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이 최근 항소심으로는 처음으로 ‘아내 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사건 개요는 이렇다. 정모(40) 씨는 4월 술에 취해 귀가한 후 부인 이모(40) 씨와 경제적 문제로 심하게 다투면서 이씨에게 상해를 입힌 후 한 차례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 검찰은 정씨를 강간치상죄로 기소했고, 1심 법원은 정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9부도 9월 22일 항소심으로는 처음으로 아내 강간을 인정해 정씨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외국에서는 이미 ‘아내 강간죄’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추세다. ‘아내 강간의 면책’ 법리가 확고히 자리 잡은 영미법계에서는 185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법원이 “혼인 계약 조건에는 남편이 원할 때 아내는 언제나 성교에 응한다는 철회할 수 없는 동의를 포함한다”는 법 이론을 채택한 후 이를 그대로 적용해왔다. 그러나 1984년 뉴욕 항소법원은 “혼인증명서를 남편이 형사면책권을 갖고 아내를 강간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며 아내 강간의 면책 법리를 폐기하고 아내 강간죄를 인정했다. 영국도 1991년 최고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을 계기로 아내 강간죄를 공식 인정해왔다.
대륙법계 국가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독일은 1997년 형법 개정을 통해 강간죄의 구성 요건에서 ‘혼인 외 성교’라는 문언을 삭제함으로써 아내 강간죄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아직까지 명확한 판례는 없지만 혼인이 실질적으로 파탄 난 경우에는 아내 강간죄를 인정한다.
우리 법원이 아내 강간죄를 인정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1월 16일 부산지방법원 형사5부(당시 재판장 고종주 부장판사)는 외국인 아내를 흉기로 위협해 강제로 성관계를 한 사안에서 강간죄를 인정했으나, 판결 직후 남편이 자살해 항소심 판단이 이뤄지지 않았다. 올 1월에도 1심에서 아내 강간죄를 인정한 사건의 항소심을 서울고법에서 진행했지만, 변호인이 항소 이유로 아내 강간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지 않아 이 문제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없이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1970년 “처가 다른 여자와 동거하는 남편을 상대로 간통죄 고소와 이혼소송을 제기했으나, 그 후 부부간에 다시 새 출발을 하기로 약정하고 간통죄 고소를 취하한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 처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되지 아니한다”(70도29)고 판단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 대법원의 유일한 판례였다. 국내 학계에서는 아내 강간죄를 인정하는 것이 대세였다. 따라서 대법원 판례도 바뀔 가능성이 높다.
여성을 남성 소유물로 생각하던 전근대적 부부관계는 철폐해야 한다. 이는 헌법상 원칙에 비춰도 인정할 수 없고, 형법상 강간죄의 객체인 ‘부녀’의 개념에서 배우자를 빼놓고 생각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 경우인 ‘남편 강간죄’도 가능할까. 폭행과 협박을 동원한 강제적 성관계라 할지라도 현행법상 강간죄의 객체는 ‘부녀’로 표현되는 여성에 한정돼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는 ‘강제추행죄’가 성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