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육군 야전교범 3-24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 2006.
2000년대 들어 상대 마음을 움직이고 얻는 이 힘든 과업이 군인들에게까지 넘어왔다. 오늘날 국가는 공격하고 파괴해 적을 격멸하는 전통적인 용병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고 지역을 재건하는 만능 재주꾼을 원한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으로 파병된 군대들은 해당 지역 어린이들과 함께 운동하고 마을에 우물을 건설하는 등 생소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렇게 평화유지군, 지역재건군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군대들이 처음 주둔지역에 도착했을 때 시행하는 작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이 ‘주민동화’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을 소극적, 적극적으로 ‘나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에는 주민의 자유를 통제하거나 구호물품 등을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인 주민동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요즘 그런 방법을 쓰면 큰 역효과가 난다. 무언가 물리적이고 강제적인 수단이 개입되는 순간 주민동화는커녕 모두가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에서 붕어빵 나눠준 한국군
최근 미국 육군이 심혈을 기울여 재발간한 야전교범 3-24 ‘대반란전(Counterinsur-gency)’을 보면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주민을 동화할 수 있는지 잘 설명해놓았다. ‘대반란전’ 전반부에서는 지역 주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원칙과 방법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 세 가지를 추리면 다음과 같다.첫째, 상대적 지식을 갖춰라. 상대적 지식이란 쉽게 말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아는 것이다. ‘대반란전’은 무엇이 ‘보통’이고 ‘이성적’인가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은 세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각 나라와 민족은 ‘합리성, 태도, 종교적 신념, 성규범 등에 대해 각기 다른 관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미국 중심주의의 첨병이며 세계경찰을 자임해온 미군 교범에 ‘미국은 중심이 아니고 기준도 아니다’라고 명시한 것은 혁명적인 변화다.
둘째, 주민 마음을 움직여라. 적대감을 가진 주민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으로 내 쪽으로 기울게 만들 수 있을까. 자이툰부대의 민사작전(Civil Affairs Operations)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라크 지역에서의 평화작전, 재건복구작업을 위해 2004년부터 파견된 한국 자이툰부대는 2005년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부 장관이 미군에 “민사작전은 한국군 자이툰부대처럼 하라”고 지시해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군이 민사작전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해당 지역 문화와 풍습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파견됐고 지역발전을 위한 각종 건설활동을 했으며 마을 대소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자이툰부대는 파견된 지 몇 개월 만에 주민들과 이웃 같은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미군은 부지불식간에 강자 위치에서 주민들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미국적인 것을 될 수 있으면 노출하지 않고 주민들을 이해하는 ‘척’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은 반대로 했다. 태권도와 씨름을 가르치고 붕어빵을 구워서 나눠주는 등 한국적인 문화와 풍습을 가지고 주민들에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셋째, 주요 직위자가 참여하라. 재미있는 내용이다. 또한 이 항목은 서구 사회에나 필요한 내용일 것이다. 미군의 경우 전문적인 능력이 요구되는 회의나 토론이 있으면, 상대 측에서 특별히 고위급이 참석하지 않는 한 직책이나 계급에 상관없이 전문가가 참석한다. 워싱턴에 있을 때 한국의 대령급이 참석한 회의에 우리 7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실무자나 업무담당자인 부사관이 미국을 대표해 나온 것을 자주 봤다. 그것이 미국의 실용주의고 미국 업무문화의 강점이다.
그런데 ‘대반란전’에서는 주요 직위자, 가능한 한 고급 장교가 마을 회의, 지역사회 행사에 참석할 것을 명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서구 사회 이외 지역, 특히 아랍과 아시아 국가들은 실용을 떠나 명분, 위신, 체면 같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2008년 12월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서 4년 3개월간 활동하고 임무를 종결한 자이툰부대가 마지막으로 철수를 완료하기에 앞서 하기식을 거행하는 모습. 사진 제공 · 국방부
소비자 요구 수용한 일본의 한 식당
이 주민동화 원칙을 ‘고객의 입맛 사로잡기’에 적용해보자. 사람 입맛을 사로잡는 것 자체가 까다로운 일인데, 요즘 같은 세상에 요식업을 해서 살아남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고 한다. 국세청 통계에 의하면 지난 10년 동안 자영업 창업은 949만 건, 폐업은 793만 건으로 생존율은 16.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자영업 창업 중 70% 이상이 외식업인데 외식업 생존율은 6.8%라고 하니 그야말로 먹고사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다.외식업의 천국이라는 일본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특히 2013년부터 일본에 불어닥친 외식업의 불황으로 많은 업체가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독특한 콘셉트로 승승장구하는 레스토랑 체인이 있는데, 바로 ‘나의 프렌치(俺のフレンチ)’라는 프랑스 요리 전문점이다. 이들의 사업 성공 요인을 주민동화 원칙을 참조해 분석해보자.
첫째, ‘나의 프렌치’는 외식업계의 전형적인 손익분기 공식을 파괴했다. 대표적인 것이 재료원가 비율이다. 통상 외식업 체인의 재료원가는 판매가의 30%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프렌치’는 재료원가가 60〜90%를 차지한다.
미군이 ‘대반란전’에서 상대적 지식을 강조한 것은 미국의 가치, 관념이 아니라 파견되는 해당 지역 주민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심이 될 때 주민동화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프렌치’는 프랜차이즈 외식업계에 통용되던 재료원가 비율 공식이 아니라 소비자의 요구를 사업 중심에 둔 것이다.
둘째, 소비자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나의 프렌치’ 긴자점의 대표메뉴는 ‘쇠고기 안심과 푸아그라’다. 이 고급요리를 1만 엔에 맛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가격 파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의 프렌치’는 고급요리를 먹는 장소와 방식에 대한 그 나름의 기대와는 다른 차원에서 또 한 번 충격을 준다. 우아한 분위기, 격식에 맞는 식사법과 정반대로 서서 먹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원래 의도는 부대비용을 줄이고 테이블 회전율을 높이는 것이었으나 이것이 ‘나의 프렌치’만의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콘셉트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셋째, 고유의 매력을 창출하라. 파괴하고 뛰어넘는 것만으로는 사업의 지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 번화가에 나가 보면 천지가 음식점이다. 이제 싼값이나 좋은 맛만으로는 주변 업체와 경쟁할 수 없다. 상식과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호기심에 한두 번 가는 사람들 이외의 고객을 유치하기 어렵다. 남다른 매력이 있어야 다시 찾게 되고 남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나의 프렌치’ 긴자점에 가면 특급호텔에서 23년간 일한 셰프와 국제요리콩쿠르 수상자인 부셰프, 전문 소믈리에를 만날 수 있다. 매장이 갖는 이미지를 가격이나 맛에 맞췄다면 기존 다른 업체들과 차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프렌치’는 업계에서 만든 공식을 파괴하고 소비자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음으로써 ‘도전적이고 신선한 업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여기에 더해 업계 최고 인재를 영입함으로써 ‘진지하고 고급스러운 가게 운영’이라는 이미지까지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