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집을 떠나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것은 열정·수난의 길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열정을 뜻하는 영단어 ‘passion’에는 이 2가지 뜻이 담겨 있다. 주로 출장 목적으로 해외를 다녔던 필자로서는 단기간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의 10개 도시를 거치는 여행 일정은 무리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고난에는 소매치기 공포증도 포함됐다.
여행만 한 ‘창의력 부스터’는 없다. 과거 영국에서는 귀족 자제들이 개인 가정교사와 함께 유럽 대륙, 특히 이탈리아를 많이 여행했다고 한다. 영화 ‘전망 좋은 방’을 보면 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재불 미술가 김기주는 자신만의 조형어법을 확립한 좋은 작가다. 그는 20대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고 특히 인도만 3번 가봤다는데, 이 경험이 예술적 성취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어 보인다. 파리에서 만난 그는 “그 나이에 그러면 안 된다”며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편안하게 여행해야 한다”고 권했다. 동의하면서도 묘한 반발심이 드는 말이었다.
인천국제공항을 떠나고 14시간이 지나 파리 샤를드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를 가나 느껴지는 특이한 향의 담배와 향수, 향신료 냄새가 코가 예민한 필자를 괴롭혔다. 루브르박물관 근처에 있는 가성비 좋은 숙소에 짐을 풀고, 파리 거리를 걸어 다녔다.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을 감상했는데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서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수련이 물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물속에 잠긴 느낌이었다. “이 그림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레스토랑 두 곳과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레 뒤 마고를 방문했다. ‘파리지앵의 일상’보다 ‘관광객의 치열한 하루’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환율 탓인지 프랑스에는 한국인, 일본인 여행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여행객이 미쉐린 레스토랑이나 5성급 호텔에 가기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아침식사는 상황이 다르다. 예약하지 않아도 되고, 평소의 10분의 1 가격이면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메뉴는 커피와 주스, 빵과 달걀뿐이지만 말이다.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에서 앙리 마티스와 엘스워스 켈리의 작품을 감상했다. 이곳에서 루이비통 백을 살 수는 없었지만 가볍고 가격도 싼, 루이비통이라고 적힌 에코백을 구매했다. 필자는 여행 내내 헝겊 에코백을 사며 쇼핑 욕구를 억눌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파리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오후 10시 야식을 먹으려고 람블라스 거리로 나섰는데, 도시 전체가 밤이 실종된 느낌이었다.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약간의 현금과 카드 한 장만 들고 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우디 작품들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관광객을 압도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도 신비로웠다. 미국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역시 인상적이었다.
스페인 여행의 백미는 바르셀로나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지로나의 3형제 레스토랑이었다. 오로지 저녁 한 끼를 위해 떠난 시간으로, 이곳에서 4시간 30분 동안 만찬을 즐겼다. 이 레스토랑에서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디저트 요리사 조르디를 만났는데, 수많은 요리와 와인 16잔의 페어링은 그야말로 ‘미쳤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예술은 무엇이든 극한을 추구한다. 이곳에서 식사하려면 또 다른 극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며칠간 마트에서 빵, 치즈, 토마토를 사서 먹거나 가장 저렴한 식당에 다녔다. 거지의 식사와 왕의 만찬을 교대로 경험해보는 것은 그 경험의 진폭만큼이나 고난인 동시에 축복이다. 이 체험은 창의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두오모 대성당 근방에 위치한, 시간이 정지된 듯한 레트로풍의 저렴한 호텔에서 머물렀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서 젤라토를 먹고 화려한 야외 정원이 있는 리스토란테에서 소박한 저녁시간을 가졌는데, 밀라노 사람이 옷을 잘 입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라스칼라 극장에서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폰다지오네 프라다(프라다재단)에서 아르테 포베라 미술을 감상할 수 있었다. 밀라노는 세련된 도시였지만, 그 안에서 필자는 끊임없이 이방인임을 느꼈다.
이탈리아 친퀘테레 베르나차에서는 멋진 경치와 최악의 숙소를 함께 경험했다. 리셉션이 등산로 입구라면, 호텔은 인수봉 꼭대기 같은 곳에 위치했다. 직원은 등산 가이드처럼 이곳을 안내했는데 고객의 짐 따위는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꼭대기에 있는 식당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자 그 전망에 울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돌로 가득한 바닷가에서 발을 다친 순간,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보다 운명, 카르마를 실감했다.
렌터카를 타고 토스카나의 몬탈치노와 피엔차를 찾았다.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농업+관광)를 위해 그리 싸지 않은 농가 민박에서 머물렀다. 석양을 바라보며 이 지역에서만 마실 수 있는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과 민박집 주인이 만들어주는 저녁을 먹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영화 ‘글래디에이터’ 촬영장을 걸었고, 화이트 웨일 야외 유황 온천도 방문했다. 주차비를 제외하면 무료였다.
