시인 고은은 선재 동자의 구법 행각을 재현한 소설 화엄경에서 이렇게 쓴다.

    “미쳐라. 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자는 진리의 터럭 하나도 만나지 못하리라. 사람들이여, 사람들이여, 미쳐라. 미쳐 날뛰어 보아라. 미쳐야 별과 말하고 보장엄성의 성벽과 바위와 흙과도 죽은 자와도 말하리라. …사람들이여, 또한 어떤 일이나 항상 처음이 가장 귀중하다. 어떤 부자도 아기의 첫울음보다 부자가 아니다. 어떤 지혜도 보장엄성 소녀들의 첫 괴로움처럼 참되지 못하다. 어떤 공덕도 보살의 첫 발원이 갖춘 공덕에 비한다면 그 백분의 하나, 천분의 하나, 백천분의 하나, 억분, 백억분, 천억분 내지는 셀 수도 없고, 비유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수효로 나눈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어디에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가. 없다. 없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 황지우의 시 ‘화엄광주’ 절로 떠올라

    그리고 시인 황지우가 있다. 그의 화엄이 산속의 화엄인지, 또한 산속의 화엄이 불경의 화엄인지, 그 경전의 화엄이 부처의 화엄인지, 그 모든 것인지, 그것이면서 그것이 또한 아닌지, 최근 서구의 철학계가 주목한 대로 분리하여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 질곡의 모든 아비규환마저 감싸안으면서 새 경지로 한발 더 내디디는 건지, 그러한 ‘포월’(초월이 아닌)이 화엄인지 정녕 모르겠으나, 나는 해가 완전히 사라진 지리산 계곡의 반듯한 마당에 앉아서, 이제는 장엄히 그림자만 음각으로 남기는 각황전을 바라보며 시인 황지우의 화엄광주를 떠올렸다.

    하늘과 땅을 鎔接하는 보라色 빛/ 하늘의 뿌리 잠시 보여준 뒤/ 환희심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帝釋天,/ 저 멀리 구름장 밑으로/ 우뢰 소리, 도라무깡처럼 우르르르르 굴러오네/ 이윽고 비가 빛이 되고/ 願을 세우니, 거짓말이나니/ 희망은 作用하는 거짓말이므로/ (중략)/ 헛것들아, 헛것들아, 문 한번 지나간다고/ 해탈할까마는 이 문은 지나가는 것이제/ 빠져나가는 구멍이 아니랑게/ 선남선녀들, 아름다운 舌音과 母音으로/ 일렀으나 아귀들, 헛것들인지라/ 그리고 대저 헛것들일수록 불안감이/ 증가시키는 더 큰 힘을 쓰는지라/ 종기퉁성이 쇠방망이 휘두르며 더 날뒤네/ 이에 선남선녀들, 해탈문 아래 도솔천 계곡에/ 내려가 지천으로 불꽃 핀 불꽃들 꺾어/ 이 헛것들, 물러가라/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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