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세계 최고의 스나이퍼는 누구일까. 아마도 옛 소련의 목동 출신 바실리 자이체프(주드로)일 것이다. 그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 476명(장교 50명)을 혼자 ‘원 샷, 원 킬’로 해치웠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의 실제 모델이 바로 그다.
허정무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이 애타게 스나이퍼를 찾고 있다. 원 샷, 원 킬! 어디 한 방에 해결해줄 마땅한 스나이퍼가 없을까. 마침 ‘확실한 한 명’은 있다. 박주영이다. 이청용도 잘하지만 그는 최전방 스트라이커가 아닌 미드필더다. 박주영은 요즘 물이 오를 대로 올랐다. 펄펄 날고 있다. 패스면 패스, 슛이면 슛, 헤딩이면 헤딩,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허 감독은 자다가도 박주영만 생각하면 입이 벌어진다. 미드필더진도 든든하다. 박지성-이청용-기성용이 박주영의 뒤를 받쳐주면 어느 팀과도 해볼 만하다. 문제는 4-4-2 포메이션에서 박주영과 짝을 이룰 만한 킬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요 국제대회의 슈팅수와 골 득점 비율은 보통 10%대다. 열 번 정도 슛을 날리면 한 골 정도가 들어간다. 하지만 스페인 브라질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 이른바 축구강국의 슈팅 성공률은 20%대로 껑충 뛴다. 네댓 번의 슈팅으로 최소 한 골 넘게 뽑아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느 정도나 될까. 한국 축구대표팀은 지난 1월 해외 전지훈련 도중 3차례 A매치를 가졌다. 3경기에서 날린 슈팅은 무려 37개. 그러나 골은 단 4개(10%)에 그쳤다. 남아공월드컵에서 맞붙을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박주영과 투톱에 누가 낙점될까
한국 축구대표팀의 골잡이 계보는 차범근-최순호-황선홍으로 이어진다. 차범근은 A매치 121경기에 출전해 55골을 성공시켰다. 게임당 0.45골. 황선홍도 103경기에 나가 50골을 터뜨려 게임당 0.49골을 기록했다. 최순호는 105경기에서 34골을 넣어 게임당 0.32골로 조금 낮은 편이다. 이 밖에 김도훈(71경기에 30골, 게임당 0.42골), 최용수(67경기에 27골, 게임당 0.40골)도 만만치 않다.
이동국은 얼마나 될까. 2010년 1월 현재 A매치 78경기에서 22골을 기록하고 있다. 게임당 0.28골에 불과하다. 이근호는 27경기에 8골로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 설기현은 83경기에 19골로 역시 미미한 수준이다. 현 축구대표팀의 골잡이들은 차범근, 황선홍, 최순호는커녕 김도훈과 최용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허 감독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골잡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펠레와 마라도나처럼 스스로 슈팅 기회를 만들어 골을 넣는 유형이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이동국처럼 동료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는 유형이다. 이동국 같은 유형은 페널티에어리어에서 어슬렁거리다 기회가 오면 볼을 잡아 골을 넣는다. 스트라이커는 기회가 오면 실수 없이 단 한 번에 끝내야 한다. 한 번 실수하면 그 경기에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독일의 클린스만은 기회가 오면 어김없이 골을 성공시켰다. 한국과의 경기에선 2골이나 그렇게 넣었다.
박주영과 최상의 조합을 이룰 투톱은 누구일까. 남은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동국 이근호 설기현. 프랑스리그에서 활약 중인 박주영은 최전방 스트라이커 한 자리를 사실상 예약했다
축구의 타깃형 스트라이커도 이와 비슷하다. 상대 중앙수비수는 대부분 건장하다. 요즘 열리고 있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나이지리아 중앙수비수는 프리미어리그 볼턴에서 활약 중인 데니 쉬트(191cm)다. 건장할뿐더러 빠르고 거칠다. 타깃형 스트라이커는 이들과의 몸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일단 공중전에서 헤딩으로 볼을 따내 박주영 같은 동료의 발 앞에 떨어뜨려줘야 한다. 4-4-2 포메이션에서 최전방 골잡이 2명이 모두 박주영 같은 스타일이라면 상대 수비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공중전이나 거친 몸싸움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청용 골 성공에 “바로 그거야”
허 감독은 이번 해외 전지훈련에서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울산현대의 장신 김신욱(196cm)을 데려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동국(187cm)도 아직 미심쩍다. 하지만 이동국만한 타깃형 스트라이커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설기현이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실전에서 뛰지 않았다. 허 감독은 “최근 큰 키를 지닌 타깃형 스트라이커에 대한 논란이 있는 것 같다. 대표팀에 타깃형이 필요한지, 아닌지보다 스트라이커로서의 종합적인 능력을 봐야 한다. 헤딩은 잘하는데 발재간이 없으면 안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번 전지훈련에서는 스트라이커들의 골 결정력이 미흡했다. 골대 앞에서 기회를 잡았을 때 감각적인 골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허 감독은 타깃형 스트라이커를 아예 안 뽑을지도 모른다. 키는 크지 않지만 헤딩 능력이 뛰어나고 활동량도 엄청난 선수를 박주영의 짝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 웨인 루니 같은 전천후 선수 말이다. 루니는 수비 가담 능력도 엄청나다. 때마침 박주영의 공중 볼 다툼 실력도 놀랄 만큼 향상됐다. 키는 182cm밖에 안 되지만 장대 같은 상대 수비수들 사이에서 볼을 따낸다. 서전트 점프가 무려 1m나 된다. 거의 배구선수 수준이다. 제주유나이티드 박경훈 감독은 “요즘 박주영의 적극적인 몸싸움과 빠른 슈팅 타임, 지능적인 플레이라면 프리미어리그 등 유럽 빅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한다”고 말했다.
이동국은 스스로 움직여 공간을 만드는 능력이 떨어진다. 움직임도 둔하다. 그래서는 상대 수비수들과의 다툼에서 이길 수 없다. 1월27일 이청용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번리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렸다. 볼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스스로 움직여 공간을 창출, 슈팅을 성공시켰다. “바로, 그거야.” 허 감독은 그 골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배우라고 말했다. 어쩌면 이동국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골을 넣을 당시 이청용의 모습을 보면 (골을 넣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알 수 있다. 공격수의 모범답안이었다. 이청용이 패스를 한 뒤 바로 파고들어 갔는데, 패스 후 제2동작이 중요하다. 패스 후 움직여줬기 때문에 골로 연결된 패스를 받을 수 있었다. 공격수는 공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가장 좋은 공간을 찾아가야 한다. 이청용이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 골을 넣으려면 어떤 움직임과 전술이 필요한지 이청용의 골이 많은 것을 보여줬다. 이청용과 박주영이 많이 성장했고, 또 성장하고 있다. 선수들의 체격이 크고 빠른 유럽리그에서 골을 넣는 모습이 많은 점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