중세 도시 시에나를 거쳐 이탈로 기차를 타고 베니스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했다. 작은 호텔에 짐을 푼 뒤 산 마르코 광장을 거닐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물, 정원, 카페가 모두 멋있었고, 한 개인이 수집한 당대 최고 미술품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곳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눈에 띄었다. 말을 탄 남자 조각으로, 외설적이라기보다 유머러스했다. 조각을 보며 연신 키득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베니스 마르코폴로공항으로 향하면서 여행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탈리아 베니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만난 마우리치오 난누치 작품. [김재준 제공]
인천국제공항을 떠나고 14시간이 지나 파리 샤를드골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어디를 가나 느껴지는 특이한 향의 담배와 향수, 향신료 냄새가 코가 예민한 필자를 괴롭혔다. 루브르박물관 근처에 있는 가성비 좋은 숙소에 짐을 풀고, 파리 거리를 걸어 다녔다. 오랑주리미술관에서 모네의 수련을 감상했는데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서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수련이 물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가 물속에 잠긴 느낌이었다. “이 그림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라는 중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레스토랑 두 곳과 카페 드 플로르, 카페 레 뒤 마고를 방문했다. ‘파리지앵의 일상’보다 ‘관광객의 치열한 하루’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환율 탓인지 프랑스에는 한국인, 일본인 여행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여행객이 미쉐린 레스토랑이나 5성급 호텔에 가기 어려운 시기다. 하지만 아침식사는 상황이 다르다. 예약하지 않아도 되고, 평소의 10분의 1 가격이면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메뉴는 커피와 주스, 빵과 달걀뿐이지만 말이다.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에서 앙리 마티스와 엘스워스 켈리의 작품을 감상했다. 이곳에서 루이비통 백을 살 수는 없었지만 가볍고 가격도 싼, 루이비통이라고 적힌 에코백을 구매했다. 필자는 여행 내내 헝겊 에코백을 사며 쇼핑 욕구를 억눌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파리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오후 10시 야식을 먹으려고 람블라스 거리로 나섰는데, 도시 전체가 밤이 실종된 느낌이었다. 소매치기를 경계하느라 약간의 현금과 카드 한 장만 들고 다니며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가우디 작품들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관광객을 압도했다. 성당 내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도 신비로웠다. 미국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역시 인상적이었다.
스페인 여행의 백미는 바르셀로나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지로나의 3형제 레스토랑이었다. 오로지 저녁 한 끼를 위해 떠난 시간으로, 이곳에서 4시간 30분 동안 만찬을 즐겼다. 이 레스토랑에서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디저트 요리사 조르디를 만났는데, 수많은 요리와 와인 16잔의 페어링은 그야말로 ‘미쳤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예술은 무엇이든 극한을 추구한다. 이곳에서 식사하려면 또 다른 극한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며칠간 마트에서 빵, 치즈, 토마토를 사서 먹거나 가장 저렴한 식당에 다녔다. 거지의 식사와 왕의 만찬을 교대로 경험해보는 것은 그 경험의 진폭만큼이나 고난인 동시에 축복이다. 이 체험은 창의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방인임을 느끼게 한 밀라노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 전경. [김재준 재공]
이탈리아 친퀘테레 베르나차에서는 멋진 경치와 최악의 숙소를 함께 경험했다. 리셉션이 등산로 입구라면, 호텔은 인수봉 꼭대기 같은 곳에 위치했다. 직원은 등산 가이드처럼 이곳을 안내했는데 고객의 짐 따위는 절대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꼭대기에 있는 식당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자 그 전망에 울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돌로 가득한 바닷가에서 발을 다친 순간,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의 나약함보다 운명, 카르마를 실감했다.
렌터카를 타고 토스카나의 몬탈치노와 피엔차를 찾았다.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 농업+관광)를 위해 그리 싸지 않은 농가 민박에서 머물렀다. 석양을 바라보며 이 지역에서만 마실 수 있는 부르넬로 디 몬탈치노 와인과 민박집 주인이 만들어주는 저녁을 먹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영화 ‘글래디에이터’ 촬영장을 걸었고, 화이트 웨일 야외 유황 온천도 방문했다. 주차비를 제외하면 무료였다.
중세 도시 시에나를 거쳐 이탈로 기차를 타고 베니스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했다. 작은 호텔에 짐을 푼 뒤 산 마르코 광장을 거닐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건물, 정원, 카페가 모두 멋있었고, 한 개인이 수집한 당대 최고 미술품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곳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눈에 띄었다. 말을 탄 남자 조각으로, 외설적이라기보다 유머러스했다. 조각을 보며 연신 키득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베니스 마르코폴로공항으로 향하면서 여행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