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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가벼운 KBO의 ‘엄중 경고’

‘벌칙내규’에 없는 조치인 데다 실효성 없이 남발 … 팬들 “경고라도 제대로”

한없이 가벼운 KBO의 ‘엄중 경고’

카지노 출입으로 엄중 경고 처분을 받은 LG 트윈스 투스 LD 차우찬. [뉴스1]

카지노 출입으로 엄중 경고 처분을 받은 LG 트윈스 투스 LD 차우찬. [뉴스1]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는 원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칼’이라는 뜻. 하지만 이 표현을 이런 의미로 쓰는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일상 언어생활에서 전가의 보도는 ‘실제론 효과가 없는데 효과가 있을 것처럼 마구 남발하는 뻔한 대책’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엄중(嚴重)’이라는 말도 비슷합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낱말을 ‘몹시 엄함’ ‘엄격하고 정중함’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엄중 경고’ 처분을 내릴 때 실제로 몹시 엄격하고 정중한 처벌이라고 느끼는 야구팬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입니다.


‘엄중’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

KBO는 전지훈련을 떠난 호주 시드니에서 카지노에 출입한 LG 트윈스 선수 세 명(오지환·임찬규·차우찬)에게 엄중 경고 처분을 내렸다고 2월 18일 발표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야구팬 사이에서 “KBO가 또 ‘갓중 경고’라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물론 이때 등장한 접두사 ‘갓(god)’은 ‘최고’라는 뜻이 아니라 ‘불 보듯 뻔한 결론’이라는, 비꼬는 의미로 붙인 겁니다. 어쩌다 KBO의 엄중 경고가 이렇게 놀림감이 된 걸까요. 도대체 엄중 경고란 무엇일까요. 

KBO 리그 규정은 프로야구 구단, 감독, 코치, 심판위원, 기타 관련 해당자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고 판단되면 KBO 총재가 ‘벌칙내규’에 따라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실제 제재를 내릴 때는 총재가 혼자 결정하기보다 총재 자문기관인 상벌위원회를 열어 수위를 결정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벌칙내규는 엄중 경고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벌칙내규 23개 조항 중 어디에도 ‘엄중 경고’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경고’ 자체는 벌칙내규 16개 조항에 적용할 수 있는 제재 수위지만 ‘엄중 경고’라는 수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범위를 리그 규정 전체로 넓혀도 ‘엄중’이라는 낱말은 다음과 같이 ‘구장질서를 문란케 한 자에 대한 처벌’ 조항에 딱 한 번 등장할 뿐입니다. ‘규약, 리그 규정에 의거, 제재를 받은 감독, 코치, 선수, 심판위원은 총재에 의해 엄중한 제재(제재금, 출장정지 또는 병과)가 가해진다.’ 

여기서 병과(倂科)는 ‘동시에 둘 이상의 형벌에 처하는 일’(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KBO가 이야기하는 ‘엄중한 제재’는 제재금을 내거나, 출장정지를 받아 경기에 나서지 못하거나, 아니면 제재금도 내고 출장정지도 당하거나 하는 세 가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제재금과 출장정지 처분을 받으면서 엄중 경고도 받는 일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엄중 경고를 받은 선수는 따로 제재금을 내거나 출장정지를 당하지 않습니다. 엄중 경고는 그냥 경고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엄밀히 말해 엄중 경고는 근거를 찾기도 힘들고 리그 규정에서 정의한 것과 내용이 맞지 않는 제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엄중 경고가 아무 효력이 없는 제재는 아닙니다. KBO 관계자는 “엄중 경고를 받은 사람이 또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가중 처벌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김응용 전 한화 이글스 감독은 2014년 9월 11일 엄중 경고 누적으로 제재 수위가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당시 김 감독은 심판에게 욕설을 해 퇴장당했습니다. 벌칙내규에 따르면 이 경우 가장 높은 징계 수위는 제재금 50만 원이었지만 상벌위원회는 김 감독이 이미 그해 5월 엄중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제재금 200만 원을 부과했습니다. 2010년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던 외국인 타자 카림 가르시아 역시 엄중 경고 누적으로 가중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가중 처벌의 우려가 있다는 게 실제로 행동 제약을 불러오는지는 모르겠지만, KBO 홈페이지에서 보도자료 확인이 가능한 2001년 4월 1일 이후 엄중 경고 누적으로 가중 처벌을 받은 사례는 이 두 명뿐입니다.


