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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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의 패션 반란 “20대로 간다”

30, 40대 미시족 튀는 색상에 캐릭터 의상까지 … 나이 잊은 ‘캐주얼 브랜드’ 바람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2-11-27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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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들의 패션 반란 “20대로 간다”

    미시족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깜찍한 소녀풍이나 발랄한 캐주얼 패션을 주저 없이 구입한다.

    40대 초반의 회사원 이향숙씨는 최근 더플코트 두 벌을 구입했다. 빨간색 더플코트는 자신이 입으려고 산 것이고 베이지색 더플코트는 중학생인 아들 몫이다. 40대 아줌마가 중학생들이나 입는 더플코트를? 그러나 이씨는 “나이 때문에 입고 싶은 옷을 못 산 적은 한 번도 없다. 빨간색은 내게 어울리는 색이기 때문에 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씨의 생각은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최근 여성 패션에는 ‘나이 파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특히 두드러지는 경향은 결혼하고 아이도 있는 30, 40대 ‘미시족’들이 20대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 이 미시족들은 감각과 몸매가 20대 못지않아 55 정도의 소형 사이즈가 잘 맞을 뿐만 아니라 어떤 디자인이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20대 고객들이 머스크랫 토끼털 등으로 만든 중저가 모피를 입기도 한다. ‘20대는 캐릭터 캐주얼, 30, 40대는 정장’이라는 기존 패션 공식이 완전히 파괴되고 있는 것.

    R 브랜드의 경우, 원래 브랜드의 메인 타깃은 23세다. 그러나 실제로 이 브랜드의 옷을 사는 고객의 60%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며 32세 이후도 15% 정도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 같은 분석은 디자인실에서 내놓은 것이고 이 브랜드의 명동 매장 매니저는 “구매 고객의 60% 정도는 30대 이상인 것 같다”고 말한다.

    ‘정장 선호’ 기존 패션 공식 파괴

    아줌마들의 패션 반란 “20대로 간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아닌 스스로의 패션 취향에 따라 옷을 구입하라고 권유한다.

    아줌마, 아니 미시족 고객들이 선호하는 20대 브랜드는 주로 여성스럽고 발랄한 원색을 사용하는 브랜드들이나 소녀풍 디자인의 브랜드들. 여성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A 브랜드 역시 메인 타깃은 20대 초반. 그러나 이 브랜드의 판매 직원들은 “옷을 사 가는 사람의 50%는 30대 아줌마들”이라고 단언한다. “30대 고객은 분홍이나 연한 파란색 등 환한 색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요. 또 20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넉넉해서인지, 구매도 더 과감하게 하는 편입니다.”



    소녀 스타일의 대표격 브랜드인 G 브랜드의 옷 중에는 레이스가 달린 꽃무늬 스커트나 분홍색 나팔바지 등 깜찍 발랄한 스타일이 많다. 하지만 이 브랜드의 가장 큰 고객이 30, 40대 아줌마들이라는 것은 이미 패션계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기자가 명동의 G 브랜드 매장에 들른 날도 마찬가지였다. 4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이것저것을 걸쳐본 끝에 모자가 달린 분홍색 반코트를 골랐다. 함께 옷을 고르러 온 남편은 이보다 더 과감한 푸른색의 줄무늬 코트를 권하기도 했다. 남편의 카드로 옷값을 지불한 이 중년 고객은 “예쁜 옷 입고 싶어하는 건 나이를 막론하고 공통적인 여자 마음 아니냐’고 반문했다.

    ‘사틴’의 나지현 디자인 팀장은 최근의 소비자들이 나이를 막론하고 패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의 여성들은 ‘컬러’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튀지 않고 무난한 검은색 정장을 선호했죠. 하지만 요즘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는 소비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는 30대 이상 미시족에게 어울릴 만한 컬러로 밝은 겨자색과 연한 파스텔 톤의 블루를 추천했다.

    ‘기비’ ‘레니본’의 김재풍 디자인실 차장은 한국 패션 브랜드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20대 브랜드를 선호하는 미시족들이 탄생했다고 분석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여성복 브랜드가 대거 등장했습니다. 그전까지 고급 여성복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이었죠. 그러나 90년대 초반부터 젊은 여성들이 백화점에서 옷을 사 입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브랜드의 수도 큰 폭으로 늘어났죠. 이때 옷을 샀던 여성들이 현재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개성과 스타일을 찾는 데 익숙한 이 세대는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기존의 ‘마담 스타일’로 후퇴하지 않은 채 과거에 선호하던 20대 브랜드를 계속 구매하고 있는 거죠.”

    김차장은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난 이상, 나이로 메인 타깃을 정하는 기존 패션계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고 말한다. “패션계는 흔히 브랜드를 나이에 따라 영캐주얼, 캐릭터, 커리어, 마담 스타일로 나누어왔는데 이제 이런 구분은 점차 사라질 겁니다. 요즘은 해외에서도 나이로 브랜드를 구분하는 경향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심리적 나이 ‘따로따로’

    아줌마들의 패션 반란 “20대로 간다”
    최근 패션계의 세계적인 추세도 ‘귀여운 미시족’을 양산하는 데 한몫을 한다. 즉 무채색과 미니멀리즘 계열이 유행했던 세기말에 비해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희망의 컬러’인 밝은 파스텔 톤이 세계적 유행을 탔다. 이와 함께 구슬, 털 등을 달아 장식성을 강조한 보헤미안 풍이 유행하고 있다. 올 겨울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파리 컬렉션에서 파격적인 미니스커트와 스키웨어를 연상시키는 점퍼 등을 선보였다. 이처럼 세계적인 패션 경향이 한국에도 시차 없이 곧바로 소개되고 있는 것.

    그런데 재미있게도 패션 브랜드들은 자신들의 큰 고객이 30, 40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디자인에서 ‘절대로’ 이들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해보세요. 굳이 마담 브랜드를 입지 않고 우리 브랜드를 찾아오는 이유는 20대처럼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아줌마를 고려한 디자인을 내놓아서 매장에 아줌마들이 그득하면, 구매력 강한 미시족은 다시 더 젊은 브랜드를 찾아갈 겁니다.” 한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동덕여대 간호섭 교수(의상디자인)는 패션계의 ‘나이 파괴’ 바람에 대해 “이제 물리적 나이와 심리적 나이가 달라진 시대가 온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나이는 40대라도 생체적, 심리적 나이는 20, 30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으로 미숙하다는 뜻이 아니라 젊은 상태가 그만큼 오래 지속된다는 것이죠. 과거의 환갑은 노인이었지만 요즘 환갑은 중년인 것과 마찬가지인 이치입니다. 20대 브랜드를 입는 30, 40대는 언제나 젊고 싶어하고 또 젊을 수 있는 자신감의 소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빨간색 더플코트를 즐겨 입는 이향숙씨는 막상 더플코트를 입고 보니 학생들이나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이 옷을 많이 입고 다닌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다고. 이씨는 말한다. “좋아하는 옷이랑 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맞는 말이다. 어차피 패션은 즐기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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