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홍은 이번 월드컵에서 자신 때문에 포항제철의 팀 후배 이동국 선수가 23명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한 것에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실력 있는 후배가 자신 때문에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무대를 밟지 못한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든 것이다. 물론 스포츠 세계는 정글의 약육강식 생리와 비슷해 실력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만, 그래도 후배의 앞길을 막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아무튼 황선홍의 퇴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 축구의 변화를 의미한다. 황선홍은 1986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부상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국가대표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 그가 없는 한국 축구의 공격진은 어딘가 허전했고, 실제로 좋은 성적을 올린 적이 거의 없다. 한국 축구는 최근 10여년간 황선홍의 컨디션에 따라 웃고 울었다.

황선홍은 이번 월드컵에 출전한 736명의 선수 중 아르헨티나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이번 대회 첫 경기 나이지리아전 포함 56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골을 넣었다. 한국 축구는 황선홍의 골로 이번 월드컵 폴란드전을 포함해 국제대회에서 최소한 20승 이상을 올렸다.
황선홍은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는 한 경기 8골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이는 세계 축구계에 유례없는 대기록이다. 한 팀도 아닌 한 선수가 한 경기에서 8골을 넣었다는 것은 물론 상대팀이 약한 원인도 있겠지만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국내 프로축구에서는 8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신기록도 세웠다. 선수가 나갈 때마다 득점을 올려주면 감독은 할 일이 없어진다.

그러나 황선홍도 지나간 세 차례의 월드컵을 기억할 때면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 축구 월드컵 도전사와 맞물려 황선홍에게는 월드컵에 관한 한 ‘슬픈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이다. 황선홍은 지난 10여년간 한국 축구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정작 월드컵 무대에서는 번번이 불운을 겪어야 했고, 어느덧 축구선수로는 황혼기나 마찬가지인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황선홍은 독일과의 최종전에서 한 골을 뽑았지만 그 자신에게나 팬들에게나 모두 성에 차지 않는 성적이었다. 만약 황선홍이 미국 월드컵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의 절반만 발휘했어도 한국 축구의 ‘월드컵 1승’은 물론 ‘월드컵 16강’도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회는 16강이 아니라 8강 또는 4강을 목표로 했을 것이다. 미국 월드컵이 끝난 후 축구 전문가들은 황선홍이 스페인전에서 1골, 볼리비아전에서 2골, 미국전에서 1골 등 모두 4골을 놓쳤다고 폄훼했다. 황선홍이 국내 프로축구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볼 감각을 발휘해 주었다면 적어도 그 정도의 골은 넣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황선홍도 나중에 “뭔가에 씌인 듯 볼이 안 들어갔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실 황선홍의 전성기는 30대 초반이던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였다. 당시 황선홍은 체력적 기술적 정신적으로 절정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월드컵 때는 본선을 앞두고 치른 중국과의 친선경기에서 왼쪽 무릎을 다쳐 결국 한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한 채 초라하게 귀국해야 했다. 큰 대회에 약하거나 운이 따르지 않는 징크스가 이어진 것이다.
만약 황선홍이 98년 프랑스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만 있었다면 분명히 한국 축구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멕시코에 그렇게 허무하게 역전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네덜란드전에서도 이기지는 못했을망정 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황선홍의 마지막 힘이 남아 있을 때 홈에서 월드컵을 맞이한 한국 축구는 어쩌면 행운이 따른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