어설픈 엄포

서울 강남구 KBO 사무실. [뉴스1]

서울 강남구 KBO 사무실. [뉴스1]

‘동아일보’ 기사 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면 프로야구에서 처음 엄중 경고를 받은 건 1990년 빙그레(현 한화) 이글스 구단이었습니다. 빙그레 안방구장이던 대전야구장(현 한화생명이글스파크) 1루 코치 박스를 규정(15피트·약 4.5m)보다 약 90cm 앞에 그렸던 게 문제였습니다. 그해 5월 17일 대전에서 경기를 펼친 해태(현 KIA) 타이거즈는 “1루 코치 박스가 이렇게 앞으로 나와 있으면 상대팀 사인을 훔치기 쉽다”고 주장하며 “빙그레의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앞으로 빙그레와 경기를 안 하겠다”고 KBO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에 KBO는 빙그레 측에 진상 보고서를 요구한 뒤 엄중 경고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다음 엄중 경고 처분을 받은 건 LG 구단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2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LG와 해태 팬 100여 명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패싸움을 벌여 1시간 7분 동안 경기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엄정한 법 집행’을 지시할 정도로 사회적 파장이 컸습니다. KBO는 “안방구장의 질서 유지에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LG 구단에 엄중 경고를 내렸습니다. 

요컨대 원래 엄중 경고는 전년도 챔피언이 특정 팀과의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공식 채널을 통해 밝히거나, 대통령이 문제를 삼을 정도로 경기장 안에서 심각한 난동이 발생했을 때, 그러니까 KBO가 아주 강력한 액션(?)을 취할 필요가 있을 때 꺼내 들던 카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도 ‘사후약방문’ ‘어설픈 엄포’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처럼 엄중 경고 카드를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실제 기록을 찾아봐도 엄중 경고가 늘었습니다. 2001년 이후 지난해까지 18년 동안 보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KBO의 엄중 경고는 총 60번. 이 가운데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나온 엄중 경고가 24번으로 40%를 차지합니다. 2001~2005년 5년 동안에는 엄중 경고가 10번밖에 없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엄중 경고 카드를 꺼내 들다 보니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엄중 경고하는 악순환에 빠진 겁니다.


용건은 간단히

‘경향신문’(왼쪽)과 ‘동아일보’에 실린 1990년 8월 26일 야구팬 난동 사건. [경향신문, 동아일보]

‘경향신문’(왼쪽)과 ‘동아일보’에 실린 1990년 8월 26일 야구팬 난동 사건. [경향신문, 동아일보]

이런 일이 생긴 건 KBO에서 제재를 내릴 때 외부 시선을 너무 의식했기 때문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제재를 통해 내부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 ‘우리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고 대외적으로 보여주려는 목적이 강하다 보니 엄연히 벌칙내규에 존재하는 경고보다 더 센 표현을 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KBO에 부탁건대 이제 그냥 경고만 합시다. ‘엄중’이라는 표현이 붙는다고 그 제재가 더 세다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미 벌칙내규에 ‘해당 연도에 경고를 포함하여 1회 이상 내규를 위반하였을 경우 가중 처벌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나와 있기 때문에 꼭 엄중 경고를 받은 사람에게만 가중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프로야구는 올해 한국 나이로 서른여덟 살이 됐습니다. 이 정도면 ‘너 말이 짧다’고 싸울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걸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솜방망이도 제 무게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간동아 2019.02.22 1177호 (p62~64)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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