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 낮 12시, 서울 강남 한 레스토랑에서 학부모 40여 명이 긴급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전국 43개 자율형사립고교(자사고) 학부모회장단으로 ‘자사고연합회’ 회원이기도 하다. 멀리 지방에 사는 회원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바로 문재인 정부의 ‘외고(외국어고교)·자사고 폐지’ 공약 때문이다.
송수민 자사고연합회 총회장은 “오락가락하는 교육정책 때문에 아이, 학부모 모두 불안해하고 있다. 아이들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엄마가 원하는 바다. 재학생뿐 아니라 후배들에게도 좋은 교육의 길을 열어줘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서울 소재 한 자사고 학부모회장은 “자사고는 반드시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내 아이도 국·영·수는 잘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그 부분을 키워주고 싶어 자사고를 선택했다. 일반고에는 이런 아이의 적성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동아리나 수업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재인 정부가 고교서열화 및 학력에 따른 차별 철폐를 주요 교육정책 목표로 내세운 가운데 이를 위한 실천과제로 제시한 ‘외고·자사고 폐지’ 공약을 놓고 교육현장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특히 고교서열화를 없앤다고 ‘서열’ 자체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란 목소리가 높다.
직장인 최모(38) 씨는 “아이가 초교 5학년인데, 조만간 강남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외고·자사고가 없어진다면 일반고 중에서도 이왕이면 ‘좋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닌가.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강남 고교들은 확실히 다르다고 하더라. 경제적으로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아이 미래를 위해 강남행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교육으로 외고·자사고 간 거 아냐”
전국 2350여 개 고교를 모두 일반고로 전환하는 것은 다양성을 억압하는 정책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오세목 서울자사고교장협의회장(서울 중동고 교장)은 “미래 인재 발굴을 위해서는 전국 고교를 하향평준화할 것이 아니라, 상향평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2002년 평준화의 대안으로 도입된 자립형사립고교(자사고의 전신)를 타당한 근거 없이 없애버리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특목고, 자사고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해왔다. 이런 학교들을 없애버리면 당장 일반고에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겠나. 미래지향적인 인재를 발굴하라고 하면서 모두에게 천편일률적인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건 문제다. 일반고는 수업을 다양하게 진행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자사고 등장 이후 줄어든 조기유학 붐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외고에 재학 중인 학생과 학부모들 역시 동요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녀가 서울 소재 외고에 다니는 한 학부모는 “외고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은 외고가 설립 취지와 달리 대입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수업을 편성한다고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임박한 고3은 외국어 공부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긴 하지만, 1·2학년 때는 매주 12시간 이상 외국어 수업을 강도 높게 진행한다. 외고에서 진행하는 수업은 상당 부분 대입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물론 명문대를 목표로 외고에 진학하는 경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외고 출신의 ‘의대’ 진학률이 여전히 높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이과 교차지원 등의 문제는 대입정책 차원에서 수정돼야 할 부분이지 외고·자사고 폐지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게 폐지를 반대하는 이들의 생각이다.
사교육에 대한 입장 차도 극명하다. 현고입제도를 바꾸면 사교육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란 주장과 지금도 외고·자사고가 사교육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외고 출신인 박모(20) 씨는 “어차피 중학교 영어 내신으로 합격이 결정되기 때문에 외고를 가려고 일부러 영어학원을 다닌 적은 없다. 정부가 2014년 학교별 선발고사를 금지한 이후부터 외고 진학만을 위해 학원에 다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자녀가 자사고에 다니는 한 학부모도 “정작 사교육의 온상은 과학고다. 내 아들은 현재 학원을 하나도 다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자사고가 학비도 비싸다는 얘기도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1년에 4번 학비를 내는데, 일반고에 비해 3배가량 비싼 건 사실이지만 분기별 금액으로 따지면 45만~50만 원이다. 이 정도를 두고 ‘금수저만 외고·자사고에 간다’고 매도하는 건 옳지 않은 듯하다”고 말했다.
일반고 교육 패러다임 변화가 먼저
한편 외고·자사고를 섣불리 폐지할 것이 아니라 ‘2015 개정교육과정’을 믿고, 공교육에 한 번 더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조근주 수시합격로드맵 연구소장은 “현재 중3 학생들에게 내년부터 처음 적용되는 2015 개정교육과정의 큰 틀은 융합과 진로 찾기다. 학교 수업에서는 모든 학생이 문·이과가 통합된 공통과목(7개)을 배운 다음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수강할 수 있고 기존 암기식 수업도 협력학습, 프로젝트 수업, 주제통합형 토론 등으로 바뀐다. 이는 이미 특목고, 자사고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식으로, 일반고에도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이 안착하도록 돕는 게 정부가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그러면서 그는 “공교육이 정상화되려면 교사들 역량부터 제대로 갖춰야 한다. ‘안 해봐서 못 한다’고 발뺌만 할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교육 시스템 아래서 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해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몇 년 뒤 일반고 수준이 높아지면 학부모들에게 아이를 외고·자사고에 보내라고 해도 안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그동안 사교육 철폐를 주장하며 교육시민운동을 이끌어온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은 고교서열화 문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은정 사걱세 정책대안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대표적인 방법으로 고입전형의 선발 시기 일원화를 꼽는다. 김 선임연구원은 “현재 고교 입학전형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있다. 영재학교·과학고, 외고·자사고, 특성화고 순으로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에 후기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은 처음부터 열등감, 패배감을 안고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해외에도 유명 사립고, 명문고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이 정도로 왜곡돼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한 사걱세 측은 외고·자사고를 일반고로 전환해 기존의 수직적이고 서열화된 교육과정을 수평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고·자사고의 수월성 교육을 일반고에도 그대로 적용해 학생 스스로 재능에 맞는 수업을 선택해 듣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 선임연구원은 “특목고나 자사고 입학에서는 중학교 교과과정과는 다른 면접이나 시험 등이 진행되고 학교별로 전형도 달라 대부분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이렇게 사교육으로 점철된 교육은 이제 정말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