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양학선 후원의 밤 행사’에서 후원금을 전달하는 허준영 이사장. 양 선수는 이날 받은 후원금 1억 원을 UN스포츠닥터스에 기부했다.
이 단체는 의료봉사와 환경 및 교육 지원, 스포츠·예술 꿈나무 후원 활동을 주로 하며 의사, 한의사 등 의료진 2000여 명과 자원봉사자 2500여 명이 참여하는 것으로 소개된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면 지난해 10월부터 관련 기사 220여 건이 뜬다. 언론은 허 이사장을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해 한국마이팜제약을 설립한 입지전적 인물로 소개한다. 그런데 기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건 UN스포츠닥터스가 ‘유엔 등록 비정부기구(NGO)’라는 점이다.
두 차례 시정 조치 통보
이 단체 홈페이지를 보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진이 내걸렸고, 그 옆에 ‘UN스포츠닥터스는 UN 사무국의 DPI에 소속된 NGO입니다’라고 쓰여 있어 반 사무총장이 인정한 단체인 것처럼 보인다. 단체 이름에도 유엔과 유엔 로고가 함께 사용됐다. 허 이사장 역시 지난해부터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UN스포츠닥터스는 유엔사무국의 경제사회국(DESA) 소속 메디컬서비스 NGO입니다. 이는 공신력 있고 믿을 수 있는 단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탑골프’ 인터뷰)
“유엔사무국 내 DPI(공보국) 안에 있는 NGO 단체입니다. 유니세프도 산하단체로 있고, 우리는 사무국에 있는 단체로 한 단계 높은 단체로 보면 됩니다. 여기에 NGO로 등록돼 있기 때문에….”(‘한국경제TV’ 인터뷰)
그러나 이 단체는 유엔에 등록된 공식 단체가 아니며, 유엔은 UN이라는 명칭과 로고를 무단 사용하지 말라는 시정조치를 내렸지만 아직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주간동아’ 취재 결과 확인됐다. ‘주간동아’ 취재가 시작되자 유엔은 한국 외교부와 인천 송도에 있는 유엔 아·태경제사회위원회(UNESCAP) 동북아사무소에 이 단체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유엔 DPI 관계자는 ‘주간동아’의 질의에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3년 DPI에 International Environ ment Medical Service Corps(IEMSC)가 등록됐는데, 최근 이 단체가 우리에게 알리지 않고 UN스포츠닥터스로 이름을 바꾼 것을 발견하고 단체명에 UN이란 이름과 로고를 쓰면 안 된다고 두 차례 통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경고를 따르지 않아 이 사건을 법무국(Legal department)에 넘겼다. 이 단체는 유엔사무국 DESA와 아무런 연관성도, 경제사회이사회(ECOSOC) 협의 지위(Consultative Status)도 없다.”
따라서 허 이사장과 UN스포츠닥터스는 유엔 허가 없이 UN이라는 명칭과 로고를 무단 사용하고, 유엔 NGO를 사칭한 게 된다. 이에 대해 허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지난해 유엔 DPI에 소속된 IEMSC와 업무협약을 했고, IEMSC 이사회를 거쳐 최근 내가 이 단체를 맡게 됐다. 따라서 스포츠닥터스와 이 단체를 통합 운영하려고 단체 이름을 UN스포츠닥터스로 바꾸려 했다. 지금까진 IEMSC와 UN스포츠닥터스 명칭을 같이 쓰면서 (유엔 NGO라고)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다. 한국에선 스포츠닥터스라고 쓰니까 바뀐 것으로 간주하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진은 그분의 동생에게 사진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IEMSC는 2003년 홍종욱 박사가 설립한 의료봉사단체. 그렇다고 해도 유엔 NGO가 아닌 단체를, 미래에 있을 유엔 NGO와의 통합을 예상하고 1년여 동안 유엔 NGO라고 소개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은 해명이다. 그는 UN스포츠닥터스가 DESA 소속 NGO라고 밝힌 이유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한다.
외교부의 시정 조치 통보 전(위), 후(아래) UN스포츠닥터스 인터넷 홈페이지 모습. ‘UN’ 로고와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진 등이 빠졌다.
유엔 NGO는 유엔이 인가한다. 유엔 NGO와 업무협약을 한다고 유엔 NGO가 되는 것이 아니다. 허 이사장이 업무협약을 했다는 단체 관계자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허 이사장이 지난해 11월 우리 단체를 후원하겠다고 해서 업무협약을 맺었지만, 각종 행사를 하면서 우리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우리의 해외 의료봉사 활동 실적을 UN스포츠닥터스가 한 것처럼 소개했고, 자신들이 마치 유엔 NGO인 것처럼 말했다. 언론보도도 그렇게 나갔다. 봉사하러 왔다가 잠깐 사진 촬영만 하고 가는 등 여러 문제가 있어 결국 업무협약 해지 내용증명을 보냈다. 유엔 NGO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주간동아’는 이 문제를 유엔 본부에 확인했다. 남상민 UNESCAP 동북아사무소 부소장의 말이다.
“유엔 직속기관인 것처럼 표기해 혼란을 주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사진을 홈페이지에 크게 내건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0개 유엔 공식기구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 유엔을 사칭하면 등록취소는 물론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외교부 관계자 역시 “허 이사장을 불러 유엔 이름과 로고 사용을 시정할 것을 지시했다. UN스포츠닥터스는 정식 등록된 단체도 아니다”라며 “유엔 명칭과 로고 사용은 법무국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행사장에 대형 유엔 로고 내걸려
그렇다면 허 이사장과 UN스포츠닥터스는 왜 ‘유엔 등록 NGO’를 추구했을까. 유엔에 등록된 NGO를 ‘인수합병’하려던 이유는 뭘까.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는 “의약품 후원을 하다 보면 유엔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의약품 수출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단체의 후원행사에 참여했다는 A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석에서도 허 이사장은 자신의 단체가 유엔 NGO라면서 국내외 명망가를 고문으로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봉사보다 유엔의 공신력을 활용해 단체와 자신의 회사 인지도를 높이려는 인상을 받았다. 자사 제품 수천만 원을 후원한다고 하지만 금액도 확인할 수 없다.”
이 단체의 또 다른 문제점은 의료봉사 때 사용할 물품을 마치 현금을 기부한 것처럼 발표했다는 점이다. 이 단체는 허 이사장이 20억 원을, 체조선수 양학선과 방송인 정준호가 각 1억원씩 단체에 기부했다고 밝혔지만, 기부금의 실체가 명확지 않아 언론플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허 이사장은 “앞으로 의료봉사 때 쓸 한국마이팜제약 물품을 추산하면 그 정도 금액이 된다는 것이지 현금은 아니다”라며 “UN스포츠닥터스가 흑자가 나려면 3년은 있어야 하고 직원 월급도 나가는데 어떻게 그 금액을 현금으로 낼 수 있겠나. 양학선 후원회 행사에서 걷힌 후원금도 미미하다”고 말했다.
결국 이 단체는 유엔과 외교부의 지적을 받아 11월 4일 단체명에서 ‘UN’을 지웠고, 홈페이지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사진과 회원카드 이미지 등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